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으라
방금 이전 장의 제목을 읽고서 놀라서 눈이 똥그래졌는가?
아직 우리가 다루지 않은 우상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것은 '죄가 아닌 죄'로 명명할 수 있다. 크립토니아트 제거를 완성하려면 이 죄를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 죄는 가장 포착하기 힘든 죄이기 때문에 가장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한 가지 비유로 이야기의 포문을 열어보자.
하루는 한 구경꾼이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면 너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가지 심오한 진리를 비유로 설명해 주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눅 14:16-18). 이 비유에서 키워드는 "사양"이다.
어떤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에게 도움이나 파티 참석, 일처리, 심부름 따위를 요청했는데 구차한 핑계만 돌아온다. 핑계란 무슨 뜻인가? 당신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뜻이다. 요컨대 "내 일이 네 일보다 더 급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이 사람은 그저 밥과 김치만으로 조촐한 밥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 아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그는 찾아온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이었다. 정식 초대장도 정성껏 찍어서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변명뿐이었다.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눅14:18)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가 대두된다. 밭을 사는 것이 죄인가? 물론 아니다. 그것이 죄라면 나도 약간의 땅을 산 적이 있으니 큰일이다. 하지만 땅을 사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해지면 그것은 죄다. "죄 아닌 죄"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크립토나이트 즉 우상 숭배다.
다음 사람의 변명을 들어보자.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눅14:19).
이번에도, 소를 사는 것 즉 사업 장비를 사는 것이 죄인가? 물론 아니다. 나도 사업 장비를 적잖이 샀다. 하지만 뭔가를 구입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해지면 그것은 죄다. 이번에도 그것은 죄 아닌 죄, 더 정확히 말하면 크립토나이트 즉 우상 숭배다.
마지막 초대객의 대답을 보자.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 지라 (눅14:20).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다. 아내와 결혼하는 것이 죄인가? 그것이 죄라면 나를 비롯해서 많은 남자들이 큰일 났다. 물론 그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해지면 그것은 죄다. 이번에도 그것은 죄 아닌 죄, 더 정확히 말하면 크립토나이트 즉 우상 숭배다.
이쯤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으리라 생각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활동이든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시하면 죄가 아닌 것이 죄가 된다.
※ 주께서 내게 원하셨던 것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퍼듀대학(Purdue University) 2학년 때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졌다. 나는 1981년 대학 동아리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그때부터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그야말로 활활 타올랐다!
그로부터 몇 달 뒤는 퍼듀 대학의 미식축구 시즌이었다. 당시 나는 3학년이었는데 우리 학교의 홈 경기를 전부 관람할 수 있는 시즌 티켓을 갖고 있었다. 그 전의 두 해 동안에는 홈경기를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관람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예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미식축구를 볼 시간에 성경을 읽고 공부했다. 남학생들은 죄다 경기장으로 응원을 하러 나갔기 때문에 동아리 받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기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제 미식축구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훨씬 더 즐거웠다.
아무도 내게 미식축구 경기장에 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미식축구 관람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실, 마지막 4학년 때는 미식축구 경기장을 꽤 들락거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텍사스 주 댈러스로 이사했고, 몇 달 뒤에 우리 교회의 사역자로 부임했다. 교회 사역의 규모가 워낙 크고 영향력이 광범위하다보니 사역자가 4백 명이 넘었다.
당시 댈러스 카우보이스(Dallas Cowboys)는 미국 미식축구 리그(Nstional Football Lesgue) 최고의 팀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나는 미시건 주에서 자란 탓에 딱히 카우보이스 팬은 아니었지만 월요일마다 사역자들에게서 그 팀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팀의 전적부터 선수별 기록과 화젯거리가 되었던 플레이, 그리고 물론 플레이오프 전망까지 어찌나 자세하게 읊는지 그 열정이 얼마나 강한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호기심에 카우보이스의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쿼터만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선수들이 워낙 시원시원하게 경기를 해서 볼수록 재미가 있었다. 재미도 재미지만 사무실의 직원들과의 대화에 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카우보이스에 대한 관심이 걷잡을 수 없이 강해져만 갔고, 언제부터인가 그 팀의 모든 경기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입에 침을 튀어가며 텔레비전에게 말을 걸고 선수들을 응원하며 때로는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결국 한 경기, 아니 경기의 한 장면만 놓쳐도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의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시즌이 아닌 기간에도 나와 동역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드래프트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카우보이스의 다음 시즌을 기대했다. 어느새 나는 아무도 못 말리는 팬이 되어 버렸다!
다음 시즌이 돌아오자 나는 흥분감에 휩싸였다. 주일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직행해서 신발을 벗기 무섭게 텔레비전을 켰다. 심지어 양복을 벗을 새도 없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 장면도 놓칠 수 없어 죽기 직전이 아니면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하프 타임이 되어서야 겨우 옷을 갈아입었다. 일단 경기가 다시 시작되면 아내가 뭔가를 도와달라고 해봐야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여보, 지금 중요한 상황이야!" 밥상을 차려놓고 불러도 하프 타임에 한술 뜨거나 아예 경기가 끝나고 먹지, 경기 도중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텔레비전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카우보이스 팀의 기록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자나 깨나 카우보이스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어느새 나는 사무실에서 대화를 주도할 정도의 카우보이스 전무가가 되었다. 우리 교회에는 시즌 티켓을 가진 교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경기장에 가자고 초대할 때마다 마다한 적이 없었다. 가기 싫어서 '구차한 핑계'를 대는 일은 절대 없었다.
다음 시즌으로 시계를 빨리 돌려 보자. 그 시즌이 찾아오기 직전에 나는 어떤 기도를 드렸는데 아주 간단한 기도여서 당시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내 인생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 기도는 이것이었다. "주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주십시오. 거룩해지고 싶습니다. 구별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 삶 속에서 당신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나 당신보다 우선시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밝혀 주시고 없애주십시오."
미식축구 시즌이 끝나가고 플레이오프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날은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카우보이스가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놓고 필라델피아 이글스(Philadelphia Eagles)와 한판 붙는 날이었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딱 붙은 채 요동도 하지 않았다. 소파에도 앉지 않고 텔레비전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마지막 쿼터 종류 8분밖에 남지 않은 시각, 카우보이스가 4점 뒤지고 있었다. 그때 카우보이스의 스타 쿼터백이 팀원들을 진두지휘해 골대를 향해 질주했다. 나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그대로 따라하며 실책 하나마다 절규를 쏟아내고 멋진 플레이 하나마다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에 한시도 한눈을 팔 새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사전 조짐도 없이, 성령이 내게 기도를 명령하셨다. 갑작스러운 촉구하심이 물밀듯이 밀렸왔다. "기도하라, 기도하라, 기도하라!" 마음 깊은 곳에서 강하고도 무거운 부담감이 느껴졌다. 당시 나는 그런 느낌이, 하던 일을 당장 멈추고 기도하라는 성령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장 순종하지 않고 큰소리로 기도했다. "주님, 8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경기만 끝나면 곧바로 기도할게요."
하지만 성령의 촉구하심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러갔다. 그래도 나는 그 느낌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끝까지 반항을 했다. "주님, 이 경기만 끝나면 다섯 기간 동안 기도할게요. 이제 겨우 6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카우보이스 팀이 공을 잡아 필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는 곧 카우보이스가 결정적인 터치다운을 성공시켜 경기를 승리로 이끌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기도하라는 촉구하심은 여전히 잦아들지를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슬슬 짜증이 났다. 이 중요한 경기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또 한 번 큰 소리로 말했다. "주님, 이 경기만 끝나면 종일 기도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밤이라도 새울게요."
결국 나는 경기를 끝까지 다 봤다. 카우보이스가 이겼고, 나는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즉시 텔레비전을 끄고 내 사무실로 올라가 문을 닫고 카펫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도하라는 촉구하심이 더 이상 감지되지 않았다. 부담감은 커녕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래도 이왕 무릎을 꿇었으니 억지로 기도를 짜냈다. 하지만 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경기를 선택했다. 나는 경기를 '핑계'로 하나님의 요청을 거절했다.
나는 카펫에 머리를 대고 탄식했다. "주님, 남들이 하나님과 댈러스 카우보이스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님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하지만 방금 전의 행동에서 실제로 제게 누가 더 중요한지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주님이 저를 필요로 하시는데 저는 끝내 당신보다 미식축구 경기를 선택했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 즉시 마음속에 대답이 들려왔다. "아들아, 나는 다섯 기간 기도의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순종이다."
※ 삶의 어떤 영역에서나
이런 형태의 우상 숭배는 삶의 어떤 영역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 같은 시기의 어느 날 아침, 대접에 시리얼을 부으려다가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나는 아침식사로 시리얼을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그날 아침 "오늘 아침은 금식해라"라는 하나님의 속삭이심이 들렸다.
그때 시리얼을 보며 침을 질질 흘렸던 기억이 난다. "주님, 다음 주에 사흘간 금식을 할게요. 오늘만 봐주세요."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기 위한 또 다른 구차한 핑계였다. 그 일로 하나님은 내 삶 속에서 음식이 하나의 우상임을 똑똑히 보여 주셨다. 식욕이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향한 욕구를 앞지른 덕분에 나는 그분과 함께할 귀중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소개하자면, 나중에 나의 골프 사랑이 도를 지나치게 되자 하루는 성령이 골프 클럽 세트 전체를(골프에 중독되지 않은) 다른 목사에게 넘기라고 명령하셨다.
그 뒤로 골프를 끊은 지 1년 반쯤 되었을 때 하나님은 한 프로 골퍼의 마음을 움직여 수천 달러에 달하는 자신의 장비를 내게 주게 하셨다.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다시 몇 달 뒤, 한 목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다며 내게 자신의 골프 클럽 세트를 내밀었다. 이제 나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하나님께 도대체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이 골프 장비들로 뭘 하라는 겁니까?"
그러자 마음 속에 음성이 들려왔다.
"가서 골프를 쳐라."
"하지만 전에 제 장비를 다 주고 골프를 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너의 골프 사랑은 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제 적당히 즐기는 취미 수준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나는 골프를 다시 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골프를 통해 내게 귀한 쉼을 허락하셨다. 또한 골프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뿐 아니라 내 아들들, 교역자들, 사업 파트너들과 교제하는 통로 역할도 하고 있다. 실제로 메신저 인터내셔널은 메신저 골프 토너먼트를 통해 5백만 달러 이상의 선교 자금을 마련했다. 내가 골프를 아예 끊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골프는 더 이상 크립토나이트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고백한 문제들은 죄가 아닌 죄들이었다. 사업, 사역, 스포츠, 관계, 즐거운 활동, 심지어 삶에 꼭 필요한 활동에서도 이런 죄를 지을 수 있다.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 죄가 아닌 죄가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삶을 즐기기를 원하신다. 성경에서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딤전 6:17).
하나님은 그분이 주신 놀라운 복을 우리가 모두 한껏 누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즐기기를 원하신다. 단지 우리의 우선순위 목록에서 첫 번째 자리를 항상 그분께 드릴 것만을 요구하실 뿐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활동보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 우선되어야 한다.
구차한 핑계, 심지어 합당한 핑계도 있을 수 없다!
※ 잔치를 놓치지 마라!
자 이제 예수님의 비유의 결론을 보자. 앞서 잔치에 초대를 받았지만 핑계를 댄 세 사람을 만나보았다. 나머지 구절을 읽어 보자.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 14:21-24).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를 위해 마지막 날에 베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 모두는 이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이 땅에서의 삶에 적용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을 방해하거나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우리를 초대하실 때는 언제나 더 좋은 뭔가를 예비해 놓으셨다는 뜻이다. 그 뭔가는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이 만남은 말씀과 지혜, 임재, 공급, 권고, 능력처럼 오직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온갖 놀라운 복의 성대한 잔치로 마무리된다.
하나님은 그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경기 도중에 나를 위해 뭔가를 예비해 놓으셨다. 언젠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필시 하나님은 원래 내게 배정되었던 그 복을 "길과 산울타리 가"의 누군가에게 대신 주셨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자책하지는 않는다. 이미 용서를 빌었고 그분의 긍휼은 지극히 크기 때문이다. 단, 나는 그런 실수를 통해서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다시는 크립토나이트에 연연하다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깜짝 선물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혜를 받으라는 예기치 못한 초대장이 날아올 때 열일을 제쳐놓고 달려갈 때마다 우리는 강해진다. 크립토나이트가 우리를 약화시킨다는 것을 잊지 마라.
안타깝게도 계속해서 핑계를 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끝까지 하나님을 최우선 사항으로 삼지 않다가 성대한 잔치를 놓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는 방이 있고 우리 모두가 초대를 받았으니 제발 핑계를 대지 마라.
나와 함께 내가 몇 년 전에 드렸던 간단한 기도를 드리지 않겠는가? "아버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십시오. 거룩해지고 싶습니다. 구별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 삶 속에서 당신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나 당신보다 우선시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밝혀 주시고 없애주십시오. 당신의 잔치를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 내 삶의 크립토나이트 제거하기
아무쪼록 이번 장의 끝에 소개한 기도를 드렸기를 바란다. 그랬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그분께로 가까이 이끌기 위해 당신의 삶 속에서 역사를 시작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분과의 사이를 방해하는 것들을 밝혀주실 것이다. 지금 그분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라.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변명이 되어버린 것을 알려달라고 요청하라. 하나님이 밝혀 주시는 것을 적고 나서 잠시 그것을 놓고 기도하라.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달라고 요청한 뒤에 알려 주시는 대로 적어 보라.
이번 장의 끝에 실린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라.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마음에 주시는 것이 있다면 뭐든 적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