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
<화엄경>에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
혹은 초발심시 변성정각(初發心時 便成正覺)이라는 했다.
물론 의상(義湘) 대사의 <화엄경 법성게(法性偈)>에도 나오는 말이다.
‘초발심을 했을 때가 곧 정각을 이룬 때’라는 말로서,
깨달음을 이루려는 맨 처음의 결심이 깨달음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깨달음을 이루려고 하는 맨 처음의 결심이
바로 깨달음을 이루게 되는 동기라는 뜻이다.
따라서 처음 발심할 때,
초발심을 했을 때가 문득 정각이 이루어지는 때,
구경각(究竟覺)을 이룬 때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처음 발심 한 그 마음이 변치 않고 그대로 있으면
곧 부처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다.
즉, 처음 시작할 때 가진 마음가짐이 곧 부처의 마음이란 뜻이다.
누구나 처음 시작할 때 가진 마음이 순수하고, 지극하며, 애틋해서,
이때의 마음가짐을 오래 지속하면 그것이 믿음의 핵심이고,
성불하는 길이라는 말이다.
일반사회에서 “초심으로 돌아가서”라는 말을 곧잘 하는데,
이에서 나온 말이다.
변정각(便正覺)에서 ‘변(便)’자는 ‘곧, 같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각(正覺)은 바르게 깨닫는다는 말이다.
깨달으면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만,
깨달음에도 차이가 있다.
‘깨달을 오(悟)’의 경우, 오도(悟道)라고 하는 것은
성품을 깨닫는다는 뜻이며,
정각(正覺)은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깨닫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초발심시변정각이라 함은 처음 발심을 하게 되면
그 서원이 부처의 마음과 일치가 되므로
부처의 깨달은 마음과 같다는 것이며,
그 같은 마음이 육바라밀과 십바라밀을 통해
공덕을 원만성취해 정각을 이루게 되는 것을 말한다.
처음 마음을 내는 게 ‘첫 마음’이라면 정각은 ‘끝 마음’이다.
그래서 처음과 끝이 하나로 통하는 초발심시 변정각의 마음이다.
<화엄경> ‘초발심공덕품’에서
제석천왕이 법혜 보살(法慧菩薩)에게 물었다.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내면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법혜 보살이 말했다.
“이 이치가 깊고 깊어서 말하기 어렵고, 분별하기 어렵고,
믿고 이해하기 어렵고, 증득하기 어렵고, 행하기 어렵고,
통달하기 어렵고, 생각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우니라.…”
보살이 처음 발심한 공덕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무량한 공덕이 있다고 했다.
범부는 스스로 부처임을 모르고 중생심으로 사는 것이고,
부처는 스스로 부처임을 알고 부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번뇌가 곧 깨달음이고 중생이 곧 부처이다.
생사가 곧 열반이고 초발심이 깨달음이라 했다.
견성성불과 중생구제의 초심으로 수행하면
성불하지 못할 이가 어디 있으며
불국토를 이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즉, 처음 마음과 끝 마음이 하나로 통하는 것이
초발심시 변정각의 마음이다.
초발심시 변정각이란 처음 부처님을 믿겠다고
마음을 내는 순간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돼있다.
처음 내는 보리심이 비로소 많은 행을 닦아 깨달음을 완성하는 것이므로
보살은 반드시 최초에 이 마음을 내서 잘못을 뉘우치고
믿음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대승불교에서는 특히 보리심을 내는 발보리심(發菩提心),
즉 발심(發心)을 중시하고 처음으로 깨달음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초발심은 정각(正覺)을 얻는데 있어 핵심적 요소라고 한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처음에 대단한 열정들을 가지고 시작했음에도,
사람의 일이란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무엇인가 이룰 것 같아서 일을 시작했지만 힘들고 안 될 때가 있다.
일이 이러니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하려던 것을 포기하게 되고,
첫 마음과 어긋난 길을 가게 된다.
실존철학(實存哲學)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
하나는 피투성(被投性)의 존재이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할 수도 없이
그냥 버려진 존재라는 것이다.
태어날 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날 것인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날 것인지,
이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병이 나고 싶어서 병이 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사고를 내고 싶어서 사고가 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우리가 선택하고 생각하고 할 그런 것 없이
그냥 버려진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금 수저를 가지고 태어났으면 좋았겠지만
가난한 집에서 흙 수저를 가지고 태어나서 고생을 하고,
그래서 학업도 포기해야만 하고,
꿈을 포기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두 번째 존재는 기투성(企投性)의 존재이다.
이것은 던져진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자신을 능동적으로 던질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나의 선택 없이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로 내가 선택해서
그 선택한 방향을 향해 내가 내 몸을 던지는 것이다.
비록 내가 피투성의 존재로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채로
나의 선택 없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거나 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났지만,
그냥 피투성의 존재로 가만히 남아 있을 것이냐,
아님 이것이 아닌 다른 삶을 향해 내 몸을 던질 것이냐를 결정해서,
능동적으로 내 몸을 던지는 그런 존재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믿겠다고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일으키는 사람은
피투성의 존재에서 벗어나 기투성의 존재가 되려는 사람들이다.
그냥 버려진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바세계라는 상황을 벗어나,
새로운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욕구와 의지가 충만해서
발보리심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하기에 누구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냥 던져졌다고 생각하면
지금 처해진 상황을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현재 처해진 어려움, 한계상황을 박차고 일어나서 발보리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발보리심을 일으켜
그 방향으로 내 몸을 던졌을 때, 그 첫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즉, 기투성의 존재성을 발휘해 초발심시변정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 수행을 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첫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그 첫 마음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
되새김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분명 부처님의 가피는 있을 것이고,
영원한 행복 - 열반적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법화경> ‘약초유품(藥草喩品)’에는 이런 비유가 있다.
“구름이 가득하게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어 일시에 비가 내리지만,
작은 뿌리 작은 줄기에 작은 가지 작은 잎새, 중간 뿌리 중간 줄기에
중간 가지 중간 잎새, 큰 뿌리 큰 줄기에 큰 가지 큰 잎새,
이렇게 크고 작은 여러 나무들은 각각 차별 있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흔히 자신의 수행 정도는 문제 삼지 않고
오직 기도를 하고 공부를 해도 부처님의 가피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전(법성게)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보익생 만허공(雨寶益生 滿虛空)
중생수기 득이익(衆生隨器 得利益)
즉, 보배의 비가 허공에 가득해 중생을 이익 되게 하지만,
중생은 자기의 그릇에 따라 이익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언제나 법계의 이치, 진리는 허공 가득하지만
우리네 중생들은 그릇 따라 그 이익을 얻어 가기 마련이다.
그릇은 작은데 많은 것만 넣으려고 하면 주체하지 못하고
그릇을 넘는 만큼 어리석음만 쌓여간다.
문제는 많은 것을 바라지 말고 그릇을 키워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릇을 키운다는 것은 작은 눈앞의 이익에 얽매이지 말고
고요히 마음을 닦아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 하나를 생각하기보다 전체로서의 ‘나’를 명상해야 한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태양이 지구의 모든 것들에게 일체 차별 없이 햇볕을 쏘이듯이
차별 없이 두루 주어진다.
다만 부처님 자비광명의 비를 받지 않으려고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있거나 마음의 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자비광명의 빛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종교를 가지더라도 마음의 문을 연 사람들은
지혜와 자비의 광명이 비칠 것이고,
절에 아무리 다녀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면
그 빛을 받을 수가 없다.
피투성의 자세로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기투성의 자세로 일어서야 한다.
그런데 절에 다니면 어떤 면이 유리한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음의 문을 열게 해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이 열려야 광명이 비치게 된다.
그러나 눈은 자기가 스스로 떠야 된다.
그래야 세상이 밝은 줄 알게 된다.
눈 감고 날마다 어둡다고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도움 청해 봐야 소용이 없다.
자기 업식(業識)의 안경만 내려놓으면
일체의 괴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한 사람 한 사람 내면속에 편제해 있는 천만 가지 잠재의식이 무량하다.
지혜의 눈이 열릴 때, 그 빛은 공덕이 된다.
한량없는 부처님 무량공덕은 마음을 닦는 사람에게만 피어난다.
여래의 무량무변하신 공덕은
자기 그릇을 반듯하게 놓을 줄 아는 사람에게만 감로비가 돼 담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뛰어난 감각적 표현으로 설명할 때 감로법문(甘露法門)이라고 한다.
감로는 그 맛이 꿀과 같이 달고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아,
이것을 먹으면 불노불사(不老不死)가 된다고 해서
하늘에 있는 신(神)들이 마시는 술, 신약 등으로 부른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감로를 열반, 깨달음 등으로 비유해서
생사윤회가 끊어진 해탈성불을 나타내는 가르침으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진리의 공덕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온 우주법계에 그대로 시방에 편만해 있어
마치 허공에 태양이 빛을 내어 온 허공을 밝게 비추어 주는 것과 같이
부처님 가르침인 진리의 법은 온 법계에 열려 있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원력에 의해 중생을 위한 가르침이기에
일체중생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행복이고 이로움이므로
누구든지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 되면 모든 죄업을 씻어내고
업장을 소멸하는 공덕을 쌓아 마침내 죄업의 굴레에서 벗어나
절대자유의 해탈과 깨달음의 공덕을 성취하는
최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성취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치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살아남은
빅토르 에밀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1997)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의사 겸 심리학자이다.
그는 수용소의 경험과 그가 창시한 ‘의미요법(logotherapy)’이라는
정신치료 학설을 실은 <인간의 의미탐구(MAN'S SEARCH for MEANING)>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여기서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사는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떠한 삶도 견디어 낼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는가 하는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삶도 견디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프랭클이 수용소의 극한적인 고통 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의미치료'의 학설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삶의 의미나 목적이 없으면 실존적 진공(existential vacuum)이 생기고,
허무와 권태와 싫증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왜 사는가’하는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경우, 초발심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불교에서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줄여서 발심(發心)이라 하는데,
발심이란 일반적으로는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음을 말한다.
요즘 말로는 동기부여와 비슷한 말이고,
유학에서 입지(立志)와 비슷한 뜻이다.
그러나 불교 나름에서 발심은 발보리심의 약칭으로
위없는 보리(菩提)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즉, 불도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등의 뜻이다.
이와 같이 발심은 동기부여를 강화하고, 화두(話頭)를 통해
수행의 의미를 지속하고, 용맹정진 해 화두를 타파하고자 함에 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얻게 되는 깨달음, 대각(大覺),
돈오(頓悟)는 곧 가기초월을 의미한다.
따라서 육바라밀을 닦아 실천하는 사람,
베풀고 자기답게 살고, 참고 견디며 선정을 닦으며,
부지런히 열심히 내일을 준비하는 바라밀의 길로 걸어가는 사람에게
부처님의 무량무변 하신 감로비가 내린다.
봄의 햇살이 골고루 하늘에서 비치는데,
자신이 양지의 삶을 살고 있는지, 음지의 삶을 살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반야를 닦는 공부요 수행이다.
부처님의 무량하신 자비는 차별을 두지 않는다.
부처님의 자비는 무한하다.
많이 받고, 적게 받고는 각자 자기 나름으로 하기에 달렸다.
지금이라도 발보리심을 일으켜 부처님 법 아래로 들어가자.
초발심시 변정각이라 했다.
시작하기가 힘들지 처음 믿겠다고 결심만 하면 곧 이루어질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