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적으로 비석은 귀부와 비신 그리고 이수(螭首)로 이뤄지는데, 귀부는 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을 가리키며, 비신은 비석의 내용인 비문이 적힌 몸통이고, 이수는 비신 위에 얹는 비석의 머리(지붕돌)를 뜻한다. 하지만 무열왕릉비의 경우, 애석하게도 중요한 비문이 적힌 비신은 없어졌고, 용을 새긴 이수와 거북이 모양 귀부만 남았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이수와 귀부만으로도 신라시대의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된다.
무열왕릉이 무열왕의 능이란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근거가 된 것이 바로 태종무열왕릉비 때문이다.
태종무열왕릉의 거북(귀부)은 생동감이 넘치는 조각솜씨가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실제로 앞에서 보면, 살아서
도망치려는 거북을 울타리속에 가두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661년에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승하하고, 이곳에 왕릉과 비석을 조성
했다고 볼때, 현재 거북(귀부)의 나이는 무려 1361살이 된다.
귀부의 등에있던 비신(碑身)은 잃어버리고 없지만, 이수(지붕돌)만
남아있다. 여섯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차지할려고 서로 뒤엉켜 있는
모습이다.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용의모습이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당시 석공
의 장인정신이 신기에 가깝다. 진흙으로 저렇게 문양을 새겨놓은 것도
아니고 돌에 어떻게 정교하게 조각을 할수있을까~?
이수의 가운데 부분에는 "태종무열대왕지비" 라는 글씨를 새겨놓아
이곳이 무열왕의 왕릉임을 알수있다. 글씨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글씨라고 한다.
귀부의 뒷모습도 디테일하게 조각되어 있다. 꼬리부분이 귀엽네요
거북의 목부분에도 이쁜 문양을 새겨 놓았으며 삼도가 뚜렷하다.
아래의 흑백사진은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찍은 태종무열왕릉 귀부
사진이다.
약100년전 사진인데 당시에는 전각은 없고 근처의 김인문 묘와 김양의
묘가 보인다.
원래 귀부의 근처에는 전각을 세웠던 초석이 남아있다.
귀부의 남서쪽에 있는 태종무열왕릉. 간단한 설명은 안내표지판을
참조하세요~
신라왕릉 가운데 처음으로 왕릉앞에 상석을 설치한 무덤이다.
서악동 고분군은 태종무열왕릉 뒷편으로 4기의 거대한 고분이 있다.
무열왕의 직계 선대의 무덤으로 보기도 하며, 고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는 법흥왕릉, 보도부인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으로 고증 하기도
했지만 그냥 서악동 고분으로 불리고 있다. 무열왕릉 앞에도 2기의
고분이 있는데 김인문 묘와 김양묘 라고 추정하며 1기의 귀부가 또
있는데 서악동 귀부 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경북 경주시 대형로펌 4859(서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