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巖書堂儒契者爲松庵金先生而設立也道巖始爲書院而享先生及玉山李先生今爲堂爲契而獨擧先生何也先生之墓在堂後堂而兼墳庵之制玉翁之墓稍遠故別立齋祀事之供分焉契之論倡自陶山列郡響應蓋以先生神道之碑出自樊巖相公之手而其銘曰學有體用所遇盡公略施竗用扶我社稷足以見先生道成勩立之實而貞珉之功久而靡遑後學之責也噫先生斯文之宗匠也邦國之藎臣也早學爲己而知大方於溪冥之門無經不熟而尤得力於二程之書以文穆而爲友同陞六品之超俾鄕人而薰襲至發無爲不善之戒遂發身於俎豆輒忘軀於鋒鏑牛旨鼎津茂溪高靈知禮金山之敵喪氣而逃遁郡守樂正僉樞大將節度長銓之命生死而稠疊長城一壞之啓文忠有淚天何奪速之誄宣廟拊髀學問之正忠義之炳宜百世以祀而院宇之鞠爲茂草已四十九年矣一方章縫之瞻敬而羹牆之者捨是堂奚以哉乃以契貨而付于堂事有所係關尊衛者皆資之約時時聚首講先生之道與義而思所以開發後進帖旣成先生門孫相澈相宇問記于相稷相稷知道巖事甚悉謹書之以寓高景之思仍告二君而勖之曰松庵玉山兩先生生焉而志同道合故其歿也寒岡先生以義最多貞不磨對擧而竝悼之豈忍以夙昔共享之位遽相分貳於玆堂將事之際乎宜更合詢謀依舊奉享不然非所 以體念兩先生之心也
내용을 대락적으로 보면
고종 떄 도암서원 철폐 후에,
구한말에 도암서당으로 재건되어, 계를 조직해서 서당을 유지 시켰던 기록으로
송암선생의 대략적 약사와 서원의 기록이 있습니다.
울산 검단 문중의 두분 어르신께서 청하여 서문을 받았다는 기록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