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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분 / 1971년 8월 카린티안 섬머 뮤직 페스티벌>
=== 프로그램 ===
Mozart
Piano Sonata No.8 in a minor, K.310
6 Variations on "salve tu, Domine", K.398
Fantasia in d minor, K.397
Beethoven
Piano Sonata No.21 in C major, op.53 "Waldstein"
Piano Sonata No.28 in A major, op.101
Schumann
Nachtstuck in F major, op.23 no.4
Mendelssohn
"Spinning Song", op.67 no.4
=== 참고자료 === <2011년 6월 10일 네이버캐스트 / 박제성 글>
에밀 길렐스
에밀 길렐스가 오데사에서 태어난 1916년 10월 19일은
피아노 역사에 있어서 문화적 용광로와 같은 날이었다
에밀 길렐스가 오데사에서 태어난 1916년 10월 19일은 피아노 역사에 있어서 문화적 용광로와 같은 날이었다. 당시 이 도시에서 체코 음악가들은 오랜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데, 이 가운데 70여개가 넘는 광범위한 유대교 모임이 예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길렐스의 가족 또한 이 모임의 일원이었다. 다섯 살 때 길렐스는 처음으로 이모 손에 이끌려 야코프 트카흐(Yakov Tkach)라는 선생으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여섯 살 때 그랜드 피아노를 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레슨을 받으며 베르티니와 헤르츠의 연습곡을 연습했다. 이렇듯 그는 전적으로 독일식 훈련을 받았지만 감성의 기저에는 프랑스 음악에 대한 이해가 짙게 깔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스승인 트카흐는 프랑스 피아니스트인 라울 푸뇨(Raoul Pugno)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빌로잉(Alexander Villoing)을 사사한 정통 프랑스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다. 스승의 후원 하에 길렐스는 13세에 데뷔 무대를 가지며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와 슈만의 [로망스], 세 개의 스카를라티 소나타, 멘델스존의 [B단조 스케르초], 쇼팽과 리스트의 연습곡 등을 연주했다.
고전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로서의 양면성
1930년 오데사 콘서바토리에 입학한 길렐스는 베르타 라인발트(Berta Rdingbald) 문하로 들어가며 한층 넓은 레퍼토리를 익힐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려니와 음악적 깊이와 실내악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 그리하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촉망받는 그의 여동생인 예리사베타와 함께 집에서 실내악을 자주 연주하며 길렐스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실내악이라는 소중한 장르에 대한 식견을 넓혀나갔다. 한편 1935년 오데사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그는 모스코바 콘서바토리로 옮겨 전설적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를 사사하게 된다. 네이가우스는 쇼팽의 제자인 칼 미쿨리(Carl Mikuli)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알렉산더 미차일로프스키(Aleksander Michałowski)의 제자로서, 길렐스는 쇼팽의 폴란드적인 심장과 시인으로서의 영혼을 전수받았다.
1937년 네이가우스의 클래스에서 졸업을 한 길렐스는, 이듬 해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국제 경연대회에서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사무엘 파인베르크, 에밀 폰 자우어, 이그나츠 프리드만, 발터 기제킹, 로베르 카자드쥐 등의 기라성 같은 심사위원들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당당히 1등상을 거머쥐었다. 당시 모우라 림파니가 2등상,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는 7등을 했다. 1939년 미국 데뷔 무대를 가지면서 국제적으로 도약을 할 발판을 마련했던 그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냉전의 시작으로 인해 그 기회를 조금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전쟁시 그는 동료 피아니스트인 야코프 자크(Yakov Zak)와 듀오 리사이틀을 가진 한편, 1944년에는 프로코피에프의 [8번 소나타]를, 45년에는 바인베르크의 [피아노 5중주]를 초연하기도 했다. 1948년부터 그는 서유럽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고, 1949년부터는 여동생 예리사베타와 결혼을 한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오니드 코간과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피아노 트리오를 결성하여 많은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소비에트 시절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더불어 최고의 소비에트 음악가였던 그는, 1985년 10월 14일 모스크바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질 때까지, 서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정력적인 연주 여행을 가지며 러시아 피아니즘의 살아있는 전설로 찬사를 받았다.
길렐스는 기본적으로 낭만주의 피아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레퍼토리에는 최근 연주자들이 기피하곤 하는 하이폰이 드리워진 작곡가들(원곡자-편곡자)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진지한’ 고전주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그의 음악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경건해지고 심오해졌을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그 안에 숨어 있는 따뜻한 유머를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음악의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강철 같은 타건과 경탄할 만한 힘, 남다른 지구력과 구조에 대한 엄격함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클라이맥스까지 다다르기 위해 점점 고조되는 엄청난 다이내믹 레인지를 구현하기 위해, 그는 솜털 같은 피아니시모로부터 천둥과 같은 포르티시모를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예각적인 스타카토와 장대한 옥타브로부터 영롱한 칸타빌레와 건반이 사라진 듯한 환상적인 레가토를 만들어냈다. 그가 항상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던 음향은 바로 1930년대에 연주회에서 들었던 발터 기제킹의 ‘페달 없는 레가토’로서, 길렐스는 자신 또한 이러한 효과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길렐스는 에트빈 피셔의 색채의 팔레트를 동경했고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그 신비로운 해석을 존경했다고 한다. 물론 길렐스의 연주는 이들의 연주 전통과는 많이 달랐는데, 그의 연주의 기저에는 음악에 대한 진지함과 러시아적인 음향에 대한 강인한 믿음이 깔려 있었다. 1955년 철의 장막을 뚫고 그가 서방 세계에 모습을 내보였을 당시, 러시아 피아니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기자들을 향해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어볼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외쳤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와 에밀 길렐스, 이 두 명은 당시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러시아 피아노 전통과 모더니즘을 잇는 가교로서, 장대한 스케일을 토대로 한 현대적 의미의 러시아 피아니즘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될 수 있는 토대를 완성한 장본인이자 존경과 우정을 공유했던 동료이기도 했다.
강철의 피아니스트
리히테르가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1번]과 [2번]을 연주하면 길렐스는 [3번]을 연주했고, 리히테르가 생상스의 [4번]을 연주하면 길렐스는 [2번]을, 리히테르가 프로코피에프의 [5번]을 연주하면 길렐스는 [3번]을 연주하는 식으로, 서로의 레퍼토리를 존중하며 존경을 표시했다. 한 번은 친구가 리히테르에게 왜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을 녹음하지 않느냐 물었더니, “길렐스가 이미 녹음을 했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물론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이나 슈만의 [유모레스크], 베토벤의 다른 많은 부제 달린 소나타들과 같은 많은 레퍼토리는 서로 거리낌 없이 연주하기도 했다. 다만 자신이 생각했을 때 상대가 최고 수준이라고 판단한 영역만큼은 침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이 두 연주자는 고전주의적 피아니즘을 현대적으로 수용한 새로운 시대의 러시아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쌍두마차였던 것이다.
교육보다는 독주자로서, 그리고 실내악 연주자로서 헌신하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화해를 꿈꾸었던 그는, 아직 할 일을 많이 남겨놓은 채 1985년 10월 14일 69세 생일을 앞두고 모스코바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위대한 해석가이자 탁월한 비르투오소요, 전형적인 러시아 피아니스트이자 바로크로부터 독일, 프랑스 음악과 현대음악에 이르는 방대한 레파토리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강철의 피아니스트로서, 그는 비교적 적지 않은 양의 녹음을 남길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음악 유산
구 소련의 국영 레코드 회사인 멜로디야에서의 녹음도 제법 그 양이 되는 편으로서 Brilliant Classics를 통해 10장짜리 박스물이 발매가 되어 있다. 그리고 Doremi 레이블과 BBC Legend 를 통해 그의 뛰어난 라이브 음원들이 속속 발매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메이저 음반사에서의 녹음들이야말로 길렐스의 진가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미국 데뷔 초기 RCA에서의 녹음들은 훌륭한 음질과 치열한 러시아적인 에너지로 인해 지금까지도 명반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그의 중심적인 디스코그래피를 보유하고 있는 DG에서 남긴 그리그의 [서정 소곡집]과 오이겐 요훔과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 2번], 칼 뵘의 지휘로 자신의 딸과 함께 녹음한 모차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또한 시대를 뛰어넘은 명반으로 존경을 받고 있으며, 아마데우스 4중주단과의 슈베르트와 브람스 실내악 작품집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강철과 같은 타건 때문에 연주회에서 자주 피아노현을 끊었다고 하는 길렐스에게 있어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그의 피아니즘을 상징하는 이모티콘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프리츠 라이너와의 50년대 스테레오 녹음(RCA)과 1970년 로린 마젤과의 녹음(EMI), 그의 마지막 차이콥스키 협주곡 레코딩으로서 1979년 주빈 메타와의 뉴욕 라이브(SONY)가 가장 눈에 띈다. 세 녹음 모두 길렐스의 불을 뿜는 듯한 맹렬함이 인상적이지만, 시기별로 해석에 있어서의 차이를 보이며 독립적인 개성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1972년부터 85년까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와 변주곡](DG)을 레코딩한 업적이야말로 후대인들에게는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소나타 다섯 곡을 미처 녹음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 까닭에 전집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그 남성적인 광휘와 영화로운 피아니즘의 세계는 항상 숭배의 대상이 되곤 한다. 무엇보다도 카오스의 상태에 던져진 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적인 음표들에 대한 기투(企投/Entwurf)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32번 소나타]를 녹음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깝지만, 저 가공할 만한 [29번 ‘함머클라비어’]를 통해 그는 삶을 뛰어넘는 베토벤의 초월 의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안위할 수 있을 것이다.
‘미스터 베토벤’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로 베토벤이라는 작곡가를 극복해야 할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온 길렐스. 무쇠와도 같은 터치와 알루미늄과 같은 색채, 바벨탑 같은 구조, 논리적이지만 자연스러운 전개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베토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계의 많은 애호가들의 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울려퍼지고 있다. 한편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은 비교적 많은 스튜디오 및 라이브 음원들이 음반으로 발매되었는데, 이 가운데 조지 셀과의 고전적 형식미가 돋보이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EMI)과 비르투오시티가 작열하는 50년대 모노럴 전집(Testament)이 추천할 만하다.
약력
첫댓글 1971년, 그러니까 45년전 영상 기록임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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