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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림의 소리 스크랩 중국 섬서성 서안기행(3/4) 화청지
현림 추천 0 조회 232 13.07.02 05:26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칠월칠석 오작교에서 재회하는 양귀비와 현종)

 

 

중국 섬서성 서안 기행(3/4) 화청지(華淸池)

 

화청지는 무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시안(西安)의 북동쪽에 위치한 온천 휴양지로 역대 황제들의 

겨울철 휴양지로 각광 받았던 왕실 원림 역활을 하던 곳이다.

서주시절에는 주유왕이 리궁(驪宮)을 지었고, 이후 진시황과 한무제도 여기에 행궁(行宮)을 지었다고 한다.

특히 당 현종(玄宗)이 60만㎡의 넓은 면적 안에 양귀비를 위해 건설한 궁전과 누각이 가장 화려했는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호수를 중심으로 양귀비가 실제로 목욕을 했다는 해당탕이라 불리는 목욕탕과 양귀비의 석상까지 세워져 있다. 양귀비는 유달리 온천욕을 즐겼는데 이는 그녀의 액취증(암내)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후대 학자들은 말한다.

양귀비는 키는 대략 155cm, 잘룩한 허리에 몸무게는 65kg 정도로

당시 미인의 기준이었던 통통한 몸매를 가졌던 모양이다.

 

 

 

 

(가무쇼가 펼지치는 장생전과 화청지 연못의 전경)  

 

화청궁의 전체 구조는 4문, 10전, 4루, 2각, 5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연못가에 버드나무가 늘어지고, 석방(石舫)이나 어전, 정자, 회랑을 배치한 중국식 정원이 있고, 양귀비상도 서 있다. 어탕견지(御湯遣址)박물관에는 양귀비의 부용탕(芙蓉湯)과 현종의 구룡탕을 복원하여 연화탕으로 꾸며 놓았다. 이 온천의 물은 석탄, 탄산, 망간을 포함하며, 항상 43도를 유지하고 수량도 풍부하다. 화청궁 안의 오간청(五間廳)은 1936년에 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오간청에는 장개석이 잠깐 숙박하다가 장쉐량(張學良)에게 체포당하면서 생긴 총탄의 흔적과 구멍 뚫린 유리창 등이 당시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둘러본 중국의 몇몇 풍경구와 비교해 보면 규모나 시설면으로 빈약한 곳인데 화칭츠(華淸池)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된 것은 아마도 가무쇼 장한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북경올림픽을 연출한 장이머우(張藝謨)감독이 당현종과 양귀비의 러브스토리를 칠언절구로 쓴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를 토대로 재구성 연출한 것으로 여산을 배경으로 화청지를 그대로 야외무대로 삼아 레이져 등 각종 현대적 연출기법을 동원한 가무쇼다. 장한가 가무쇼는 비오는 날만 제외하고는 4월부터 10월까지 매일 저녁 8시30분부터 9시 30분까지 공연한다고 한다.

휴대폰 이외의 일체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입장 시 엑스레이 검시까지 한다고 카메라휴대를 하지 말도록 한 가이드가 권고에 따라 사진 한장 찍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양귀비는 미녀가 많다는 사천성 포주(蒲州) 영락(永樂: 지금의 산서성 영제永濟) 출신으로 고아로서 숙부 양립(楊立)의 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춤과 악기를 잘 다루웠고 피부는 백옥같이 희고 허리는 가늘고 몸은 풍만하였다고 한다. 16살 때 이런 재주로 궁녀로 뽑혀 후일 황태자로 책봉된 현종의 18째 아들 이모의 눈에 들어 결혼까지 하게 된다. 당현종의 본래 이름은 이용기(685~762)로 예종의 3째 아들로 황위를 선양받아 황제에 오른 사람이다.

 

 

황위에 오른 현종은 왕비 무혜비가 살아있을 때는 선군의 정치를 펼쳤으나 왕비가 죽자 정사를 멀리하고 비탄의 나날을 보낸다. 3000 궁녀가 있었지만 눈에 차지 않아 채홍사까지 파견해 보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우울했다. 그러든 어느 날 화청지에 춤을 추는 무희를 보고 마음이 동했다. 그 무희가 바로 양귀비인 것이다.

 

 

 

양귀비가 처음 궁에 들어 온 것은 현종의 18번째 왕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눈에 들어 비로 간택되어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 현종과 양귀비 둘의 관계는 시아버지와 며누리인 셈이다. 현종은 총애하던 왕비 무혜비가 죽은 후에 양귀비를 만났는데 그때 현종 나이 58세(740)였고 양귀비는 22살이었다고 하니 둘의 나이차가 36세나 된다. 로맨스인가 불륜인가. 그래서 제왕은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했던가.

 

 

             (밤에는 가무쇼를 위한 객석으로 변하는 비상전. 1700여 좌석이 여기에 마련된다.)

 

현종은 양귀비의 미모에 반했지만 자산의 며누리인 양귀비를 바로 취할 수 없어 환관 고력사(高力士)와 모사를 꾸며 양귀비를 도교 여도사로 만들어 화산으로 출가시킨 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韋氏) 성을 가진 새 아내를 맞게 해준다. 자연스럽게 부부의 관계를 끊게 하여 신분 세탁을 해준 셈이다. 그리고 양귀비를 다시 궁으로 불러 태진궁(太眞宮)을 지어주고 태진이라는 법호를 내려 여도사로 머물게 했다. 태진궁은 사실상 양귀비와 현종의 밀회장소가 된 셈이다. 그 후 천보(天寶) 4년(745)에 마침내 양귀비를 정식 귀비로 책봉하였다고 한다. 그때 양귀비 나이는 24였다고 한다. 귀비로 책봉된 양귀비는 현종으로부터 끝내 황후로는 책봉 받지 못했지만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 결과 외척의 난립과 부정부패로 시기하는 반대세력의 봉기와 안록산의 난 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불행이도 현종은 37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양귀비와는 자식이 없다.

 

                                                                   (관춘전)

 

 

 

 

현종의 극진한 총애로 단숨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양귀비의 형제자매들은 그 세력이 강대해져 궁궐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강 권세를 과시하며 많은 사람들을 농락했다. 특히 양귀비 덕분에 승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양국충은 양씨(楊氏) 집안에서 양귀비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아주 음흉한 성격의 소유자로 젊은 시절에는 고향 영락(永樂)에서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보내가 후에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서는 용맹을 떨쳤지만, 평소에는 늘 사람들을 괴롭히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사람이었다.

 

 

                                     (귀비전에 만들어진 해당탕이라 불리는 양귀비 전용탕)

 

                                      (연화탕이 있는 연화전이다. 현종의 전용탕)

 

 

               (화청지에는 황제 전용으로 두개의 탕이 있는데 하나는 현종의 연화탕과 다른 하나는

                                 아래 그림인 당태종 이세민을 위한 성진당이다)

 

양귀비의 품속에서 환락에 빠져 유희와 쾌락에 정신을 잃은 현종은 선위를 받을 당시에는 두 명의 명재상 요숭(姚崇)과 송폭(宋爆)의 보좌로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이루어냈지만, 후기에는 두 명의 간신 이림보(李林甫)와 양국충의 전횡으로 '천보대란(天寶大亂)'을 맞이하였다. '천보대란'이란 바로 당나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고 양귀비를 죽음의 길로 데려간 '안록산의 난'을 말한다.

 

                                                                    (태자탕)

 

                                (태자탕 앞에 설치되어 있는 온천수, 수량이 그리 많지 않다.)

 

영주(營州) 유역(柳域)의 호인(胡人) 출신인 안록산은 처음에는 변방의 일개 군졸에 불과했으나, 후에는 세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안록산이 이렇게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양귀비 때문이었다.

 

 

 

 

 

 

천보 6년(747) 정월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흥경궁(興慶宮)에서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록산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안록산을 양귀비는 수양아들로 삼았다. 그때 안록산과 양귀비와의 나이 차이는 17살이었다. 안록산은 현종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입궐하여 양귀비를 만났으며, 양귀비는 그를 화청지로 데려가 목욕을 시켜주곤 했다. 심지어 목욕이 끝난 다음에는 오색천으로 요람을 만들어 안록산을 어린애처럼 굴게 하고 그를 요람에 눕히기도 하였다. 수십명의 궁녀가 요람을 흔들어 양귀비 앞에 올 때 마다 안록산은 그녀를 "엄마, 엄마” 하고 불렀다고 한다. 17살이나 차이가 나는 아들을 둔 20대의 젊은 엄마, 가끔은 젖을 물리기도 하여 모성애(母性愛?)를 발휘하기도 했단다. 한번은 너무 열열한 모성애(?)로 유두(乳頭)에 상처가 나자 양귀비는 현종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 이를 감추기 위해 붉은 비단 천으로 가슴을 가렸는데 그것이 훗날 "허즈(河子)" 또는 "뚜떠우(?兜)"라고 하는 중국식 '브래지어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비상하는 처마를 가진 가운데 누각이 양귀비가 온천욕을 한다음 저기에 올라 머리를 말렸다고 한다.)

 

                                                                     (우왕전)

 

 

 

 

755년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가랑비 내리는 한여름 새벽에 승상 위견소(韋見素), 양국충, 양귀비 자매와 소수의 금위병만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장안성 연추문(延秋門)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마외파(馬嵬坡, 지금의 섬서성 흥평(興平)에 이르렀으나, 병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현종에게 양국충과 양귀비를 비롯한 양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기를 강요했다. 결국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양귀비에게는 마외역관 앞 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진하도록 명을 내렸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고 했던가. 이로서 양귀비의 삶도 종국을 맞게되니 그때 나이는 37세였다고 한다.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 언덕 아래 진흙 속에는

不見玉?空死處。 옥같은 얼굴 보이지 않고 죽은 곳만 공허하네

君臣相顧盡沾衣, 군신은 서로 돌아보며 옷이 눈물에 젖으며

東望都門信馬歸。 동쪽으로 도성문을 보며 말이 돌아가기를 믿을 뿐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정자 뒤편 누각인데 현판을 보니 <사음용>이라 되어 있다. 사용용도가 불명하다)

 

 

양귀비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일설에 의하면 안록산의 난 때 양귀비가 죽지 않고 일본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는 양귀비에 관한 이갸기와 함께 그녀의 유물과 사당, 무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양귀비가 3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30년간을 활동하다가 68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복궁이나 창경궁에 가보면 방화수를 담는 그릇으로 드므라는 용기를 두는데

                      중국에도 이런 용도로 설치한 것인지... 드므로 보기로는 너무 화려하다.)

 

 

 

 

 

흔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수화'(羞花: 꽃이 부끄러워 한다)라는 말을 쓴다.

하루는(아직 현종을 만나기 이전) 양귀비가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무성하게 꽃이 핀 모란과 월계화 등을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였다. 그래서 "꽃아! 꽃아! 너는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나 빛을 보겠느냐?라는 한탄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그 꽃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말려들어갔다. 그녀가 만진 꽃은 바로 함수초(含羞草)였던 것이다. 이때 한 궁녀가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 그후 그 궁녀는 가는 곳마다 "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을 내었으며, 여기에서 "수화(羞花)"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臨別殷勤重寄詞, 작별전에 간절하게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는데

詞中有誓兩心知。 말중에 두사람만 아는 맹세가 있었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깊은 밤 사람 없어 다정히 말씀하실 때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 되기를 원하셨죠

在地願?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 되기를 원하셨죠

天長地久有時盡, 하늘과 땅이 길고 영원해도 시간은 그 끝이 있지만

此恨綿綿無?期。 이 한은 길고 길어 그 끝을 기약할 수 없네요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 연리지는 두 가지가 하나로 엉커어 자라는 나무요,

비익조는 암수가 각각 외눈, 외날개로 둘이 합쳐야 날 수 있는 새다.

 

 

장한가(長恨歌)

~백거이(白居易 772~846)~

 

장한가는 양귀비와 당현종의 로맨스를 주제로  120구 840자로 된 칠언고시(七言古詩))로  백거이가 35세 되든 해 주지현위로 있을 때 쓴 시라고 한다. 백거이는 풍류를 즐겨 지방의 여려 숨은 선비들과 교분을 가졌는데 그 중 왕질부(王質夫)와 진홍(陳鴻)) 이라는 사람과 선유사(仙遊寺)에 나들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마외파(馬嵬坡) 언덕에 50 여년 전 원통하게 죽은 양귀비 이야기가 나와 죽은 이를 소제로 시를 써보라는 왕질부의 청을 받고 밤새 쓴 시가 바로 장한가라고 한다.

 

漢皇重色思傾國, 황제는 색을 좋아해 미인을 생각하고

御宇多年求不得。 재위 여러 해 구했지만 구하지 못했네

楊家有女初長成, 양씨집에 한 처녀 커가자

養在深閨人未識。 집안 깊숙히 두고 키워 사람들 알지 못했네

 

天生麗質難自棄, 하늘이 내린 미모 마음대로 버릴 수 없어

一朝選在君王側。 하루 아침에 선택되어 군왕의 옆에 있게 되었네

回眸一笑百媚生, 눈동자를 돌리며 한번 웃으면 백가지 교태가 생겨

六宮粉黛無?色。 후궁의 미녀들은 낯빛이 무색해졌네

 

春寒賜浴華?池, 봄추위에 화청지에 목욕하게 하자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수 매끄러운데 하얀 살결 씻었네

侍兒扶起嬌無力, 시동이 부축해 일으키자 힘없이 교태를 보이고

始是新承恩澤時。 이 때가 바로 처음으로 은택을 입을 때였다.

 

雲?花?金步搖, 둥근 귀밑머리 꽃같은 얼굴 금 머리장식

芙蓉帳暖度春宵。 연꽃 장막이 따뜻하니 봄밤의 일이 헤아려지네

春宵苦短日高起, 밤의 정사 힘들어 짧은 해 높아서야 일어나고

從此君王不早朝。 이후로 군왕은 조회에 일찍 나오지 않네

 

承歡侍宴無閑暇, 기분맞춰 연회에서 모시니 한가한 틈이 없어

春從春游夜專夜。 봄에는 봄나들이 밤에는 밤일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은 아름다운 삼천명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의 총애는 오직 한몸에 있네

 

金屋?成嬌侍夜, 금 전각에 화장하고 교태로 밤 시중

玉樓宴罷醉和春。 옥 루각 연회 파하면 봄과 함께 취하네

?妹弟兄皆列土, 자매 형제 모두 높은 자리

可憐光彩生門戶。 가련한 광채가 집안에 생겨나네

 

遂令天下父母心, 마침내 천하의 부모의 마음마저 움직여

不重生男重生女。 남자아이 중요시하지 않고 딸 낳기를 중시하네

驪宮高處入?雲, 려산의 궁궐 높아 푸른 구름이 들어가고

仙樂風飄處處聞。 신비한 음악 바람에 날려 곳곳에 들리네

 

緩歌?舞凝絲竹, 느린 노래 우아한 춤에 거문고와 피리소리 합쳐지고

盡日君王看不足。 날이 다하도록 임금은 보고 즐기지만 끝이 없었다

漁陽?鼓動地來, 어양에서 북소리 울리고 땅이 흔들려 오자

驚破霓裳羽衣曲。 놀라서 예상우의곡의 음악은 멈추었다

 

九重城闕煙塵生, 구중 궁궐에 연기와 먼지 생기고

千乘萬騎西南行。 천 수레 만 기병이 서남으로 떠나네

翠華搖搖行復止, 천자의 수레 흔들흔들 행렬이 다시 멈추고

西出都門百餘里。 도성문 서쪽으로 나와 백여리

 

六軍不發無奈何, 육군이 펼쳐지지 않으니 어찌하리

宛轉蛾眉馬前死。 부드럽던 그 눈썹 말앞에서 죽었네

花鈿委地無人收, 꽃 비녀는 땅에 떨어져도 거두는 이 없고

翠翹金雀玉搔頭。 비취깃털 금공작 옥비녀 흩어지네

 

君王掩面救不得, 군왕은 낯을 가릴뿐 구해주지 못하고

回看血淚相和流。 돌아보며 피눈물 서로 흘렸네

黃埃散漫風蕭索, 누런 먼지 날리고 바람 스산해지는데

雲棧?紆登劍閣。 잔교를 돌고 돌아 검문각에 오르네

 

峨嵋山下少人行, 아미산 아래에 행인들 적은데

旌旗無光日色薄。 깃발은 빛이 없고 햇빛도 옅어라

蜀江水碧蜀山?, 촉나라 강물은 푸르고 산은 푸른데

聖主朝朝暮暮情。 임금은 아침마다 저녁마다 정을 잊지 못하네

 

行宮見月傷心色, 행궁에서 보는 달은 마음을 상하게 하는 빛

夜雨聞鈴腸斷聲。 밤비에 들리는 방울소리는 애를 끊는 소리

天旋地轉回龍馭, 천지가 뒤바뀌어 어가가 돌아올 때

到此躊躇不能去。 이곳에 도착해서는 주저하며 가지를 못하네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 언덕 아래 진흙 속에는

不見玉?空死處。 옥같은 얼굴 보이지 않고 죽은 곳만 공허하네

君臣相顧盡沾衣, 군신은 서로 돌아보며 옷이 눈물에 젖으며

東望都門信馬歸。 동쪽으로 도성문을 보며 말이 돌아가기를 믿을 뿐

 

歸來池苑皆依舊, 돌아오니 연못과 정원은 모두 옛과 같은데

太液芙蓉未央柳。 태액지의 연꼿 미앙궁의 버들

芙蓉如面柳如眉, 연꽃은 얼굴같고 버들은 눈썹같아

對此如何不淚垂。 이것을 마주하고는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春風桃李花開日, 봄바람에 복숭아 배꽃이 피었던 날

秋雨梧桐葉落時。 가을비에 오동나무 낙엽지던 날

西宮南內多秋草, 서궁과 남쪽 정원은 가을 풀로 가득하고

落葉滿階紅不掃。 낙엽은 계단에 가득 붉어도 쓸지 않았지

 

梨園弟子白髮新, 리원의 자제들 이제 흰머리 새로 나고

椒房阿監?娥老。 황후전의 환관들과 궁녀들도 늙었다

夕殿螢飛思?然, 저녁 궁궐에 반딧불 날고 마음은 근심가득

孤燈挑盡未成眠。 외등이 꺼져도 잠을 이루지 못하네

 

遲遲鐘鼓初長夜, 천천히 종과 북울려 긴밤이 시작되고

耿耿星河欲曙天。 총총한 은하수가 하늘을 밝히려고 하네

鴛鴦瓦冷霜華重, 원앙 기와 차가운데 서리 꽃이 더하고

翡翠衾寒誰與共。 비취 이불 차가와 누구와 함께 할까

 

悠悠生死別經年, 길고 긴 인생사 다시 해를 더하는데

魂魄不曾來入夢。 혼백이라도 꿈속에 들어온 적이 없네

臨?道士鴻都客, 임공의 도사가 장안에 머무는데

能以精誠致魂魄。 정성을 다하면 혼백에 다가갈 수가 있었다

 

爲感君王輾轉思, 군왕의 잠 못이루는 생각에 감동해

遂?方士殷勤覓。 마침내 방사에게 간절히 찾아보도록 시켰네

排空馭氣奔如電, 공중으로 솟구쳐 번개처럼 달리고

昇天入地求之遍。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와 두루 찾았네

 

上窮碧落下黃泉, 궁벽에 올랐다가 아래로 황천까지 내려갔지만

兩處茫茫皆不見。 두곳 모두 망망해 보이지를 않았지

忽聞海上有仙山, 문득 바다 위에 신선산이 있다는 이야기 들었는데

山在虛無?渺間。 산은 텅비고 아득히 어렴풋한 곳에 있었다.

 

樓閣玲瓏五雲起,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구름 일었고

其中綽約多仙子。 그 속에는 단아한 많은 신선들 있었지

中有一人字太?, 그 중에 한사람 이름이 태진인데

雪膚花貌參差是。 흰 피부와 꽃같은 용모 대략 다르지 않았다

 

金闕西廂叩玉?, 금대궐 서쪽 행랑 옥대문을 두드려

轉?小玉報雙成。 시녀불러 서왕모 시녀에게 알리게 했다

聞道漢家天子使, 중국 천자의 사신이 왔다는 이야기 듣고

九華帳裡夢魂驚。 첩첩화려한 장막 속에서 놀라 꿈을 깨었네

 

攬衣推枕起徘?, 옷을 쥐고 베게 밀며 일어나 서성이며

珠箔銀???開。 주렴과 은 병풍을 비스듬이 밀며 차례로 열었다.

雲?半偏新睡覺, 둥근 귀밑머리 한쪽으로 밀려 있네 금방 잠이 깼구나

花冠不整下堂來。 화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온다

 

風吹仙袂飄飄?, 바람이 일어 신선의 소매 표표히 들리니

猶似霓裳羽衣舞。 오히려 예상우의춤을 추는 듯하다.

玉容寂寞淚?乾, 옥같은 얼굴 적막한데 눈물은 멋대로 흘러 붙어

梨花一枝春帶雨。 배꽃 가지 하나 봄비에 젖었다

 

含情凝?謝君王, 정이 가득한 눈길로 군왕에 사례하기를

一別音容兩渺茫。 한번 헤어진 후 목소리와 모습 모두 아득하군요

昭陽殿裡恩愛?, 소양전 속의 은혜와 사랑 끊기니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의 세월은 길기만 합니다.

 

回頭下望人?處, 고개 돌려 아래로 인간세상 바라보지만

不見長安見塵霧。 장안은 볼 수 없고 먼지 안개만 보일 뿐입니다.

惟將舊物表深情, 오직 옛물건으로 깊은 정을 표하고자 하니

鈿合金釵寄將去。 나전함과 금비녀를 가져가도록 부칩니다.

 

釵留一股合一扇, 비녀 하나 함 하나

釵擘黃金合分鈿。 비녀는 황금을 쪼개내고 함에는 나전을 분리했어요.

但?心似金鈿堅, 만약 주신 마음이 금이나 나전처럼 굳기만 하다면

天上人間會相見。 하늘 위에서 인간으로 서로 만나 볼 수 있을 겁니다.

 

臨別殷勤重寄詞, 작별전에 간절하게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는데

詞中有誓兩心知。 말중에 두사람만 아는 맹세가 있었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깊은 밤 사람 없어 다정히 말씀하실 때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 되기를 원하셨죠

在地願?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 되기를 원하셨죠

天長地久有時盡, 하늘과 땅이 길고 영원해도 시간은 그 끝이 있지만

此恨綿綿無?期。 이 한은 길고 길어 그 끝을 기약할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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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7.02 12:31

    첫댓글 양귀비 를 가졋던 사람은 삼천궁녀를 가졌던 의자왕보다도
    완전 한수 위 이구만요,,우리도 한때는 마누라가 그 어떤 탈랜트
    보다도 이쁠때가 있었더랬지요
    그래도 저 사람들은 남긴게라도 많으니
    성경 말씀대로 아버지를 잘 만나서 였을까요?

  • 작성자 13.07.03 06:59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 ㅎ ㅎ

  • 13.07.03 12:03

    형수님이 이뻤다?

    자기 눈에 걸린 안경...

    그땐 부처의 눈으로 보았나 봅니다...()()()

  • 13.07.04 04:05

    바라건데 앞으로도 부처의 눈 이시기를,,,특히 鉉植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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