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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죽음에 대한 사유
-先秦 儒․道․墨을 중심으로
박 문 현: 동의대학교 인문대학 인문학부 철학 전공 교수
1. 머리말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문제는 인류의 인문학적 사고가 체계화되기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탐색되어왔었는데 그 주류는 역시 철학자나 종교가들이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연구실이나 신성한 종교의 전당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가장 귀한 존재니 하고 우쭐대기도 하지만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과학과 철학의 역사는 세계의 어떤 사물도 생성, 발전, 소멸의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객관규율임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순수객관적인 입장에서 생사 문제를 본다면 문제는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러나 인간은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능동적인 사유를 하게 된다. 비록 이성적으로는 사망의 불가지성을 받아들이지만 감정적으로는 죽음의 두려움을 배제하기가 곤란하다. 이러한 죽음의 문제는 삶 속에서 삶의 한 부분으로 늘 자리 잡고 있기에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현실의 인간은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명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정신적인 생활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삶과 죽음의 의의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죽음에 관한 고대 중국인의 인식을 고찰하고자 선진시대의 유가와 도가와 묵가의 생사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여러 학파가 난립했으나 유가, 도가, 묵가 이 세 학파가 가장 영향력을 발휘했던 학파로 볼 수 있다. 묵가를 3대 학파로 꼽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韓非子가 묵가를 유가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학파라고 말한 것이나 맹자가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묵가를 거론한 것을 봐도 묵가의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중국 고대의 사상계를 지배했던 이 세 학파의 사상은 이후 중국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중국 사상의 근간이 되어 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특히 이들의 생사관은 각각 독창적인 면이 있어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을 비교해 보면 오늘의 우리의 생사관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죽음에 관한 문제는 삶의 문제와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기에 생사관을 통해 죽음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2. 도덕주의적 생사관
가. 孔子
공자는 흘러가는 내 위에 서서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탄식하여 “가는 것이 이와 같아서 낮과 밤을 쉬지 않는구나.”라고 했다. 공자는 물이 쉼 없이 흘러가듯 세월이 흘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생각한 듯 하다. 이러한 정감은 다음에서도 볼 수 있다. 즉 哀公이 제자 중에서 누가 배움을 좋아했는냐는 질문을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안회라는 자가 있어서 배움을 좋아하며 노한 것을 옮기지 아니하며, 허물을 두 번하지 아니하더니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서 죽은지라 이제는 없으니 배움을 좋아하는 자 듣지 못하였습니다.”고 말했다. 공자는 분명히 ‘短命’을 ‘不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공자는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제자인 季路가 죽음에 대해 물으니 “삶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말했다. 공자는 삶과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것은 일종의 자연의 규율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천체의 운행과 사계절의 교체, 만물의 생장 등의 현상을 볼 때 그 안에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객관적인 규율이 있다고 본다. 공자는 이 규율을 天命 혹은 命이라고 한다. 天命의 범위는 넓어 세상의 일체 사물을 포함하는 의미이고 命의 의미는 비교적 좁아 인간의 수명을 말한다. 공자는 이 두 개념을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 의미는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
공자의 제자인 伯牛가 병에 걸려 있을 때 공자는 백우의 손을 잡고 “소생할 가망이 없으니 命인가?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라고 안타까워 했다. 여기서의 命은 天의 의지가 아니고 일종의 필연성이다.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命이기에 공자는 언급하기를 꺼려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에 때로는 죽음을 경시하기까지 했다. 정치를 함에 있어 경제와 국방과 신뢰가 중요한 세 가지이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지켜야 한다면 무엇인가의 자공의 질문에 공자는 서슴없이 신뢰라고 말한다.
즉 “먹는 것을 버릴 것이니 예로부터 다 죽음이 있지만 백성에게 신뢰를 못받으면 나라를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생명보다 도덕이 더 중요함을 나타낸 것이다. 또 공자는 “제나라의 景公이 말 4천 필이 있었으나 죽는 날에 백성이 덕을 일컬음이 없었고,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 아래에서 배를 주려 죽었으나 백성이 이제까지 일컫는다.”고 말함으로써 올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보다 의롭게 죽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공자는 심지어 “아침에 道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까지 말하는 것이다. 주자는 이에 대해 “道라는 것은 사물의 당연한 이치이다. 진실로 얻어들으면, 곧 삶이 순하고 죽는 것이 편안하여 다시 여한이 없다.”고 주석을 달아 道가 생명보다 더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이 뒤에 발전하여 “殺身成仁, 捨身取義”로 나타나 仁과 義를 위하여는 생명을 희생할 수 있다는 유가의 사생관이 체계화되었다.
“공자는 괴이한 것이나 폭력, 난동, 귀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말처럼 공자의 사상에는 신비적 혹은 미신적 요소가 거의 없다. 공자의 전기나 언행을 담은 다른 자료들 중에는 신비적인 기록을 한 것들이 더러 눈에 띄지만, 그것들은 대개 후세 사람들이 덧붙인 말로 보인다. ≪논어≫에는 그러한 것이 없다.
공자의 발언은 모두 지극히 합리적이다. 한 문인이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는 “자신은 아직 사람도 만족스레 섬기지 못하므로 귀신 따위를 섬길 수 없다.”고 대답하고, 또 知에 대해 묻자 “사람이 지켜나갈 도의에 힘쓰고 귀신을 멀리하는 것이 知者의 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子貢이 공자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존재합니까?”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있다고 말하려니 孝子ㆍ孝孫이 부모 살아 계실 때 효도하지 않을까 두렵고,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없다고 말하려니 불효자가 장례와 제사를 지내지 않을까 두렵다. 네가 진정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네가 죽은 후 스스로 알게 되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이와 같이 공자는 죽음이나 귀신 등의 불가지하고 불가사의한 사항들에는 관심이 없거나 혹은 그것들을 무익한 일로 생각하여 다루지 않고 오직 인간 자신의 문제, 사람의 힘이 미치는 범위내의 일들에만 주의를 기울인 듯하다. 이와 같이 공자는 “사후에 영혼이 존재하는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정도 하지 않고 긍정도 하지 않았으나 제사의 문제를 보면 그가 귀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 즉 “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는 조상이 계신 듯이 하고, 신을 받들 때는 그 신이 계신 듯이 해야 한다.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드리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에서 공자가 ‘있는 것과 같이(如在)’한다는 말은 귀신은 없지만 있는 것과 같이 해 모셔야 한다는 뜻이다. 공자를 비롯한 儒者들이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것은 ≪墨子≫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묵자는 유가가 세상을 더욱 망쳐 놓은 대표적인 네 가지(四政)를 들면서 그 첫째로 유가는 天과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가가 귀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마치 신랑 신부가 없이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같은 우스꽝스런 일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묵자가 당시의 유자들의 귀신관을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해도 뚜렷한 반격이 없는 것을 보면 묵자의 지적이 옳은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공자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았는데 왜 제사를 중시했을까? 그것은 일종의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즉,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귀신 자체를 위한 종교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례를 통해서 현세의 인간들로 하여금 도덕성을 확립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귀신을 제사지냄으로써 孝를 마음 속에 심어 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귀신을 공경하되 그것을 멀리하면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그는 인륜 도덕을 확립하기 위하여 세속적인 귀신의 뜻을 수단적으로 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맹자
맹자는 공자의 ‘死生有命’의 관념을 발전시켜 죽음을 ‘正命’과 ‘非正命’의 둘로 나눈다. 그는 말하기를 “인생의 길흉화복은 천명이 아닌 것이 없다. 마땅히 받아야 하는 정명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그러므로 정명을 깨달은 자는 위험한 담 아래 서지 않는다. 자신의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죽으면 바로 정명이고, 질곡 속에서 죽으면 정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맹자가 보기에 命이 아닌 것이 없다. 어떤 것은 正命이고 어떤 것은 非正命일 뿐이다. 仁義의 도를 실행하려 노력하다 壽를 다하고 죽으면 正命을 순조롭게 받은 것이요, 담장에 깔리거나 범죄를 저질러 죽게 되면 非正命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禍나 福은 결국 스스로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시경≫에 ‘언제나 하늘의 뜻에 맞고자 했으므로 자연히 복을 얻었노라’하고 또 ≪서경≫ 태갑편에 ‘자연적인 재화는 인간이 애를 쓰면 어느 정도는 피할 수가 있으나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고 했다. 맹자가 볼 때 물론 죽음에는 正命이 아니면 非正命으로 죽게 되는데 양자의 죽는 방법은 비록 각각 다르지만 그것에는 모두 그 필연성이 있다. 非命으로 죽는 것은 행동을 함부로 하여서 그런 죽음을 자초했기에 그 중에 필연성이 있으며 壽를 다하고 죽는 것은 생명 발전의 자연규율로서 이것 역시 일종의 불가항력의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맹자의 생각은 인간의 生死와 자연계의 사물은 다 같이 그것의 규율이 있고 이것은 불가항력이라는 것이다.
맹자는 도덕 실천 중심의 생사관을 강조한다. 그는 말하기를 “생명도 내가 아끼는 것이고 정의도 내가 아끼는 것이다. 그러나 둘을 다 함께 얻을 수 없고 어느 하나만을 취해야 한다면 생명을 버리고 정의를 취하겠다. 생명은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보다 더욱 귀한 것은 정의이기에 구차하게 생명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 한편 죽음은 내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욱 싫어하는 것, 즉 불의가 있기 때문에 비록 정의를 지키는 까닭으로 해서 환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굳이 피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원하는 바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면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방법을 왜 강구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에게 죽음보다 더한 환난이 없다면 환난을 피하기 위한 방법을 왜 강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고 저렇게 한다면 환난을 피할 수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을 때가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생명보다 더 아낄 가치가 있는 것을 아끼고 죽음보다 더 싫어해야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현자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현자는 다만 그 마음을 잃지 않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맹자는 생명과 정의는 모두가 소중하지만 둘 다를 가질 수 없을 때는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이상임을 말하고 있다. ‘捨生取義’는 자신의 도리를 다한 뒤에 죽는 것이며 이것은 곧 正命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맹자는 또 말하기를 “한 도시락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을 얻으면 살고 못 얻으면 죽는 경우에도 ‘옛다’하고 큰 소리를 지르고 던져주면 길 가던 사람도 받아먹지 않을 것이고 더욱이 발로 걷어차서 준다면 거지라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고 한다. 여기서 맹자는 한 그릇의 밥이나 국이 없으면 죽을지라도 모욕적으로 내주는 것은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곧 인간은 자기의 조그마한 이익이나 심지어 자기의 생명이 걸린 경우에라도 자기의 원칙과 인간의 존엄성을 버릴 수는 없다는 걸 말하고 있다. 맹자의 이러한 ‘捨生取義’의 헌신적 정신은 중국 역사상 무수히 많은 志士와 仁人들에게 정의를 위하여 일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맹자는 仁의 실천을 부모를 섬기는 것으로부터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돌아가신 부모를 禮로써 장례지낼 것을 말한다.
맹자를 존중하는 滕의 文公이 親喪을 당하자 맹자에게 장례에 대해 물었다. 맹자는 曾子의 말을 인용하여 “부모가 생존해 있을 때도 禮를 갖추어 섬기고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갖추어 장사를 치르며 또한 예를 갖추어 제사를 올려야 비로소 효도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맹자도 공자처럼 죽음의 세계를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제사를 인간의 도리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내관의 두께를 7寸으로 하고 외곽을 그에 맞게 한 것은 외관상으로 좋게 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고 부모를 장사지내는 자식된 자의 마음이 그 정도의 관재를 써야 흡족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맹자가 장사를 후하게 지내고 제사를 정성 들여 모시는 것은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서라기 보다 자신의 부모에 대한 감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맹자도 귀신을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귀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지 않다.
3. 자연주의적 생사관
가. 노자
노자가 볼 때 천하의 만물이 그 생명의 기운이 아무리 왕성하다 하더라도 최후에는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천지의 자연현상으로 인간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노자의 생사관은 운명론이 아니라 자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공자나 맹자와도 다르며 같은 도가인 장자와도 다르다. 노자는 만물이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것을 자식이 그를 낳아준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것에 비유하고 그것을 大道라고 말한다. 인간은 天地를 본받아야 하고 또 天地는 道를 본받으며 道는 곧 자연이기에 자연이 일체 만물의 최고 원칙이다. 노자에 의하면 道는 만물이 돌아가는 종점인 동시에 만물이 시작되는 起點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生과 死의 현상은 ‘道法自然’과 ‘萬物自化’의 원리에 따라 일어나는 자연변화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 자연의 규율을 인식하고 이에 따라 산다면 인간의 생명도 자연처럼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노자는 인간의 生과 死의 문제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죽고 살고 하는 것은 道가 나갔다가 들어오는 현상이다. 無에서 有로 나아가면 바로 生이요, 有에서 無로 들어오면 바로 死이다. 사는 무리들도 열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이 있고, 죽는 무리들도 열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이 있다.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어 스스로 死地로 가는 것도 열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이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산다는 것을 너무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대개 이런 말을 한다.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육지에 가도 사나운 외뿔소와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싸움터에 나아가도 병장기의 해를 받지 않는다. 외뿔소도 그 사람을 뿔로 받는 일이 없고, 호랑이도 그 사람을 발톱으로 할퀴는 일이 없고, 군대에 들어가도 그 사람을 칼날로 해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 生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을래야 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道를 하나의 생명이라고 하면 생명이 현상계로 나오면 바로 生이요, 본체계로 들어가면 바로 死이다. 그러므로 사는 것도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요 죽는 것도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비유하면 새가 알을 낳는 것도 생명을 지속하기 위함이요, 알을 까서 새가 되는 것도 생명을 지속하기 위함이다. 알만 보면 새가 생긴 뒤에 알은 껍질만 남겨 놓고 없어지는 것 같지만 알의 생명은 새에게로 옮아가는 것이다. 또 알을 낳고 죽은 새는 아주 죽는 것 같지만 새의 생명은 알에게로 옮아가는 것이다. 이리하여 생명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의 현상이다. 생과 사를 초월하여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사는 것이 곧 죽은 것이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산다는 것에 너무 애착을 가지고 죽는다는 것을 너무 기피한다. 노자는 天地가 오래가는 것은 스스로 오래 살겠다고 몸부림치지 않기 때문이며 聖人은 그 몸을 생각하지 않기에 ‘身先’하고 ‘身存’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모두 자연의 道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長生하고 不死하기 위하여 ‘益生’의 행위를 하는 것은 자연의 규율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좋지 못하고 이것은 道가 아니기에 오히려 빨리 죽는다는 것이다. 도는 죽음을 자연히 받아들이는 자를 오래 살게 한다. 이런 섭생을 잘하는 사람들은 호랑이나 외뿔소가 해치지 않고 군대에 가도 무기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노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상징적 비유일 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노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生과 死를 바로 인식하고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정신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道의 입장에서 生과 死를 바라보면 죽음도 무섭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자연론자인 동시에 상대론자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불행은 행복의 원인이 되고 행복은 불행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누가 그 궁극에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는 줄을 알겠느냐?”라고 하면서 “좋은 것은 다시 나쁜 것으로 되고 善은 다시 惡으로 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한 쪽에 집착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대상을 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사의 문제도 福과 禍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상호 의존적이다. 생명의 매 단계 중에 죽음의 요소가 숨어 있고 죽음의 길에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죽음을 두려워하면 죽음을 맞게 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오히려 살게 된다는 것이다.
또 노자는 말하기를 “백성이 죽기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위에 있는 위정자가 자기만이 잘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만 살기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은 生을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고 한다. 여기서는 통치자들이 백성들의 가혹한 세금으로 사치를 일삼음으로써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은 죽는 것만 못하니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과 사를 중시하는 것이 인간의 常情이지만 폭군이 정치를 하거나 크게 흉년이 들면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으로서는 生死를 초월해야겠지만 통치자도 백성들의 생사를 중시할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나. 장자
그러면 장자는 生과 死를 어떻게 생각할까? 노자의 사상을 이어 받아 응용하고 있는 장자는 독특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우선 그가 말하는 꿈과 현실에 대한 유명한 우화인 ‘나비의 꿈’을 보자.
언젠가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일까.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物化라고 한다.
이와 같이 物이 변화한다면 무엇이 본질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죽음과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사후의 세계는 과연 공포의 세계일까?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기뻐한다는 것이 미혹이 아닌지를 내 어찌 알겠소.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떠난 채 돌아갈 길을 잃은 자가 아닌지를 내 어찌 알겠소. 여희는 艾라는 곳의 국경 지키는 사람의 딸인데 晋나라가 처음 그 여희를 가졌을 때는 너무 슬프게 울어서 눈물로 옷깃을 적실 정도였으나 왕의 궁전에 이르러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며 소, 돼지고기 등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자 처음 울고불고 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죽은 사람들도 살아 있을 때 삶을 바랐던 것을 지금 후회하지 않는지를 내 어찌 알겠소?” 이것은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인간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자 하는 장자의 꾸며낸 이야기이다. 장자는 ‘至樂’ 篇에서도 이와 같은 얘기를 한다. 그가 어느 날 초나라로 여행을 가다 해골을 발견했다. 장자는 해골을 때리면서 그가 일찍 죽은 것을 측은하게 여기는 말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날 밤 해골의 영혼이 장자의 꿈에 나타나 죽음의 세계는 임금도 신하도 없는 완전한 평등사회이며 더위도 추위도 없는 낙원인데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죽음을 두려워만 한다고 힐책한다. 장자는 다시 뼈와 살과 피부를 되붙여 이승으로 되돌아가게 해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해골에게 묻는다. 그러자 해골을 심히 못마땅해 하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南面하여 천하를 지배하는 제왕의 즐거움을 훨씬 뛰어넘는, 이러한 죽음의 세계의 절대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다시 한 번 인간 세계의 괴로움을 반복하는 일은 절대로 싫습니다.”
장자는 여희와 해골의 영혼의 입을 빌어 죽음이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장자의 실질적 태도는 인간의 죽음을 기쁜 마음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달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죽음과 삶은 운명이며, 밤과 아침이 변함없이 반복되는 것은 天의 도리이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모두 자연의 物情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죽음과 삶, 존재함과 사라짐, 곤궁과 영달, 현명함과 어리석음, 비방과 칭찬,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등은 모두 사물의 변화이자 천명의 운행으로서 밤낮으로 우리 눈앞에서 변화하고 있지만, 어떠한 인간의 지혜로도 그 시작을 엿볼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운명에는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본래 필연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점에서 하이데거는 사람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가 언제 이 세상에 나와 살고 언제 죽음이 닥쳐오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순전히 우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만물은 하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生과 死도 하나이다. 그는 死生는 一体이기에 삶이란 반드시 죽음을 뒤따르게 하는 것이며 죽음은 삶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람이 사는 것은 氣가 모이기 때문이며, 氣가 모이면 삶이 되고 氣가 흩어지면 죽음이 된다.”는 氣化論에서 나온 것이다. 氣化 인생론의 대전제는 “천하는 하나의 氣로 통한다.”는 것이다.
삶에 집착하는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탄생은 신기한 것이고 죽으면 썩으니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신기한 것과 썩는다는 것은 상대적이고 生과 死가 氣의 흐름 중의 한 사건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죽음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된다. 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 변화무상하고 끊임없이 순환하는 삶과 죽음의 현상을 설명하는 장자의 방식은 중국 특유의 氣化 우주론을 잘 반영하고 있어서 緣起說로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이론을 설명하는 불교의 우주론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장자는 생사 문제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술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친구인 혜시가 조문을 가서 그 광경을 보고는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라고 말하자 장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지 않다. 아내가 방금 세상을 떠났을 때엔 나라고 어찌 슬퍼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태초를 살펴보니 본래 생명이 없었다. 생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형상조차 없었다. 비단 형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기질도 없었다. 황홀한 가운데 뒤섞이어 변화하는 도중, 기질이 생기고 기질이 생긴 다음 형상이 생기고, 형상이 차차 변하여 생명이 있게 되고, 이제 또 차례로 변하여 사망하였다. 이것은 춘하추동 사계와 똑같이 운행하는 일이다. 내 아내는 우주를 거실로 삼아서 평안히 누워서 잠자고 있는데 내가 엉엉 큰 소리를 내어 호곡을 한다면, 내 스스로 운명을 통달하지 못한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에 울음을 그쳤다.
보통은 죽음이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철학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한 개체의 죽음은 모였던 기가 본래대로 흩어진 것일 뿐이기에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로 감정을 순화시킬 수 있다는 장자의 이러한 사고는 ‘以理化情’이라고 표현된다.
장자는 生과 死 모두가 氣의 운행과정이라고 믿기에 그 자신이 세상과 이별하려 할 때 그의 제자들이 厚葬하려 했으나 이를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으로써 속관과 덧관을 삼고, 해와 달로써 한 쌍의 구슬을 삼으며, 별로써 장식의 옥으로 삼고, 만물로써 재물을 삼고 있으니, 나의 장례 도구 중에 무엇이 부족하겠는가?”고 하였다. 이에 제자들이 “독수리떼가 선생님을 쪼아 먹을까 염려하여 그렇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장자는 “땅 위에 두면 독수리떼가 쪼아 먹고 땅 속에 묻으면 개미떼가 뜯어 먹을 것이다. 한 쪽을 빼앗아 다른 쪽에 준다면 공평하지 못한 처사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독수리 떼가 쪼아 먹거나 개미떼가 뜯어먹는 것은 모두 氣化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인간이 죽어서 氣가 흩어져 자연으로 회귀하기 때문에 厚葬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장자는 ‘生死一如’로 생각하여 생사의 대립을 타파함으로써 생사에 대한 정신적 초월을 실현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형태의 生死學은 후일 禪宗이 계승하여 진일보한 발전을 이루게되며 宋眀 신유학자들의 생사 문제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촉발시켜서 왕양명, 왕용계 등의 새로운 형태의 유가적 생사관의 건립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4. 공리주의적 생사관
묵자는 인간의 생사 문제를 중시하여 ≪墨子≫書 중에는 ‘生’字가 80여 차례, ‘死’字가 90여 차례 나온다. 묵자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는데 그는 일생동안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명을 아끼려고 한 적이 없었다. 특히 그의 ‘止楚攻宋’의 일화는 그가 義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희생 정신을 발휘한 좋은 예가 된다. 초나라가 최신 군사 장비를 갖추어 송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묵자는 열흘 날 열흘 밤을 달려가 초나라의 임금과 公輸盤을 설득하고 전쟁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는 초나라 임금에게 말하기를 “公輸子의 뜻은 다만 저를 죽이려는 것이니 저를 죽이면 송나라는 수비할 수가 없게 되어 공격해도 될 거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의 제자 금골희 등 300명이 이미 저의 수비하는 무기를 갖고서 송나라 성위에서 초나라 군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저를 죽인다 해도 그걸 없앨 수는 없습니다.”고 하니 초나라 임금이 송나라를 침략하지 않겠다며 묵자에게 굴복하고 만다. 이렇게 묵자가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의 제자들 역시 묵자의 명령이나 자기들의 신조를 지키기 위하여는 죽음도 불사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淮南子≫에는 “묵자를 위하여 복역하는 사람이 180명이 있었는데, 모두 불에 뛰어 들고 칼날이라도 밟게 할 수 있었고, 죽는다 해도 발길을 돌리지 아니하였는데 교화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고 된 기록이 있는가 하면 ≪呂氏春秋≫에는 묵가 집단의 우두머리인 鉅子가 신의를 지키기 위하여 자결했다해서 그의 제자 183명이 지도자를 따라 죽었다는 예화가 있다. 이것을 보면 묵자는 자기의 신념이나 집단을 위하여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墨子나 그를 따르는 墨者들의 목숨을 건 실천 정신이나 의리를 지키기 위한 집단 자살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것은 유가나 도가와는 다른 생사관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묵가의 독특한 종교적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묵자는 天 혹은 上帝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鬼神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그가 死後의 세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 것은 없으나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죽은 후에 귀신이 되면 인간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상적 성격을 가지고 생전의 속성을 재현한다. 살아 있을 때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은 귀신이 되어 복수를 하기도 한다. 묵자는 유가가 귀신에 대해 애매하게 태도를 취하면서도 제사를 중시하는 것은 손님이 없는데도 크게 연회상을 차리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 그는 “천하가 어지러워진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모든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에 의혹을 품고 귀신이 현명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난폭한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묵자는 나라를 바로잡고 天下의 이익을 많게 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귀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가 창안한 실질논증법인 三表法에 의하여 ‘明鬼’하려 노력한다. 먼저 ‘옛 聖王의 역사적 사실에 근본한다’는 제1표에 따라 논증한다. 옛 三代의 聖王들의 행위가 모범적이었음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그들은 귀신을 믿고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중시했다.
예를 들면 성왕들이 공신에게 상을 줄 때는 반드시 祖廟에서 주고, 죄인을 처형할 때는 반드시 社에서 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상을 주는 게 공평하고 옥사를 다스리는 일이 합당하다는 것을 귀신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은 ‘백성들의 耳目을 통하여 실제로 관찰한다’는 제2표에 따라서 증명한다. 옛부터 지금까지 귀신을 본 예는 대단히 많은데 묵자는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고 중국의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는 다섯 개의 고사를 들어 귀신의 實有를 증명한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周의 宣王은 그 신하인 杜伯을 죽였는데 無辜하였다. 杜伯은 죽으면서 “우리 임금이 나를 죽이시지만 나는 억울하다. 만약 죽은 자에게 아무 의식도 없다면 할 수 없지만 죽어서도 의식이 있을 때에는 3년이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우리 임금에게 보복하겠다”고 했다. 3년 후, 宣王은 제후들을 모이게 하여 圃田에서 사냥을 했는데, 마차가 수백 대에 병사 몇 천명이 참가하고 사람들이 들에 가득찼다. 그런데 正午가 되자 杜伯이 白馬를 끄는 흰 수레를 타고 붉은 의관을 하고 나타나 붉은 활에 붉은 화살을 메겨 도망치는 宣王을 뒤쫓아 마차 안에 있는 王을 쏘았다. 화살은 가슴에 맞아 脊骨을 부러뜨리고 王은 마차 안에 쓰러져 활전대에 엎드린 채 죽고 말았다.
이때 周의 국민으로 왕을 따라갔던 사람이면 보지 않은 자가 없었고 먼데 있던 사람도 듣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이 사실은 周의 ≪春秋≫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들어 임금은 그 신하를 가르치고, 아비된 사람은 그 자식을 경계하여 “삼가고 삼갈지어다. 무릇 죄 없는 자를 죽이면 불상사를 만나나니 鬼神의 誅罰은 이같이 빠르니라”하였다. 이 ≪春秋≫의 내용을 가지고 생각컨대 鬼神의 存在함을 어떻게 의심하겠는가?
제3표는 ‘국가나 백성의 이익에 맞는가를 본다’는 것이다. 묵자는 功利主義者로서 모든 것에 대해 국가와 백성의 이익을 전제로 한다. 귀신이 존재한다면 국가와 백성에 이익이 됨을 이렇게 말한다. 즉,
지금 만약 온 天下의 사람들로 하여금 鬼神이 현명한 사람에게는 賞을 주고 포악한 자에게는 罰을 주고 있음을 믿도록 한다면 天下가 어찌 어지러워지겠는가? 지금 귀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鬼神이란 본시 存在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온 天下에 가르쳐 天下의 사람들에게 의혹을 품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天下의 민중들로 하여금 모두가 鬼神이 있고 없는 분별에 대하여 의혹을 지니게 만들어 天下는 어지러워지고만 것이다. 그러므로 묵자는 또 말하였다. “지금 天下의 임금과 대신과 선비와 군사들이 진실로 天下의 해를 제거해 버리려고 한다면 鬼神이 있고 없는 分別에 대해 잘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묵자는 三表法을 통해 귀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사람들이 모두 귀신의 존재를 믿고 귀신이 賞善罰暴함을 믿음으로써 모두가 善行을 하고 惡行을 하지 않아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고 했다. 묵자가 증명의 예로 든 사실들은 전설이나 기록물로 된 타인의 경험들이라 신빙성이 극히 박약하다. 그러나 이것을 지식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귀신의 지위는 天의 아래이지만 인간보다 위로서 天과 인간의 가운데에서 인간을 지배하고 주재한다. 묵자는 “귀신의 눈은 하도 밝아 깊은 못이나 숲속 또는 계곡 등 아무도 보지 않는 그윽한 곳에 있다 하더라도 속일 수가 없으니, 귀신은 어디서든지 사람의 하는 짓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으며 “귀신이 聖人보다 지혜로운 것은 마치 총명한 눈과 귀를 가진 사람에 귀머거리 장님과 같아 비교가 안 된다.”고도 했다. 귀신의 明智는 인간 세상의 聖人을 능가하는 것이다. 또한 귀신이 내리는 상벌은 公正 嚴明하여 아무리 커도 벌주지 않음이 없고 아무리 작아도 상주지 않음이 없다.
귀신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것이 훤히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으므로 인간은 마땅히 귀신을 섬겨야 한다. 그러므로 묵자는 “청결히 술과 단술과 젯밥을 마련해 가지고 天과 귀신에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제사의 의의를 돌아가신 조상인 귀신이 술과 단술과 젯밥을 흠향하게 되므로 귀신을 위해 이로운 것이요, 친척 친지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공동체의 친목을 도모할 수 있으니 또한 실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묵자는 의식주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쓰는 물건을 절약할 것을 중국의 어느 사상가보다 강조한 사람이다. 먹는 것은 배고픔을 면할 정도이면 족하지 그 이상은 사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단순히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친목을 위하여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묵자는 귀신의 존재를 확신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제사를 통해 귀신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묵자의 사망관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다른 하나는 節葬論이다. 이것은 공자를 비롯한 유가의 ‘厚葬久喪’ 제도에 대한 반대와 비판이다. ≪회남자≫에서 “후장구상으로 죽음의 세계로 보낸다는 것은 공자의 말인데 이것을 묵자는 비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가는 천자가 죽었을 때 10중의 棺槨을 하고 제후는 5중, 대부는 3중, 士는 2중으로 厚葬하며 부모가 죽으면 반드시 3년상을, 백숙부와 형제는 1년, 族人인 경우 5월 내지 3월의 각각 다른 葬喪의 규정이 있었다. 묵자는 분별을 없애고 귀천을 가리지 않는 일률적인 규정으로 桐棺의 두께는 3치면 충분하고 수의는 3벌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또 무덤의 깊이는 밑으로는 물기가 오르지 않을 정도면 되고 무덤의 높이는 산소를 알아볼 수 있으면 된다. 고인을 위하여는 장지에 갈 때 곡하고 올 때 곡하면 그만이고 일단 집에 돌아와서는 곧 생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묵자는 3개월의 단상을 주장한다. 그가 생각할 때 厚葬久喪은 재력과 인력의 낭비로 절검의 미덕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다.
즉 후장구상은 나라를 가난하게 하고 백성을 궁핍하게 만든다. 죽은 사람에 대한 지나친 禮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해치는 꼴이다. 묵자가 귀신의 존재를 확신하면서도 薄葬短喪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귀신이 있기에 육체는 죽어도 그 죽지 않는 것이 남아 있게 된다. 그런데 厚葬은 그것마저 죽이게 된다. 이것은 불교나 기독교 및 이슬람교의 喪禮가 모두 간략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만약 살아 있을 때 묵자의 뜻에 따라 천하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됐을 때도 그 귀신을 모시는 자손의 ‘興天下之利’의 節儉정신을 따를 것이기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묵자의 생사관에 있어서의 ‘明鬼’와 ‘節葬’의 공통점은 죽은 후에 이루어지는 귀신에 대한 태도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묵자의 규율에 “죽음과 삶의 이로움을 잃지 않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사관은 묵가의 功利主義 사상의 전형적인 특색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중국 고대에 있어서의 유가의 공자와 맹자, 도가의 노자와 장자, 묵가의 생사관을 고찰해봤다.
유가는 죽음을 禮로써 대하려 하고, 도가는 죽음을 道로써 보려 하며 묵가는 죽음을 利로서 보려하는 것이 각각의 차이점이다. 유가는 ‘捨生取義’의 정신으로 도덕을 죽음보다 중시하며 바르게 죽어야 사후가 편안할 것으로 여긴다. 귀신의 존재를 회의적으로 보는 등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별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삶의 세계에서의 올바른 삶을 가치있게 생각하기에 내세까지도 살아있는 후손에 두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현세에 늘 존재함을 확인시키려 하는 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가의 생사관이다.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한 도가의 생사관은 그들의 세계관 혹은 본체론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즉 만물을 ‘一氣’가 통섭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에 生死도 ‘一氣’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인식한다. 생과 사는 밤낮이 바뀌고 사철이 변화하는 것처럼 형태가 바뀌는 것일 뿐 또는 바뀌는 것으로 보일 뿐 그 본질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는 ‘死生一如’에서 나아가 죽음을 方內에서 方外로 가는 것, 또는 질곡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낙관적으로 보기까지 한다. 묵가는 중국 사상계에서 종교적 색채가 가장 강한 사상적 특성에서 알 수 있듯이 사후의 세계를 긍정하고 현생의 사람들은 사후의 존재인 귀신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걸 종교적으로 믿게 하려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묵자는 귀신의 현세에 대한 ‘賞善罰暴’의 기능만 말했지 사후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묵자 역시 유가와 별 차이 없이 현세를 도덕적이고 복된 세상으로 만드는 데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의 낙관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생사관과 달리 유가와 묵가는 우리 모두의 지극히 현실적인 과제인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엔 미흡한 사상이라 볼 수 있다.
인문연구논집 제7집
pp.7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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