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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와모노(和物, 일본다완)
다완을 분류하는 방법은 원산지, 형태 등 다양하지만 가장 유력한 분류는 먼저 중국(唐物 카라모노), 조선(高麗物 코라이모노), 일본(和物 와모노)의 원산지로 구분하고, 그 다음 산지와 형태로 구분하는 방식이다. 와모노(和物)라고 하여 일본에서 만들어진 다완으로는 라쿠다완, 시노다완, 오리베다완, 하기다완, 가라츠다완, 쿄다완, 일본 고대시대의 스에키 토기로 유명한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세토다완을 비롯해 시가라키다완, 타카토리다완, 쓰시마다완, 이즈모다완, 아사히다완, 하쿠앙다완 등이 있다.
일본 다도를 처음 접하면서 수십가지 다완 종류에 어리둥절해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 무로마치시대부터 에도시대에 걸쳐 유명한 다도가들이 정한 법칙이 불문율로 정해진 경우도 많아서 다소 불명확해 보이는 경우도 많다.
1) 라쿠다완(樂茶碗)
일본 다도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다완으로 첫째는 이도(井戶), 둘째는 라쿠(樂), 셋째는 가라츠(唐津 : 가라츠야끼(からつやき[당진소(唐津焼)])의 준말로 사가(さが, 佐賀)현 가라츠(からつ, 唐津)시 및 그 부근에서 구워내는 회색빛이 도는 미색이며, 빨간 잿물을 칠한 연둣빛의 것이 많은 도자기)를 꼽는데 이도다완은 조선(朝鮮)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와모노(和物, 일본에서 만든 물건) 중에서는 라쿠다완(樂茶碗)을 최고로 꼽는다.
라쿠다완이 등장하기까지 일본에는 이와 같은 다완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다완이다. 형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통형(桶形) 다완을 모델로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라쿠다완의 탄생에도 역시 센리큐(千利休, 1522~1591)가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도시 사카이(さかい, 堺)에서 태어난 센리큐(千利休)는 간소한 정신적 미를 추구하는 '와비(わび)'를 이념으로 표방하여 일본 다도를 집대성(集大成)한 인물로 도자기(陶瓷器)를 통해 조선과 그 문화에 대해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무심의 마음으로 그릇을 빚은 조선 도공(陶工)의 마음을 공경(恭敬)하고, 그들이 만든 자기의 형태와 색에 강한 동경(憧憬)을 가져 조선 그릇을 원형으로 삼아 일본 차인의 마음에 맞는 다완(茶碗)을 만들려고 했다. 즉, 조선 다완의 형태에서 일본 다인의 마음을 비추어 보려고 했던 것인데 이 다완을 당시에는 이마야끼(ぃまやき, 今燒)라 했고, 나중에서야 라쿠다완(樂茶碗)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와비차가 유행하던 리큐(利休)시대에 그의 수제자 야마노우소지(山上宗仁)는 당시 사회풍조에 관해 "대체로 다완이라고 하면 중국 다완을 쳤다. 지금 세상의 풍조는 고려다완(高麗茶碗), 세토다완(瀨戶茶碗), 이마야끼다완(今燒茶碗, 라쿠다완) 까지를 친다. 형태만 좋은면 좋은 도구이다."라고 적고 있어 천목(天目)과 같이 화려한 중국 다완은 이미 인기가 없어졌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이마야끼 다완이 유행한 것은 증대된 수요의 자구책(自救策)이기도 했지만 당시 차인들의 취향(趣向)이 이미 고려다완(조선다완)이 아니면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당시 차인들은 조선다완과 유사한 일본적 감각에 맞는 새로운 유형의 다완을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기존에 이미 유행하고 있던 조선다완은 처음에는 밥그릇 등의 다른 용도로 만들어져 다완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제작 의도에서부터 차를 마시기 위한 다완(茶碗) 용도로 만들어진 이마야끼 다완이야말로 차인의 취향에 적합했던 것이다. 따라서 라쿠다완은 리큐(利休)라는 우수한 리더의 통찰력과 초지로(長次郞)라는 우수한 장인(匠人)을 통해 세인의 요구에 맞도록 일본 다도의 이미지를 예술적 조형으로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본 다도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리큐의 다도세계에서 와비정신을 근본으로 만들어졌던 도구들의 공통점은 극히 엄격한 칫수와 공간을 갖는다는 점이다. 특히 라쿠다완의 경우 리큐가 처음부터 다도용으로 최적의 다완으로 제작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직접 구상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라쿠다완은 적색과 흑색 두 가지로 차분하고 중후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흑다완(黑茶碗)이 우세하고, 낯설지 않는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은 적다완(赤茶碗) 쪽에 가깝다. 소성기술에 있어서는 흑다완이 보다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나 적다완은 흑다완보다 파손되기 쉽기 때문에 흑다완 보다 제작이 많이 되었지만 전해지는 작품수는 흑다완과 거의 비슷하다.
라쿠다완의 모습은 반통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특유의 유연하고 둥그스런 형태는 손으로 다듬어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자연적인 형태이다. 원판 모양으로 평평하게 펼쳐져 있던 흙은 조금씩 세워지게 되고 천천히 싸안듯이 안쪽을 향해 죄어져 구연(口緣, 잔입술)이 되고 잔 안쪽으로 넓혀지면서 내포적인 공간이 만들어진다. 고임자리와 차선자리가 자리한 공간은 점다(點茶) 시 거품이 잘 일도록 고안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라쿠다완의 가장 큰 특징은 감촉이 부드럽고 중압감이 느껴지며 열전도 면에 있어서도 우수하다는 점이다. 높은 온도에서 장시간 구워 완성된 자기다완(瓷器茶碗)과는 달리 라쿠다완 흙은 부드럽다. 라쿠다완의 흙은 수분을 듬뿍 담고 있어 뜨거운 차의 열을 머금어 손에 오래토록 온기를 전하며, 따뜻한 차의 온도가 달아나지 않도록 지켜준다. 그리고 초지로의 가마는 내요(內窯)라고 하는데 그것은 가옥 내에 설치된 소규모의 가마로 한 번에 한 작품만을 생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라쿠다완의 원형으로 삼았다는 조선다완 미시마오케(三島桶)는 대명물(大名物)로 굽이 낮고 크며 회청색계 유약을 씌운 가지런한 통형의 몸체를 가진다. 이 다완을 모델로 만든 다완에는 와비의 정취(情趣)를 내기 위해 그릇 표면에 일부러 균열(均熱)을 넣고 칠을 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미시마오케 다완을 원형으로 삼아 와비의 맛을 내고자 궁리한 끝에 마침내 라쿠야키(樂燒)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라쿠다완의 특징은 녹로(轆轤 : 물레)를 쓰지 않고 손으로 빚어 성형(成形)한 뒤에 철이나 대나무 주걱, 작은 칼 등으로 깎아서 형태를 다듬어 초벌구이한 후 유약을 발라 내요(內窯)라는 소규모 가마에서 한 번에 한 작품만을 구워내고, 가무천석(加茂川石)을 이용한 유약을 사용한 점이며, 유약의 색에 따라 흑락(黑樂), 적락(赤樂), 백락(白樂) 등의 종류가 있다. 흑락은 초벌구이한 바탕에 가무천석(加茂川石 : 교토의 가무천(かもがわ, 加茂川) 상류에서 채집되는 철분을 많이 함유한 갈색(褐色) 돌로 이것을 분말로 하여 흑다완의 원료로 사용한다.)을 사용한 유약을 발라 건조 시키기를 반복한 후 갑발(匣鉢, さや)에 넣어 1,000~1,250℃ 정도 가마에서 구운 후 철집게로 꺼내 급냉시키기 때문에 흑락(黑樂)에는 철집게 흔적이 남아 있게 되는데 이 또한 중요한 감상포인트로 여긴다. 적락은 당토(唐土, 당나라의 흙)에 장석(長石) 가루를 혼합한 반투명의 백유(白釉)를 붉은 취락도(聚樂土) 위에 발라 800~1,000℃ 정도의 저온으로 단시간에 완성하며, 소성기술에 있어서는 흑다완이 보다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나 파손되기 쉽기 때문에 흑다완 보다 제작이 많이 되었지만 전해지는 작품수는 흑다완과 거의 비슷하다.
초지로의 구로라쿠다완(長次郎の黒樂茶碗)
초지로의 원통구로다완(長次郎の筒茶碗)
학무늬형상 구로차완, 라쿠9대 작품, 1818
백색 후지산 라쿠차완, 호나미 코에쓰 작품, 에도시대(17세기), 국보
그리고 손으로 이겨 만드는 이 색다른 다완은 도공(陶工)이 아니라 초지로(長次郞)라는 기와공(瓦工)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는 사카이에 와 있던 조선인(朝鮮人) 종경(宗慶)의 아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종경이라는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쥬라쿠다이(聚樂第)라는 성(城)의 지붕에 얹을 기와를 굽는 장인(匠人)으로 일본 문헌상에는 아메야(あめや, [이야(飴也) 또는 이옥(飴屋)])라 기록되어 있는데 아메야는 고대 한국어로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초지로는 리큐의 지도를 받아 리큐의 마음에 드는 다완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라쿠다완(樂茶碗, 당시에는 이마야끼였다.)이다.
▣ 초지로에 대한 기록
기술적으로 라쿠는 중국 명(明)나라의 도우산사이(とうさんさい[당삼채(唐三彩)])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모야마(桃山)시대에는 쿄토(京都)를 중심으로 당삼채 유약을 사용한 도자기가 많이 생산되고 있었는데 사카이 초지로도 당삼채로 도기를 만드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고대문서에 따르면 사카이 초지로의 아버지 아메야 초지로(あめや 長次郞)는 중국에서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이주했는데 중국에서 당삼채 기술을 배워왔다고 한다. 사카이 초지로가 남긴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574년에 만든 2채색의 사자상이고, 첫번째 다완은 1579년에 만들었다. 산사이(三彩)를 잘 만드는 도공이라면 새로운 다완을 만들 때 충분히 이 기법을 응용해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長次郎作 二彩獅子像, 1574, 일본중요문화재
당삼채 도자기에 채색된 유약을 보면 라쿠와 색상만 다르지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한편 한국에서는 사카이 초지로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라고 하지만 한국에는 고려청자도 중국인들이 이주해서 만들었고, 분청도 똑같았다. 백자도 중국인의 영향이 많았는데 이렇게 중국에서 조선을 통해 일본으로 이주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종착역인 일본에서는 시발점인 중국을 생각하기에 중국인으로 말한다는 것이지 한국인의 공을 폄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찌 되었든 초지로는 일본에 귀화한 일본인이고, 전세계는 일본인으로 알고 있다.
※ 라쿠다완에 관한 외국 문헌을 번역한 내용 중 일부로 초지로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음을 살펴보고자 옮겨왔다.
일반적으로 라쿠야끼[락소(樂燒)]의 원조를 아메야(あめや)라고 하는 것은 단지 초지로의 아버지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제작 기법상에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전해지는 아메야의 유작(遺作)이 없어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으나 아마도 라쿠야끼 최대의 특성인 가무천석을 이용한 흑유(黑釉)
기법을 아메야가 고안한 것으로 추정되어 그를 락소성(樂燒成)의 원조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초지로의 유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락미술관(樂美術館)에 소장된 꼬리를 높이 들어 올린 사자상(獅子像)이 정교함이 돋보이는 우수한 작품으로 적토(赤土)를 사용하여 유약을 씌운 흔적이 남아 있으며, 그 복부(腹部)에는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1574년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명문(銘文)이 있다. 이에 사용된 적토와 유약이 적락(赤樂)과 매우 유사한 기법이어서 1574년에 이미 초지로는 적락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공이었던 초지로(長次郎)가 센노리큐(千利休)의 눈에 띄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교토(京都)에 지은 쥬라쿠다이(聚樂第) 내에서 센노리큐가 선호하는 다완을 구워 만들고, 최초로 ‘이마야키(今燒)’라고 부르거나 쥬라쿠다이(聚楽第)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다고 ‘쥬라쿠야키(聚楽燒)’라고 불렀다. <희유소람(嬉遊笑覧)>에 의하면 죠우케이(常慶)대에 이르러 히데요시가 ‘라쿠(樂)’이라는 글자를 내려주어 대대로 집안의 가호(家號)로 ‘라쿠’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라쿠야끼(樂燒)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이는 우리나라에서 임금이 성(姓)을 내려주는 사성(賜姓)과 같은 맥락(脈絡)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라쿠가(樂家)는 대대로 당주는 라쿠 키치자에몬(樂吉左衛門)이라는 이름을 습명(襲名)하며, 은퇴 후에는 아호로 불린다. 초대(初代) 초지로(長次郎), 2대 죠우케이(常慶), 3대 도우뉴우(道入, 별명 논코우), 4대 이치뉴우(一入), 5대 소우뉴우(宗入), 6대 사뉴우(左入), 7대 쵸우뉴우(長入), 8대 토구뉴우(得入), 9대 료우뉴우(了入), 10대 탄뉴우(旦入), 11대 케이뉴누(慶入), 12대 코우뉴우(弘入), 13대 세이뉴누(惺入), 14대 카쿠뉴유(覚入), 15대 쵸다뉴우(直入, 1949~), 16대 기치자에몬(吉左衛門, 1981~)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라쿠다완은 라쿠요(樂窯)의 창시자 초지로를 선조로 하는 라쿠 가문이 역대로 만든 다완를 말하며, 최근에는 라쿠가(楽家)가 만든 다완은 혼가마모노[본요물(本窯物 - 직계물)]라 부르고, 라쿠가 이외의 장소에서 만든 것을 와키가마모노[협요물(脇窯物 - 방계물)라 부른다.
<출처 : 다음블로그 [수평선 너머에 뜬 섬을 찾아서!....] 외 다수>
2) 시노다완(志野茶碗)
조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일본 고유의 다완으로는 라쿠(樂)와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는 다완이다. 현재 기후(岐阜)지방인 미노(美濃)에서 만들어지는 다완으로 크게 보면 세토다완의 일종이지만 워낙 독특해 따로 시노다완으로 분류된다. 어원은 무로마치시대의 차인(茶人) 시노 소신(志野宗信)이 개발하였다고 하여 시노야키라 하며, 일본 다완으로는 유이하게 국보로 지정된 다완 우노하나가키(卯花墻)가 시노다완이다. 백색의 유약이 기본이 되지만 회청색(쥐색) 적색, 홍색 등의 바리에이션이 있다.
국보로 지정된 시노다완(志野茶碗) 명(銘) 하나가키(卯花墻)
3) 오리베다완(織部茶碗)
시노다완과 마찬가지로 미노지방에서 탄생한 일본 고유의 다완이며, 센노 리큐(千利休)의 제자인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가 고안한 것이라 오리베다완이라고 한다. 라쿠다완과는 반대로 독특한 모양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많다. 기본적인 오리베다완은 흰 바탕에 올리브색이 들어간 것을 의미하며 바탕색에 따라 쿠로, 아오, 아카, 시노오리베 등 여러 바리에이션이 있다.
4) 하기다완(萩茶碗)
하기다완부터 시작하여 쿄다완 이전까지는 모두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조선 도공에 의해 개척된 다완으로 주로 가마가 있던 지역명을 기원으로 한다. 그 중 하기다완은 조선의 다완과 가장 유사한 전통을 유지해온 것으로 유명하며, 사용할 수록 찻물이 들어 색이 변하기 때문에 '하기의 일곱가지 변화(萩の七化)'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에도시대에는 제일은 라쿠, 제이는 하기, 제삼은 카라츠(一楽・二萩・三唐津)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명품다완으로 유명했다. 특이한 점은 다른 다완들에 비해 '처음 사용할때' 찻물이 그릇표면에 스며나와 이슬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찻물이 미세한 틈새를 메워 사라지게 되며, 하기 다완의 색을 사용할 수록 점점 변화시키는데 작용한다.
萩焼の茶碗(18世紀~19世紀)
5) 카라츠다완(唐津茶碗)
카라츠는 '당진(唐津)'이라는 한자답게 한국, 중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으로 1580년대 하타씨의 영지에서 처음 구워지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오늘날의 카라츠 다완은 임진왜란때 조선에서 잡아온 도공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일본에서 카라츠 도기라고 하면 보통 일상식기가 유명하지만 다완에 있어서도 명성이 높다. 카라츠 다완은 철유약으로 그림을 그린 에카라츠, 잿물과 철유약을 이중으로 시유해 그라데이션 효과를 내는 조센카라츠(朝鮮唐津)외에도 다양한 기법으로 제작되지만 특히 그라데이션 효과를 내는 조센카라츠가 높이 평가받는다.
唐津茶碗 「小宇宙」
唐津茶碗 「赤富士」
6) 쿄다완(京茶碗)
밥그릇 같이 생긴 모양이 특징이며, 크기도 큰편이다. 기본 모양을 만들고 그걸 가공해서 둥그스럽게 모양을 잡은 후 그 후에 그림 등을 넣으며, 때로는 금박을 칠하기도 하는데 인위적이지만 일본 특유의 화사함을 넣기도 한다. 에도시대 교토에 자리잡은 노노무라 닌세이, 기요미즈 로쿠벤, 오가타 겐잔 등이 와비차에 대한 지나친 쏠림에 반발하여 헤이안시대의 귀족적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백자에 화려한 문양을 넣으면서 크게 번졌다.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고 또 상대적으로 가격이 싸서 널리 보급되어 있다. 왠만한 라쿠다완 제대로 된 것은 비싸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쿄다완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출처] 다완(茶碗 : 찻사발)|작성자 상선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