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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4일 목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예레 31,31-34
복 음 : 마태 16,13-23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조명연 마태오 신부
프로야구를 보다가 예전에 잘 듣지 못했던 용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발투수가 내려가고 구원투수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투수를 향해 해설자가 ‘추격조’가 올라왔다고 말합니다.
10점 차 이상의 점수 차이로 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약간 실력이 떨어지는 투수를 올립니다.
어떤 때는 투수가 아닌 야수가 투수판에 올라와 공을 던지기도 합니다.
선수 자원을 아끼기 위한 작전입니다.
이때 올리는 선수를 예전에는 ‘패전 처리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추격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패전 처리조’라고 하면, 팬들도 이 투수의 실력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습니다.
또 선수들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팀에서
‘우리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추격한다’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답니다.
그러자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실제로 경기를 뒤집어 승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단어 하나로도 경기의 승패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의 마음가짐이 아닌, 긍정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또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나뿐 아니라 주변까지도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당신의 인기를 물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이었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한 말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는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입니다.
이제까지 당신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참 위상을 깨우쳐 주셨는데,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눈이 뜨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제 주님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문제는 아직 완전하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은 아니어서
수난 예고에 부활의 승리를 덧붙였지만, 부활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치욕의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에만 충격을 받아, 베드로가 나서서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며 유혹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물러가라는 말은 꺼져 없어지라는 뜻이 아니고,
내 앞길을 가로막지 말고 뒤로 물러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뒤로 물러나서 따라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의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뒤에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새계약의 사람들
-‘걸림돌’이 아닌 ‘바위’같은 사람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제 좋아하는 시편 성구입니다.
바로 새 계약의 사람들인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주제는 새 계약이며 그 내용이 퍽 고무적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맺어줄 새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겠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오늘이 바로 새 계약이 실현된 그날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주님의 새 계약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새 계약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마음 깊이 새겨진 주님의 법을 새롭게 발견하는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이런 새 계약을 통해 주님을 새롭게 체험함으로
우리는 복음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감격하신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 이름의 선물에 이어,
황송스럽게도 베드로를 초석 삼아 교회를 세우겠다는 교회 창립 약속,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
매고 푸는 권능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선물로 받은 베드로였지만
이어지는 주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위 고백이 불완전한 고백이고 주님을 제대로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발하는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충격적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거침없이 베드로를 직격하십니다.
베드로의 무지를 일깨우는 벼락같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에서 꼭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어 걸림돌이 되게 하고 내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반석에서 졸지에 사탄이 되어 버린 베드로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광야에서 주님을 유혹하는 데 실패 했던 사탄이
이렇게 재차 무지한 베드로를 통해 주님을 유혹했던 것이고,
영적 본능으로 즉시 깨달은 주님의 직격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충격이었지만 분명 큰 깨달음이었을 것입니다.
무지의 눈이 활짝 열리는 체험이었을 것이며
후에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함으로
비로소 명실상부한 주님이 주신 이름 반석이란 베드로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삼 우리의 믿음에 여정에 결코 값싼 은총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새롭게 파스카의 주님을 만남으로
베드로의 마음 깊이 새겨진 주님의 새 계약이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마음 안에 깊이 새겨진 새 계약의 법인
파스카 예수님을 새롭게 확인하는 복된 미사 시간입니다.
저절로 앞서의 시편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
우리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새 계약의 파스카 예수님과 늘 함께할 때
비로소 걸림돌이 아닌 반석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절로 나오는 새 계약의 파스카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저희 마음에 새겨진 영원한 새 계약의 당신이십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의 선물이옵니다.”
그러니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확인해야 할 새 계약의 파스카 주님이요,
날마다 새 계약을 살기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값싼 은총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좋은 결정적 증거인 새 계약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참 자랑스러운 보물인 성인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성인들로 조화된 아름다운 가톨릭교회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똑같은 성인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은 성인들 모두가 새 계약의 파스카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참 역설적인 진리가 파스카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내 고유의 참 얼굴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8월 4일은 전 세계 모든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아르스의 본당 신부' 라고도 불린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 기념일입니다.
역사적으로 파란만장한 격동기에 만 73세 선종 때까지
참 치열하게 살았던 성인의 감동적 생애를 일부 인용하고 싶습니다.
“성 비안네는 주민 230명이 거주하는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발령받았다.
당시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혁명의 결과 산산이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무관심했고, 아르스 주민들은 주일에도 들판에서 노닥거리거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춤추며 노는 날에 불과하였다. 성당에서 미사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비안네는 마을 주민들의 회심을 위해 하루 중 10시간 이상을
기도와 성체조배, 미사봉헌, 고해성사, 교리교육, 상담 등으로 성당과 고해소에서 보냈으며,
틈틈이 가정과 환자 방문을 하였다.
사제관의 의자, 식탁, 이불과 베개 등 거의 모든 물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딱딱한 침대에 짚을 깔아 사용했고, 그것마저도 조금씩 덜어 가난과 극기의 삶을 실행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마을 주민들은 이런 비안네 사제의 한결같은 모습에
감동 받아 점차 감화되어 갔으며, 몇 년 후 아르스 본당은 비안네가
처음 부임하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주민들은 비안네를 크게 존경하였으며, 미사시간을 알리는 성당 종소리가 들리면
성당은 금방 신자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을 즉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비안네 신부의 명성과 카리스마는 널리 퍼져,
1827년부터 그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고,
1855년 한 해에 방문한 숫자만 2만명에 달했으니 하루 평균 60명이 방문한 셈이고,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계속되었고,
하루 최소 16시간에서 최대 18시간까지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하루 평균 두세 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다.
1859년 8월 4일, 41년 5개월 동안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향년 73세로 선종한 날, 아르스의 모든 사람이 슬피 울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요한 마리 비안네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의 참된 모범”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반석과 같은 새 계약의 성인, 주님의 참 좋은 선물 비안네 사제였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반석이자 새 계약의 사람들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받쳐주소서.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시편51;12,14,19). 아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신 후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남들이 이러저러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말하기보다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몽당연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무엇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도 환시를 통해 ‘데레사의 예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가르쳐 주셨지만,
베드로는 그것에 관한 깨우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으로 말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생각하고 고백한 그리스도상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꾸지람을 들을 만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원의를 내세우려 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분이 원하는 나’를 추구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어 가려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에 걸맞은 모습, 제자다운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직자나 수도자의 허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의 약점까지도 당신의 일을 하는 데 쓰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여
이렇게 저렇게 흉을 보거나 잘못을 들춰내어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도구로 삼아 하십니다.
부족함도 많고 허물투성인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가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내 원의를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뜻에 꿰맞추려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 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고린15,58).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86년 군에 입대하면서 1달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주로 육체훈련을 받았습니다.
제식훈련, 사격 훈련, 태권도, 구보, 행군, 화생방 훈련을 받았습니다.
1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으면서 정신교육을 받았습니다.
군인수첩에는 외워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보초를 서면서, 쉬는 시간에 군인수첩의 내용을 외워야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군인 정신과 군인의 길입니다. 군인정신은 이렇습니다.
“군인 정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군인은 명예를 존중하고 투철한 충성심, 진정한 용기, 필승의 신념,
임전무퇴의 기상과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굳게 지녀야 한다.”
군인의 길은 이렇습니다.
“하나. 나의 길은 충성에 있다. 조국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둘. 나의 길은 승리에 있다. 불굴의 투지와 전기를 닦는다.
셋, 나의 길은 통일에 있다. 기필코 공산 적을 처 부순다.
넷, 나의 길은 군율에 있다. 엄숙히 예절과 책임을 다한다.
다섯, 나의 길은 단결에 있다. 지휘관을 핵심으로 생사를 같이 한다.”
36년 전의 아련한 추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엘리야가 왔다고도 합니다.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도 합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왔다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때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흡족 해 하시면서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 네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야단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신교육을 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받았어도,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 하느님의 법을 넣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에 하느님의 법을 새겨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법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았던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새겨야 할 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
맞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예레 31,34)
우리 인간은 때론 참 불쌍한 존재입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에 이미 저질은 죄와 허물 때문에
늘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죄스러워하니
자유롭지도 못하고 온전한 기쁨도 누릴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나요?
아무리 안 그런 것처럼 외면하거나 무시해도
내 맘속 깊이에서부터 그것을 지워낼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방법이 있답니다.
우리 인간은 그 방법이 없지요.
그것을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느님만은 그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자 하시네요.
내 법을 너희 가슴에 새겨 줄 테니
내가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테냐?
그렇다면, 나는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고
너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하시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아니 이보다 더 좋은 계약 조건이 있을 수 있나요?
새 스마트폰 사전 예약 조건보다 훨 좋은 조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두 말할 필요 없이 질러야지요.
계약기간이 오늘 중이랍니다.
하느님의 법을 우리 가슴에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받는
이 멋진 계약에 서명하시고
맘껏 자유와 해방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물으신다.
예수님에 관한 생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 한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도 예수님을 죽은 요한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엘리야는 예수님이 다시 태어난 엘리야이거나,
어딘가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어려서부터 예언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고,
사람에게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떤 예언자보다도 위대한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이는 줄곧 주님과 함께 지냈고, 기적을 보고,
당신과 함께 많은 표징을 일으킨 제자들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대답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이렇게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반석이라고 하신 뒤, 그 반석 위에,
그 고백과 믿음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이 고백을 한 사람에게 베드로라 부르시며,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19절)
그러시면서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편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꾸짖으신다. 아버지께 계시를 받고, 칭찬을 들었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졌다.
주님의 수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만 하는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탄이란, 히브리 말로 반대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 그분을 따르는 일과
하느님 아들의 가시는 길을 바꾸어 놓으려 한 것이 사탄의 일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유부단 혼합주의가 지배하는 교회: 햄릿이 될 것인가, 돈키호테가 될 것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의 이야기입니다.
12세기 덴마크 왕국 엘시노어 성에 자정이면 나타나는
죽은 왕의 혼령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유령을 본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는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독일 유학 중이었던 햄릿은 아버지의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만납니다.
유령이 된 아버지는 자신이 뱀에 물려 사고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죄 중에 죽어서 회개할 기회가 없었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는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 클로디어스가
자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삼촌일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햄릿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햄릿은 나라의 광대들을 모으고 ‘쥐덫’이라는 연극을 기획합니다.
왕이 어떻게 살해되는가를 현재의 왕 앞에서 보여주며 현 왕의 표정을 살피려 한 것입니다.
왕은 연극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합니다.
햄릿은 그때 삼촌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는 지옥에 갔는데 삼촌이 회개하여 천국에 가면 안 된다고 여겨 잠시 복수를 미룹니다.
햄릿은 자신도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오필리아라는 여인에게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사람들이오. 수녀원으로 들어가시오!”라고 모질게 말합니다.
화가 난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이를 따지기 위해 왔다가
햄릿이 어머니와 하는 이야기를 커튼 속에 숨어 듣게 되었습니다.
햄릿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결혼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커튼에서 부스럭하는 소리를 듣고는 칼로 찔러버립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그렇게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오필리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어티스는
왕 클로디어스와 짜고 햄릿을 죽여 복수하려 합니다.
검술 시합에서 칼에 독을 발라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검술 시합에서 햄릿이 레어티스를 압도합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왕은 포도주에 독을 타서 햄릿에게 마시라고 건넵니다.
그러나 햄릿의 땀을 닦아주던 왕비가 마시고 쓰러집니다.
술에 독을 탄 사실을 안 햄릿은 왕을 찔러 죽입니다.
레어티스도 상처가 심해 죽습니다.
햄릿도 독이 든 칼에 상처를 입은 터라 서서히 죽어갑니다.
처음에 선왕의 유령을 보았다고 알려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도 자책하며 죽으려 합니다.
햄릿은 죽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네, 호레이쇼. 아, 내가 진실을 말해줄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오.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의 숨결을 지속하며 내 이야기를 전해주게.”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대사.
이것은 우유부단함과 결정 장애의 극치를 표현한 말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살아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단 두 가지의 경우만 놓고 결정하면 좋은데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선택지를 놓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결정 장애의 원인은 선택지가 많아지는 데 있습니다.
어느 식료품점에서 매일 무료 잼 시식 행사를 열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여섯 가지 잼이 진열되었고 어떤 날에는 스물네 가지 잼이 진열되었습니다.
과연 어느 경우에 잼이 더 많이 팔렸을까요? 바로 여섯 가지만 진열된 경우였습니다.
스물네 가지를 진열했을 때보다 여섯 가지만 진열했을 경우
잼을 구입 할 확률이 무려 열 배나 높았습니다.
왜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구매할 확률이 줄어드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를 선택할 때 잃어야 하는 선택지가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여섯 가지만 있으면 다섯 가지만 못 먹는 아픔이 있지만,
스물네 가지가 있다면 스물세 가지의 잼을 먹지 못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사탄이 자신이 제외당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의 선택권을 많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너무 선택지가 많아서 주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과 악,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으로 명확히 둘만 구분하십니다.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번역을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할 때,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가끔은 하느님의 일도 생각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옳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반대됩니다. 선택지는 단 두 개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자녀이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탄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헛갈리게 만듭니다.
사람의 일을 도모하면서도 가끔 하느님의 뜻도 생각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선택해도 된다는 식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탐욕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이것과 반대되어 청빈해지고 절제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혼동시키는 번역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사탄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선택은 단 두 개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답이 없다느니, 이원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듣지 마십시오.
결정 장애에 빠져 무엇이 하느님 뜻인지, 무엇이 사탄의 뜻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선택하려면 선택지를 단 두 개로 좁힐 필요가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범죄도시 2’에서 범인은 20억이 든 가방을 들고 마 형사와 마주칩니다.
이때 제안합니다. “5대5로 나눌까?” 마 형사는 묻습니다. “누가 5야?” 범인은 당황합니다.
마 형사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잡으려는 것뿐입니다.
선택권이 많아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어린이와 같습니다. 관객은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넌 안 되겠어. 넌 좀 맞아야 해. 맞다가 죽을 거 같으면 벨 눌러. 내리게 해 줄 게.”
햄릿 증후군과 반대되는 상황이 ‘돈키호테’입니다. 돈키호테는 결정론자입니다.
자신이 기사라고 믿으니 그냥 기사로 삽니다. 당시는 기사가 사라진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술집 여자를 공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술집 여자 알돈자를 회개시킵니다.
둘시네아가 되게 합니다. 이를 위해 풍차와도 싸웁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믿음을 가진 자를 원하실까요?
하느님을 믿기는 하지만 숙부가 천국에 갈까 봐 기도할 때 죽이지 못하는 햄릿일까요,
아니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바보 기사를 원하실까요?
어린이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이들은 단순합니다.
세속-육신-마귀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해서 뭐가 좋을까요?
삶에 답이 없어지는 이유는, ‘욕심’ 때문에 선택지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신중’하다고 자기를 높게 평가합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사탄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이렇게 ‘극단적 이원론’을 놓고 선택합시다.
극단적 이원론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욕심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해답을 가지고 삽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