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백산맥 필사를 하면서……
이 광 숙
2020년 6월 벌교읍에 위치한 태백산맥 문학관에서 필사원고를 보고 슬그머니 욕심이 났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필사에 대한 동경이 있겠지만,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태백산맥’은 1980년대 한국 문학 최고의 대하소설이라는 평을 받는 순천 출신 조정래 작가의 히트작이다. 대학시절 읽으며 느꼈던 가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기억한다.
해방이후 우리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백산맥」을 꼭 읽어보라고 권할 정도이다.
이야기는 여순사건에서 시작되어 광복 후부터 6.25 전쟁 휴전까지 보성군 벌교읍을 무대로 펼쳐진다. 해방정국의 생존을 좌우하는 토지를 둘러싸고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태백산맥 문학관을 다녀와서 안철수 선생님의 필사 제안에 다들 찬성하였다.
우린 여순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기를 원했고 태백산맥 필사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아랫시장에 위치한 호성당 카페에 모여 필사 진행에 대해 여러 의견을 나눴다.
함께 문학관을 다녀온 분들은 대부분 필사에 동의하며 열의가 타올랐지만, 소설 태백산맥은 10권짜리 대하소설로 작가도 집필과정에서 수 년이 소요된 만큼 많은 필사 분량에 부담을 느낄 수 있는 회원들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나는 회원들에게 일일이 전화하여 필사 취지를 알리고 참여 의사를 확인하였다.
당장 참여가 어려운 일부 회원을 제외하고, 김영자, 박귀주, 박명희, 성승철, 손미경, 안철수, 정운기, 장진, 조안나, 주정희, 조경심, 최경필, 최영숙 회원과 나를 포함 총 14명이 시작키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2020년 소설 태백산맥 필사에 도전하였다.
먼저 한 달에 한 권씩 시작해 보고, 10권 필사가 완료되면 완성본을 기증하여 전시토록 할 계획이다. 개인 사정에 따라 필사 참여를 조절할 수 있도록 동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열어놓았다.
필사를 시작하면서, 안철수 선생님께서 동인들에게 손수 네잎클로버를 코팅하여 좋은 글귀를 담은 책갈피를 만들어 주셨다. 시산 동인들에게 행운을 주기위해 만들었다는 섬세한 마음이 감동이다. 같은 것을 보아도,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의 감성에 감탄하며 시산의 보배임을 인정한다.
필사를 공책에 할 것인지, 원고지로 할 것인지부터 정해야 했다. 원고지가 완성본을 묶어 내기에 좋을 것이라는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사무실 앞 문구점에 부탁하여, 할인된 가격에 원고지를 대량 구입했다.
전시된 한 분의 필사본을 보니 하루 평균 3시간씩 매일 원고지 30매 분량을 573일 동안 필사하여 19개월이 소요됐고, 전체 완성한 필사분량이 원고지 16,641매였다고 한다.
회원들이 10권 전체를 필사하려면 파지까지 감안해 17,000매 가량의 원고지가 필요한 셈이다.
근영사의 200자 원고지 60매 기준으로, 1인당 8묶음을 1차 배분 후 추가 배분했다.
소설 태백산맥은 한 권당 340페이지 내외, 권당 10장~12장 내외의 단락이 나뉜 것을 감안할 때, 참여 회원 14명이 한 챕터씩 분량을 나누자니 필사량 차이가 너무 많고, 균일하게 페이지를 배분하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회원 중 일부는 태백산맥 책을 새로 구입하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대여하였지만, 간혹 배분한 페이지가 갖고 있는 책과 다르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알고보니 회원들이 보는 책과 내가 갖고 있는 책의 인쇄버전이 달라 페이지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명성대로 1천 3백만부 이상 팔리고 200쇄 이상 인쇄한 책이라 필사 전에 몇쇄 인쇄본인지 확인하는 것도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1권을 배분하고 보니, 매달 필사 분량을 고르게 배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회원 사정에 따라 필사 중간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추가로 필사하는 등 자율성을 부여했다.
바쁘다고 분량을 조금만 달라는 회원도 있었고, 열성을 갖고 빠르게 필사를 완성하는 회원도 있었다.
필사를 시작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8월 중순경 순천 지역에 코로나19 2차 확산이 시작되었다. 가파르게 확진자가 늘어가고 더 이상 안전지대는 없는 것 같았다. 모이기에는 위험했고, 개인 위생관리 철저히 하면서 가급적 모임자제가 최선의 예방책이라 여겨 8월 모임을 취소하는 대신 필사를 독려하였다.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필사하면서 부담감은 있었으나 새로운 도전이 문학에 대한 촉매제가 되어 좋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또한 원고지 쓰기, 띄어쓰기에 신경쓸 수 있어 평소 글쓰기 습관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였던 터라, 충분히 공감 되었다.
개인 차가 있겠지만, 틈틈이 필사를 했는데도, 한 챕터를 완성하려면 4-5시간 이상 걸렸고, 타자에 익숙한 손으로 펜을 잡다 보니 글쓰기를 오래 하면 손가락 관절, 고개 숙인 목과 허리가 아팠다. 이 짧은 작업에도 아프다는 몸의 신호를 보니 새삼 작가가 소설을 쓰기위해 바친 수년의 작업시간과 열정에 대해 절로 존경의 마음이 생기게 된다.
매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 필사하는 나를 보면서 남편과 아이들이 호기심을 갖는다. 중학생인 둘째가 먼저 태백산맥 1권을 읽기 시작했고, 고3 형도 질세라 수능을 준비하면서 태백산맥을 읽기 시작했다. 수능 보기 전 3권까지 읽었다니 웃음이 나온다. 그러면서 나름 수능 등급 저하에 기여하신 몸이라고 농담하는 걸 보니, 아들 녀석의 느긋한 넉살도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일이 바쁠 때는 미뤄놨다가 며칠 동안 전력 질주로 그 달 분량을 마감하기도 했다. 매일 꾸준히 글을 썼을 고독한 작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일부 회원들은 숙제를 못했으니 필사 진행 속도를 늦춰달라고 하였다. 다들 고생이 많지만 들리는 소문에 아직 필사를 시작하지 못 한 분이 계시다 하여 ‘일단 시작하면 늦더라도 되더라. 저도 이제사 박차를 가하는 중이니 힘을 내달라’고 독려하였다.
2020년 코로나 블루, 코로나 앵그리란 말이 들린다. 이유없이 우울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 필사는 시와산문 동인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참여의 책임감, 필사의 즐거움, 약간의 부담감을 갖고 다가온다. 모든 일의 가장 큰 어려움은 시작이라고 한다. 옛말에 시작이 반이라 하였듯이 목적이 분명하면 길을 잃지 않으리라. 문학동인 시와산문 동인의 태백산맥 필사 완성본을 전시할 내년이 기대된다.
‘어떤 일이든 시작을 잘하는 사람, 이 사람은 끝을 보게 되리라’는 소포클레스의 말로 동인들을 응원하며, 필사에 기꺼이 참여해 준 한 분 한 분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