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 1898년 음력 2월 2일(양력 2월 22일)
양 력: 1820년 12월 21일 20:00
음/평: 1820년 11월 16일 20:00 남자
시 일 월 년
甲 己 戊 庚
戌 巳 子 辰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대운: 순행
酉 申 未 午 巳 辰 卯 寅 丑
85 75 65 55 45 35 25 15 5.5
출생시는 도무사가 추정함. 갑자시도 가능성이 많음.
1898년(79세, 丙申대운 戊戌년) -- 2월 22일 사망함.
1828년(9세, 己丑대운 戊子년) 맏형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이 사망함.
1831년(12세. 己丑대운 辛卯년) 어머니가 돌아가심.
1832년(13세, 己丑대운 壬辰년) 여흥 민씨와 결혼,
1836년(17세. 庚寅대운 丙申년)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심.
1840년(21세. 庚寅대운 庚子년) 흥선정이 됨
1843년(24세. 庚寅대운 癸卯년) 흥선군이 됨, 이때부터 안동 김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방탕한 생활을 함.
1846년(27세. 辛卯대운 丙午년) 능을 이장하는 부서의 감독관이 된 뒤 여러 가지 한가한 직책을 맡아 봄
1863년(44세. 壬辰대운 癸亥년) 12월 8일 철종 승하, 그동안 세력다툼에 끼지 않기 위해 피폐하게 살다가 철종이 죽자, 조 대비와 손을 잡고 둘째아들 명복을 왕위(고종)에 오르게 하고(12월 13일), 대원군이 되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함.
1865년 46세. 왕권을 드러내기 위해 경복궁 재건 공사 시작. 왕조의 위엄을 살리기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 함. 공사비용을 보충하기 위하여 원납전을 발행함.
1866년(47세. 癸巳대운 丙寅년) 민치록의 딸을 고종의 비(며느리)로 맞아들임.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천주교도를 더욱 탄압하고 쇄국 정책을 강화함. 천주교 박해령 내림. 이때부터 6년 동안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명의 천주교도를 학살함,
1867년 48세. 경복궁에서 불이 남. 공사비용이 더 많이 들자, 다시 원납전을 발행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짐.
1868년 49세. 경복궁을 완성함
1871년 52세. 왕으로부터 인정받은 47개 서원만 남기고 전국의 서원을 모두 철폐함. 미국 무역선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남. 전국에 척화비를 세움.
1873년(54세. 癸巳대운 癸酉년) 민비가 최익현을 시켜 대원군의 잘못을 알리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도록 함. 11월,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발표하자 정치에게 물러남. 대원군이 전용하던 창덕궁의 전용문을 사전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하니, 그는 하야(下野)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양주 곧은골(直谷)에서 은거하게 되었다.
1874년 11월 민승호의 집에 폭발 사건이 벌어져 민승호가 사망함.
1882년(63세. 甲午대운 壬午년) 임오군란으로 민비가 도망가자 다시 실권을 쥠. 그러나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손을 잡아 대원군은 청나라군대에 납치되어 귀양살이를 함. 셋째 형 흥인군이 사망함.
1885년(66세. 甲午대운 乙酉년) 청나라에서 풀려나 위안스카이와 귀국함, 애첩 추선 사망함.
1887년(68세. 乙未대운 丁亥년) 큰아들 재면을 내세워 다시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함.
1896년(77세. 乙未대운 乙未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민비가 살해되자, 고종이 도움을 요청함.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러시아의 기민한 반격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에 의하여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고 친러정부가 정권을 다시 잡게 되자 대원군은 양주 곧은골(直谷)로 돌아와 다시 은거하게 되었다.
1897년(78세, 丙申대운 丁酉년) 음력 12월(양력 1898년 1월) 부대부인 민씨 사망.
1898년(79세. 丙申대운 戊戌년) 2월 22일,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남.
위키피디아 발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 1898년 음력 2월 2일(양력 2월 22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황족, 추존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1] :343,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1] :343 또한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첫댓글 위 생일이 맞는 듯함.... 어째든 흥선대원군의 사주는 임진일주가 아님.... 위키피디아도 생일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어디 묘비명이나 족보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임... 이 생일이 신빙성이 있어 보임.... 출처도 모르는 엉터리 명조를 가지고... 역학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행위는...초보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고...... 아주 나쁜 행위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골라서...역학계에서 퇴출시켜야 함니다...
초기...지지 목대운에는 파락호 생활로 지내다가.... 진대운 말에 권력을 잡음.... 계사대운 말에 민비에게 권력을 잃음.... 갑대운에...무토가 극을 받는데... 무토는 형제이면서...며느리이니... 세째형과...며느리 민비가 피살당함... 이 사주도 부모 사망 시기는 통변이 어려운데... 어째든 전체적인 길흉은 제일 잘 맞는다고 봄니다.... 임진일주나 임술일주는 전체적으로 잘 맞지 않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