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산(李壽山)은 수안군(遂安郡) 사람이다. 충혜왕(忠惠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제수되었고 추성익대좌명공신(推誠翊戴佐命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춘성군(春城君)에 책봉되었다.
공민왕 원년(1352)에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려고 하면서 이수산을 꺼려하여 그 당여(黨與)를 보내어 해치고자 하였는데, 이수산이 몸을 숨겨 죽음을 면하였다. 그 후에 〈이수산은〉 채하중(蔡河中)과 함께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제수되었으며 곧이어 찬성사(贊成事)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정동행성낭중(征東行省郎中)이 되었다. 이때 여러 기씨(奇氏)들이 패망하자 〈이수산이〉 그 당여(黨與)라고 하여 외방(外方)에 유배되었으나 〈왕의〉 부름을 받아 수춘군(壽春君)에 책봉되었으며,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나아가 여진(女眞)의 강역을 정하였다. 다시 삼사우사(三司右使)·판삼사사(判三司事)에 뽑혔으며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推忠保節翊戴佐理功臣)의 칭호가 더해졌다.
몽골의 악공 양재(梁濟)가 그 무리들을 이끌고 도당(都堂)에 와서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이수산이 말하기를, “음악이 있으면 노래가 빠질 수 없다.”하고는 이내 중국 여자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여러 재상들과 매우 즐겁게 놀았다. 판사(判事) 허전(許佺)이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황상(黃裳)이 사랑하는 첩을 함부로 유혹하고 행동하는 바가 매우 어지러웠다. 이수산이 여러 재상들과 전정(殿庭)에 모여 상황을 말하면서 함께 크게 웃으니 소리가 왕에게까지 들렸다. 왕이 듣고서 말하기를, “이삼사(李三司)가 늙었구나. 여색을 평론하고 있으니 이제 쉬어도 되겠구나.”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경천흥(慶千興)이 덕흥군(德興君)의 군사를 물리치고 개선하여 돌아오자 재추가 술상을 차리고 위로하였다. 이수산이 술이 취하자 스스로 단판(檀板)을 내리치고 판으로 여러 재상을 치며 희롱하다가 우시중(右侍中) 유탁(柳濯)을 치니 유탁이 정색을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경솔하며 예의가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신돈(辛旽)이 〈그를〉 참소하여 파직되었다가 얼마 후에 복직되었다.
〈명(明)〉 조정의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이 문묘를 참배하자 여러 유생들이 모두 읍(揖)하였는데 임밀은 답례를 하였으나 채빈은 답례하지 않고 다시 읍하기를 기다렸다. 여러 유생들이 모두 학사로 들어가 버리자 채빈이 노하였는데 이수산이 곧이어 속여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존장(尊長)에 대한 예(禮)에서 감히 일시에 함께 읍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채빈이 기뻐하였다. 이수산은 몰래 사람을 시켜 여러 유생들에게 다시 읍할 것을 재촉하였다.
왕이 시해되자 태후와 경복흥이 종친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이인임(李仁任)은 우왕을 세우고자 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여 〈의논이〉 지체되었다. 도당(都堂)에서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감히 말을 하지 못하자 이수산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마땅히 종실을 〈왕위에〉 앉혀야만 한다.”고 하였으나 이인임이 마침내 우왕을 옹립하고 말았다. 우왕 2년(1376)에 〈이수산이〉 죽으니 시호는 공량(恭良)이었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좌상시(左常侍) 윤소종(尹紹宗) 등이 상소를 올리며 말하기를,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는 것은 요임금과 순임금이 지극하게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현릉(玄陵)이 후사 없이 붕어(崩御)하시고 이인임이 우왕을 세우고자 할 때, 대신들이 감히 다른 논의를 할 수 없었는데, 고(故) 판삼사사(判三司使) 이수산은 홀로 종실을 세울 것을 청하였습니다. 몸은 비록 이미 죽었으나 충의는 사람을 감동시키니 청컨대 〈그에게〉 포상과 시호를 더하고 그 묘소에 제사를 지낼 것이며, 후손을 녹용(錄用)하여 충혼을 위로하소서.”라고 하니 따랐다. 아들은 이념(李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