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지관론과 보리방편문 (2)
따라서 우리가 관조(觀照)할 때는,
비춰 보는 것은 무엇을 비추어 보는가 하면,
초기에는 사람들이 아직 미숙한 때라 태양도 보라하고,
서산(西山)에 뉘엿뉘엿 지는 황혼도 보라하고,
이렇게 아주 영롱한 물도 보라하고,
영롱한 물을 자주 보면 혼탁한 마음이 그 인연 따라서 맑아 옵니다.
서산에 넘어가는 석양 그 장엄스러운 태양을 자주 보면
마음이 텅 비어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적인 것에 인연을 짓게 해서
그걸로 해서 우리 마음을 관조해서 통일 시키는 법을 처음에는 썼습니다.
초기 불경에도 그러한 법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면
법당에 있는 거룩하신 부처님을 애쓰고 본단 말입니다.
마리아 상(像)을 보고, 부처님 상을 보고 그러면
우리 마음이 그만큼 모아집니다.
이렇게 형상(形象)으로 보고는 관조하는 법을 익히기도 했지만
형상은 허망한 것이고 참다운 실상(實相)은 모양이 없다.
가장 고도한 형상은 모양이 없는 순수한 생명입니다.
이렇게 순수한 생명을 이제 인정할 정도가 되면
그때는 이관(理觀)이라, 마음의 원리를 보게 만듭니다.
천지 우주는 불성뿐입니다.
앞서 마하지관(摩訶止觀)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은 지(止)고,
마음을 어떤 경계에다 놓고 비추어 보는 것은 관(觀)입니다.
가장 위대하기 때문에 마하지관이라 합니다.
따라서 그때는 에누리가 없이 불성 자리에 마음을 딱 붙여 버립니다.
그것이 천태지의선사가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모아서 한 체계로 묶어서
제일 지혜가 수승한 사람한테 제시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어려워서 잘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하지관 수행법하고
이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수행법하고는 비슷비슷합니다.
그 관계를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보는 견해로는 보리방편문이 훨신 더 우수한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마하지관은 마음을 공(空), 가(假), 중(中) 그렇게 봅니다.
공은 마음으로 보는 모든 것이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의식은 실존을 못 봅니다.
물 자체를 못 봅니다.
못 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물 자체가 아니고
결국 모두가 사실이 아닌 가(假)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비었다는 것이 공이고,
모두가 가상(假相)이라, 거짓 가(假)자 가입니다.
그러나 텅 비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공이 아니라
무엇인가 일체 존재가 이루어지는 모든 가능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가운데 중(中)자, 중입니다.
중(中) 이것은 공과 가를 다 포함해 있습니다.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니고,
그와 같이 다 통하기 때문에 중도(中道)입니다.
천태지관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지의선사의 마하지관법은 굉장히 난해한 법문입니다.
보리방편문은 마하지관과 약간 비슷합니다만,
그러나 천태지의선사의 공가중(空假中)은
불성을 논리화시켜서 보았기 때문에
생명적인 역동성(力動性)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생명(生命)을 화석(化石) 시키지 않고서
생명 그대로 공부하는 법이기 때문에
더 우수하다는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너무 전제(前提)가 길어졌습니다만
보리방편문의 체계를 말씀하겠습니다.
이 보리방편문의 구성을 보면 여기 마음 심(心)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바로 부처님임을 설파했습니다.
우리 불교의 대요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해서
그렇게 간명하게 말씀이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법문이 대체로 심즉시불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씀을 다 합니다.
지금 이렇게 못나고 좁은 마음이 어떻게 부처일 것인가?
이렇게 회의(懷疑)를 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 마음의 표면이 불과하고,
우리가 쓰는 나요, 너요, 좋다, 궂다 하는 그 마음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우리 마음의 저변은 무한대로 우주를 감싸 있습니다.
김(金)가 마음도 천지우주(天地宇宙)를 감싸안고,
박(朴)가 마음도 역시 천지우주를 다 감싸 있습니다.
이것은 시공(時空)을 초월(超越) 무장무애(無障無碍)한 마음,
즉 영체(靈體)라 놔서
그때는 중복(重複)이 돼도 하등의 장애가 없습니다.
무장무애라!
박가 마음, 김가 마음 모두가 똑같이 천지우주를 다 감싸 있습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마음을 빙산의 일각 모양으로
겉에 뜬 표면의식(表面意識)만 사용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놈의 몸뚱이에 꽉 가려서
이 몸뚱이의 한계(限界)밖에는 못 사용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문은
그 몸뚱이에 갇혀 있는 마음을 잘 느끼고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이 아(我)라는 것에 갇혀 있는데
이 마음을 해방시켜서 본래 마음자리로 환원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佛敎)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런 마음이라 할망정,
이것은 부처가 다 된 마음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이 마음!
이 마음이 결국은 알고 보면 그때는 바로 부처입니다.
이 마음 바로!
마하지관(摩訶止觀)의 책도 보고,
천태학(天台學)도 보고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논쟁을 나중에 안하기 위해서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그 심즉시불(心卽是佛)하면
보통 심(心)이 아니라 도인(道人)의 심을 말하는 것이다.
또는 어느 분은 도인의 그런 마음이 아니라
우리 중생심(衆生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심즉시불의 논쟁입니다.
도인(道人)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지
어째서 중생 마음이 부처일 것인가? 이렇게 주장한 분도 있고,
중생 마음의 본 바탕이 결국 부처이기 때문에
중생 마음 그대로 부처라 해도 조금도 오류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두 파가 생겨서 굉장히 싸움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중생마음이 부처라는 논법이 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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