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호 박사의 책 < 제사장 나라 하나님 나라 >
371쪽의 두꺼운 책, 하루만에 다 읽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숨도 안쉬고 읽었다.
밤에도 읽고 낮에도 읽고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이런 책이 있었나.
이런 좋은 책이 있었나.
이스라엘을 택하여 제사장 나라를 세우려 하셨던 하나님,
그들이 철저히 하나님을 배반하여 제사장 나라를 이루지 못하자 그들을 패망시키신 하나님.
이제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어 하나님 나라를 일구신 하나님이시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 딱 한곳뿐이다.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모든 백성들이 일년에 세차례,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경배드리게 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법궤가 있는 곳이었고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이방인의 뜰로 되어있었는데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온 멀리서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편의를 위해
이방인의 뜰은 환전상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정작 이방인들은 들어올 수도
없었을 뿐아니라 기도할 수도 없었다.
이방인의 뜰을 빼앗긴 때문일까.
더이상 성전엔 이방인들이 들어설 수 없었다.
이방인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예수께서 채찍을 휘두르며 장사치들의 판을 덮어버리신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제사장들은 더이상 종교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검은 경제인이었다.
성전은 더이상 거룩한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검은 돈이 오가는 곳이었으며, 헬라치하의 유대인들이 정치와 경제,
종교적 무력을 행사하는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제사장 나라가 철저히 유린되고 농락당하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제사장 나라의 종지부를 찍으셨다.
십자가상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갈라진 것은 더이상
제사장 나라가 의미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그때까지 예루살렘에만 있던 유일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제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권한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는 더이상 성전이 아닌 교회의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우리는 땅끝까지 교회를 확장하는 사람들이다.
제사장들의 행패는 그들의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예수를 죽였다.
그리고 제자들을 죽이고 박해했다.
그때뿐일까.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안에서 교권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갖 악한 짓을 해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제사장 나라에서는 예수그리스도도 제사장의 권위에 복종하셨다.
한센병 환자들을 치유시키신 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제 제사장 나라가 끝나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이후에는
더이상 제사장에게 보일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는 제사장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사장 나라의 끝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이제 우리는 제사장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 살고있다.
하나님 나라는 제사장이 아닌 제자들이 이루어가는 나라이며
성전이 아닌 교회가 주무대가 되는 곳이다.
제자는 리더가 아닌 팔로우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어디에도 리더가 되라는 말은 없다.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인품과 성격을 닮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 그렇게 따르는 사람, 팔로우어가 진정 제자이지 리더가 제자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리더십을 가르치고 리더를 강조하는 것은
세상적인 견지에서 본 것이지 성경적인 관점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팔로우어가 되려고 하지않고
너도나도 리더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리더가 되지 못한 사람은 공동체에서 무시당하게 되고
낮은 자존감과 자기비하감에 빠져 헐떡이게 된다.
성경 어디를 봐도 리더가 되라는 말씀은 없다.
섬기는 자, 섬김이란 용어는 리더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리더가 어떻게 섬기는가.
진정 섬기는 자는 팔로우어지 리더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자기가 리더가 되어 섬기려고 한다.
이 말이 얼마나 모순이며 자충수를 두는 말인지 생각해보면 금방 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말에 대해 문제를 못느끼고 있다.
제사장 나라에서는 제사장이 주인공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제자들이 주인공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제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것을 튜닝이라고 표현한다.
음악회에서 연주 중간에 잠깐 쉬는 인터미션을 마련한 것은 관객들로
하여금 쉬며 음료수라도 마시라고 한 시간이긴 하지만,
정작 연주자들에겐 쉬는 시간이 아니다.
다음 시간의 연주를 위해 튜닝하는 시간이다.
악기의 줄이 풀어지지는 않았는지,
몸의 상태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저자는 베드로, 요한 그리고 사도바울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로마까지,
요한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밧모섬까지
그리고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로마까지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의 삶이 예수로 말미암아 튜닝되지 않았더라면 따라갈 수 없는 먼길이었다.
글을 마치며 그는 말한다.
킹덤 스토리..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가면서 모두들 나름의 킹덤 스토리를 썼다.
킹덤 스토리를 쓰면서 그 먼길을 따라갔다.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고..
깜짝 놀랐다.
내가 매일 쓰는 용어가 스토리, 킹덤 스토리인데 저자가 그런 말을 썼다.
베드로, 요한 그리고 사도바울이 그러했듯 우리 역시 예수를 따라가며
킹덤 스토리를 쓰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쓰신다고 했다.
질그릇과 수분..
질그릇은 진흙으로 만든다.
그러나 진흙에 수분이 있어야 반죽이 된다.
진흙이 다듬어져 질그릇이 되기까지 수분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수분이 말라버리면 더이상 질그릇으로 다듬어지지 못한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그렇다고 했다.
말씀이 닿을 때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사람은 촉촉한 수분이 남아있는 사람,
말씀이 아무리 화살처럼 와꽂혀도 꼼짝도 하지 않는 사람은
수분이 말라 삐쩍 굳어있는 사람.
수분이 남아있어 촉촉한 사람이 킹덤 스토리를 써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비록 넘어지고 자빠지고 실패하고 좌절할지라도 매일매순간
말씀에 의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할 줄 아는 사람,
예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가기 위해 제자로서의 삶을
튜닝하며 살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일구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며 그분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때 우리의 삶에서 알게모르게 킹덤 스토리가 하나씩 둘씩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감동에 또 감동,
하룻만에 다 읽은 책, 또한번 더 읽고,
몇번 더 읽어봐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후기를 남긴다.
첫댓글 은혜많이 받았습니다.
막상 만나면 할말은 서로 없겠지만 너무도 훌륭하셔서 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