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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무에타이 이야기 스크랩 (짧은 다큐) 카오사이 갤럭시
김정주 추천 0 조회 384 10.12.16 11: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원래 무에타이선수였는데 펀치가 너무 강해서 복싱으로 전환해서 대성공한 케이스. 팩맨 출현 이전까지만 해도 아시아복싱 역사상 최고라고 불렸던 선수. J밴텀급에서 역사상 최다방어기록 보유자.

미국무대에서 활동하지 않아서 아주 높은 평가는 받지 못하는 선수. 한국선수 킬러이기도 했음. 태국의 영웅이었지만 돈은 별로 못 만져봤다고 함. 프로모터 등에게 이용만 당했다고.

스피드,테크닉도 별로 없어 보이고, 가드를 내린 채 스타일도 엉성해 보이고, 키도 작고, (키에 비해 리치는 길어 보이는데) 다리가 짧아 발도 느리지만...... 펀치의 파괴력과 정교함이 후덜덜함. 조지 포먼의 그것 같은 복싱을 함. 등짝과 어깨의 근육 좀 보기 바람. 갤럭시를 첨 봤을 때 눈이 너무 푹 들어가 있어서 라틴계인 줄 알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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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5월15일 타일랜드에서 장차 세계복싱사에서 가장 위대한 챔피언중의 한명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왼손잡이 슈라 사엔캄이 그의 쌍둥이 형과 함께 태어난다.

태국의 터프한 사나이라면 의례 그렇듯 수라 사엔캄역시 최강의 낙무아이를 목표로 수련했다. 1980년, 격투의 성지 룸피니의 최강자가된 펫챠분의 시골뜨기는 이후 카오사이 갤럭시라는 이름을 얻었고 세게를 향해 비상을 개시한다.

1980년에 프로복싱 라이센스를 획득한 카오사이 갤럭시는 초전 여섯시합을 연승으로 장식하고 81년 태국 타이들에 도전하지만 챔피언이었던 샤크다 샥수리에게 그의 캐리어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판정에의한 패배를 경험한다. 이후 카오사이 갤럭시는 그에게 패배를 안겼던 샤크다를 포함한 무려 열다섯의 상대를 연속 KO로 제압하는 괴력을 시위하며 WBA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와타나베 지로에 대한 도전권을 획득한다. 하지만 와타나베 지로는 방어전을 기피했고 결국 WBA는 그에게서 타이틀을 박탈하게 된다.

1984년카오사이 갤럭시는 동급2위였던 무패의 에우제비오 에스피뇰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 상대를 일방적으로 두드린끝에 6라운드, 상대가 양훅의 보디공격을 끝내 견디지못해 주저앉음으로 챔피언 밸트를 손에 넣게 된다. 이후 그는 이체급 역사상 최장인 19회의 방어전을 치루어 내게 되는데 이중 KO16회에 달한다.

어린 시절부터 턱에 적중한 하이킥에 의해 턱이 망가진 많은 무에타이 출신 복서들과는 다르게 그의 턱은 강철 그 자체였다. 명확한 데피니션의 근육덩어리였던 카오사이 갤럭시는 자신의 내구력을 믿고 엄청나게 궤적이 화려했던 강타로 그의 상대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왼손잡이였던 그는 어깨선이 상대와 직각을 이루도록 허리를 튼 자세로 시함에 임했는데 이를통해 그는 왼손으로부터 궁극의 파괴력을 소환했다. 그는 왼손훅이 특기였지만 양손의 바디공격과 왼손스트레이트, 그리고 왼손으로 명치를 가격하는 스트레이트역시 일품이었다.

방어면에선 헛점이 많은선수였지만 그를 상대했던 누구도 카오사이 갤럭시에게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1991년 50승을 달성한 이 링의 파괴자는 은퇴를 선언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1999년 WBA 평의회의 결정에의해 카오사이 갤럭시의 이름이 명에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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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사이 갤럭시는 초창기의 1패를 제외하면 전혀 흠집없는 복싱으로 일세를 풍미한 태국복싱의 위대한 별이다. 카오코 갤럭시와 쌍둥이 형제복서로 두 선수가 모두 세계타이틀을 손에 넣었지만 카오사이의 강력함에 카오코의 이야기는 언제나 덤으로 따라다닐 뿐이었다. 한국의 명선수들을 모조리 물리친 카오사이는 '태국의 타이슨'이란 별명으로 불리운 카오사이 갤럭시의 링 이력서를 살펴보도록 하자

무에타이의 초강자

1959년 5월 15일 태국의 수도인 방콕에서 한참 떨어진 페차분이란 시골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카오사이 갤럭시는 형인 카오코 갤럭시와 함께 태국의 꼬마들이 대개 그렇듯동네의 무에타이 도장을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격투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카오사이는 무에타이로도 대 성공을 거두며 더 이상 상대를 찾지 못하고 21세가 되던 1980년에 프로복싱으로 전향을 하게 된다.

태국의 돈킹이라 불리운 니와트 라오수완와트 프로모터는 카오사이가 무에타이에서 보여주던 파괴력이면 프로복싱에서도 세계챔피언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2년을 따라다닌 끝에 그를 프로복싱 무대에 세우는데 성공한다.

니와트를 매니저로 삼고 프로복싱 무대를 밟은 카오사이는 6연승(5KO)을 거둔 후 첫 패배이자 그의 레코드에 기록된 유일한 패배를 당하는데 삭다 삭수리라는 선수였다. (삭다 삭수리는 이승훈과 양일에게 지고 나중에 유환길의 IBF타이틀에 도전해서 KO로 패하는 그저 그런 선수였다)

태국 밴텀급 타이틀매치로 벌어진 경기에서 판정으로 패한 카오사이는 그 이후로 거침없이 내달리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카오사이 갤럭시의 무풍가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드디어 세계챔프로

처 패배 이후 카오사이는 6개월 후인 1982년 1월에 삭디사마이 초르시리라트를 7회 KO로 물리치고 첫번째 타이틀인 태국밴텀급 타이틀을 차지한다. 그가 세계타이틀매치에 나서기 전, 홈링에서 꽤 이름있는 복서들을 상대로 전적을 쌓아 나가는데 그 중엔 김철호의 타이틀에 도전한 바 있는 윌리 젠센(2회 KO)을 비롯해 한국의 테크니션 박찬영(판정승)도 포함되어 있고 한국의 주유억,주문균,엄재성,문연리등도카오사이의 주먹에 모두 백기를 들어야 했다.

1984년 11월 21일, 에우제비오 에스피날을 맞이해 공석중(와다나베 지로의 타이틀 박탈로 인해)이던 WBA 주니어밴텀급 타이틀 결정전을 펼치게 된다. 장소는 여전히 홈링인방콕이었고 에스피날을 6회 KO로 물리치고 드디어 세계를 정복하게 된다.

이후 8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주니어밴텀급의 무적챔피언으로 아성을 구축하며 언터처블의 위세를 떨치게 된다.

패배를 모르는 위대한 챔프

카오사이 갤럭시의 1차방어전은 우리나라의 이동춘이었다. 일방적인 리드 끝에 7회에 KO로 승리한 카오사이는 전직챔피언인 라파엘 오로노를 맞이해 2차방어전을 펼치는데4회까지는 오로노의 테크닉에 말려 포인트에서는 밀렸지만 파워에서 밀린 오로노는 5회에 KO로 무너져 카오사이의 복싱이 예사롭지 않음을 만천하에 고한다.

이때 형인 카오코 갤럭시도 카오사이의 활약에 고무되어 프로복싱 무대로 넘어오게 된다. 이후로도 카오사이의 방어행진은 거침이 없어 세계 각국서 날아온 자객들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간다.

에드가 몬셀라트(2회TKO),이스라엘 콘트라레스(5회KO), 엘리야스 피칼(14회 TKO) 정병관(3회 TKO) 콘트라니 파야카룬(판정승)등이 그의 챔피언 초기의 도전자들이었다.

이 즈음 형인 카오코 갤럭시도 윌프레도 바스케스를 스프리트 디시젼으로 물리치고 WBA 밴텀급 챔피언에 올라 형제챔피언으로 화제를 만들기도 한다. 한마디로 갤럭시가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1988년 홈링을 고수하던 챔피언 카오사이 갤럭시(물론 엘리 피칼전은 인도네시아 원정이었다)가 도전자 최창호를 맞이해 한국땅을 밟는다. 워커힐 쉐라톤호텔 특설링에서 마주선 두 선수의 무게는 달랐다. 챔피언 카오사이는 원정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최창호를 일방적으로 몰아세워 8회 TKO로 승리하고 8차방어를 마친다.

장태일,김용강,박제석도 KO패

9차방어전에서는 전 IBF 동급챔피언이었던 장태일이 파트너로 나섰고 테크닉을 바탕으로 1라운드를 유리하게 넘긴 장태일이었지만 2회에 카오사이의 펀치세례에 드러눕고 말아 그의 타이틀은 그야말로 노터치였다.

이번엔 일본으로 날아가 마쓰무라 겐지를 판정으로 잡고 두자리수 방어에 성공한다.이어서 알베르토 카스트로(10회 TKO)를 물리친 카오사이는 다시 한번 일본으로 건너 가마쓰무라를 다시 만나 이번엔 TKO로 경기를 끝내 한가닥 희망을 걸엇던 일본 복싱계를 허탈하게 만든다.

챔피언이 된지 어느듯 6년이 지났지만 그의 무쇠같은 주먹은 여전히 날카롭고 그 무게가 변함없었다. 1990년 두차례의 방어를 마친 갤럭시는 이번엔 플라이급에서 세계챔피언을 지낸 우리나라의 김용강을 상대로 맞이한다.

김용강의 테크닉에 한가닥 기대를 걸었지만 포인트에서도 밀리면서 6회에 KO로 패하고만다. 이어서 21승 1패의 미국산 어네스토 포드도 6회에 KO로 부수고 새해를 맞이한다.

1991년에 접어들어서도 카오사이 갤럭시는 여전히 강했다.

박제석과 데이비드 그리만을 각각 5회 KO로 물리친 카오사이 갤럭시는 그의 마지막 레코드가 되는 알만도 카스트로를 맞이해 19차방어전을 벌인다. 판정이긴 했지만 6~8 점의 일방적인 우세를 보인 압승이었다.

챔피언인 채로 물러서다

타이틀을 지킨 카오사이 갤럭시는 새해를 맞이하자 타이틀을 반납해 버린다. 나이는 33세로 링에 오르지 못할 정도로 노쇠한 것도 아니고 그의 주먹에 녹이 슨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더 이상 링에 오르기를 거부하며 링을 떠난다.

토탈 48전 47승(41KO) 1패를 남긴 카오사이 갤럭시는 도저히 경량급 복서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막강한 파워를 갖춘 사우스포였다. 대개의 사우스포는 상대의 공격을 기다렸다가 되받아치는 카운터잽이지만 카오사이 갤럭시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내는 해결사의 자질이 농후한 파이팅 머신이었다.

그가 위대한 또 하나의 이유는 무쇠펀치라던 사모라, 사라테,고메스 등이 결국 못볼 것 다보여준 후 추한 모습으로 링을 떠난데 비해 갤럭시는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는 것이다.

비록 미국 본토에서 활약하지 않았고 주니어 체급의 선수여서 미국 쪽에서의 평가는 터무니가 없을 만큼 낮지만 우리나라의 복싱팬들은 잘 알고 있다. 무려 13명에 달하는 한국의복서들을 군말없이 해치운 그의 실력을...그리고 그 카리스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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