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자비심의 발동 (28일 차)
새벽 4시 .
침실 옆 문을 열고 나가면 제법 큰 베란다가 있어
빨래도 널고 테이블도 있음
어제 마트에서 산 과일을 먹으러 나와 하늘을 보니
잔뜩 흐린 날씨에 안개비가 내림
빨래대에는 알베르게에서 널어놓은 침대커버와 대형 수건등
30여장이 널려있음
우선 저것부터 걷자고 생각.
하나씩 개며 걷는데 20여분 걸림
하고 나니 흐뭇하기도 하고 괜한 짓을 했나 하는 기분도 듬.
선의로 한 일이니까 하고 자위해봄
배낭덮개를 씌우고 판초우의를 입고
28일 만에 처음으로 헤드램프 사용
조금 걸으니 앞에 외국여자 둘이 손전등을 들고
이리저리 비추며 천천히 걸어감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추월하자 밝은 헤드램프에 신기한 듯.
정말 대낮처럼 잘 보였음
그녀들 걸음이 느려 한참 앞서자
나는 돌아서서 불빛으로 신호주기를 여러 번.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생김
까미노는 한 목적지를 향해가는 사람들이라
서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김
오늘은 출발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안개비를 맞으며 걸음.
주위는 온통 안개 속 .
상념에 사로잡혀 성가
주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며
지나간 일을 속삭입니다
손을 맞잡고 산과들을 따라
친구가되어 걸어갑니다
그리고 성가 2번
주하느님 지으신 모든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이 성가를 부르면 정채봉 님의
‘벚꽃으로 돌아오다’ 라는 글이 생각나며
괴산 어느 마을 숲에서 2번 성가를 부르던
아기업은 초등학교 학생이 떠오름
그 글을 읽으면
따뜻함과 순수한 사람냄새가 나서 참 좋음
자기 전 오늘을 되돌아보니
어설픈 자비심이 발동된 것 같다.
빨래 걷은 일이 공연한 불편을 준 것은 아닌지...
그리고 불빛을 비추어 준 사실에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열반경에
"선행의 근본을 묻거든, 자비심이라고 대답하라.
불보살에게는 자비심이 근본이요,
자비심을 기르면 끝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선의로 한 일이니 괘념치 말자.
좁은 문과 천사 두 마리 개 (29일 차)
오늘도 어김없이 출발 후 4시간 동안 안개 속을 걸음.
갈라시아 지방은 바다가 가까워 안깨끼고 비오는 날이 많음
5시20분 부터 헤드램프에 의존해 산속 길을 혼자 걸음
안개 속에 사진도 찍을 수 없어 시골마을 작은 성당 2 곳과
개사육장(엄청 큼)담 밑에 잘 가꾼
꽃밭과 버섯모양 촬영하고 가정집 정원도 ..
길에 수없이 많은 소똥,
아니 소똥으로 만들어진 길을 1주일째 걸으니
처음엔 역겹다 지금은 구수한 냄새가 남.
풀을 먹은 똥이라 건초가 많이 섞임
어렸을 때 가마솥에 쇠죽 끓이던 냄새 같기도 하고
술 익을 때 나는 누룩 뜨는 냄새?
이젠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마저 든다
오늘은 좁은 문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오늘 여정은26키로인데 가이드 북에서 추천한 곳인
까미노에서 벗어난 비라드 데 도나스를 갔다오면
4.4키로를 더 걷게됩니다.
어찌할까 망설이다 방문키로 결정.
많은 이가 지나치는 좁은 길 선택
역시 그 길은 사람들이 찾지 않아
방문하고 오는 1시간 반 내내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함
빌라드 데 도나스는 부인들의 마을이란 뜻으로
산띠아고 기사들이 순례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들 부인들이 지내는 장소였으며
기사들이 사망한 후 그 미망인들이 여생을 보낸 곳
이곳엔 국가지정기념비와
고대 산티아고 기사단의 본거지를 볼 수 있음
그곳에 있는 산 살바도르 성당은 14세기 지어진 건물이지만
그 기원은 10세기에 세워진 수녀원에서 찾을 수 있음
그래서 도나스(성녀)란 명칭이 붙음.
실내에 독특한 벽화와 기사들 석상이 눈길을 끔
10시쯤에 도착했으나 마을엔 정원이 아름다운 현대식 주택 몇 채와
성당 폐허 된 집 몇 채 뿐이지만
구릉에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다움.
성당 문이 잠겨있어 내부를 볼 수없는 아쉬움을 안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나타난 2마리 개
(엔젤보다 작고 애완견 비슷)가 달려들며 짖어댐.
무시하고 가도 계속 쫓아오며 짖어대자
뒤에서 세뇨르~ 세뇨르~ 하면서 외치는 소리
돌아보자 나에게 오라는 손짓.
다가가자 키를 보여주며 따라오라는 시늉과 함께
뭐라 하는데 관리인이라 하는 듯
감사하다 말하고 성당 내부 구경.
한쪽 발을 저는 70대 노인인데
스페인말로 이것 저것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오 예! 만 반복.
세요(스탬프)받고 약간 기부한 후 사진 몇 장 찍음
촬영금지 표시 있었지만
플레쉬 사용 안하면 괜찮다며 허락.
정말 보기 드문 내부를 봄
오늘의 천사도 개 2마리.
평소 개 사랑하는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는 걸까
100미터쯤 떨어진 성당까지 한발을 절며 안내하고,
설명하고, 내가 다 볼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문 잠그고 가시는 할아버지께 몇 번이고 감사를 전하자
부엔 까미노로 회답하시는 관리인
오늘 비록 4.4킬로 더 걸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좁은 길을 택한 것이
결국 나에게 이롭다는 사실 재확인한 날
오늘 맥주 맛은 더욱 시원하고 맛있음
오늘미사는 내일 묵을 곳에 성당이 없는 것 같아
특전미사로 생각 헌금을 많이 함
가타 반주로 스페인풍의 경쾌한 성가 특이하고 좋았음.
미사 끝나고 저녁겸 맥주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