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하늘과 땅의 주님,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11,25-26).
제2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Ⅰ.“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온전한 신뢰로 감히 다가간다)
2777로마 전례 중에,성찬례에 모인 회중은 자녀다운 대담함으로 우리 아버지께 기도드릴 것을 권고받는다.동방 전례도,“온전한 신뢰로 감히 행하여라.”,“우리를 합당한 자가 되게 하소서.”와 같은 표현들을 발전시켜 왔다.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3,5).오직 예수님께서만 하느님의 이 거룩한 문턱을 넘으실 수 있었다.이러한 예수님께서“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히브1,3),우리를 아버지의 면전으로 인도하시어 “보십시오.저와 저에게 주신 자녀들입니다.”(히브2,13)하고 말씀드리신다.
2778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드리도록 이끄는 전능하신 성령의 힘을 동방과 전례에서는,그리스도교의 아름답고 전형적인 표현으로써 곧 담대함 parrhesia, 단순 소박함,자녀다운 신뢰,기쁨에 찬 자신감,겸손한 대담성,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등으로 표현하였다.
Ⅱ.“아버지”
2779주님의 기도의 이 외침을 우리 것으로 삼기 전에,우리의 마음에서‘이 세상’의 그릇된 생각들을 겸손되이 정화시켜야 한다.겸손해야 우리는“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또 아들 외에는,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마태11,27)곧“철부지들”(마태11,25)외에는“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의 정화는 우리의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역사 안에서 형성되어 왔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아버지상이나 어머니상과 관련된다.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창조된 현세의 사고 범주들을 초월하신다.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창조된 현세의 사고 범주들을 초월하신다.이 영역에서 하느님을 우리의 생각에 비추어서 흠숭하거나 또는 적대시하는 것은,,찬양하거나 또는 싸워야 할 우상들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성부께 기도하는 것은,성자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계시는 그분’(Ipse Est),곧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2780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아들을 통해서 당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며,당신 성령께서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성부께 대한 성자의 위격적 관계는 인간이 생각할 수 없고,천상의 천사들도 엿볼 수 없는 그러한 관계이다.그렇지만 성자의 성령께서는,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믿는 우리를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참여시켜 주신다.
2781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할 때,우리는 성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게 된다.그때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경이로움으로 아버지를 알아 뵙고 깨닫는다.하느님을‘아버지’라고 부를 때,우리는 그분께 간청하기보다는,그분을 흠숭하며 찬미하는 것이다.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을‘아버지’로,참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시고,그 이름을 믿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며,우리 안에 현존하심에 대해 우리는 감사드린다.
2782우리가 아버지를 흠숭할 수 있는 것은,외아들 안에서 우리를 양자로 삼아 주심으로써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이다.세례를 통하여,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시고,‘머리’에서 지체들에게 흐르는 당신 성령의 도유로써 우리를‘그리스도들’이 되게 하신다.
2783이와 같이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되며,동시에 하느님도 우리에게 계시된다.
2784양자로 삼아 주시는 이 무상의 선물은 우리의 끊임없는 회개와 새 삶을 요구한다.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우리는 두 가지 근본 의향을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
첫째,하느님을 닮겠다는 열망과 의지이다.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는 은총에 힘입어 다시 하느님을 닮게 되었으므로,우리는 이 은총에 응답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을‘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는,하느님의 자녀답게 처신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인자이신 하느님을 여러분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여러분은 더 이상 인자하신 천상의 아버지의 징표를 지니고 있지 않게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생각하여 그 아름다움이 우리 영혼을 장식하게 해야 합니다.
2785둘째,우리를“어린이처럼”(마태18,3)되게 하는 겸손하고 신뢰하는 마음이다.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철부지들”(마태11,25)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나의 인연은 어디에?)
내입에 새로운 노래를
우리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담아주셨네.
많은 이들은 보고 두려워하며
주님을 신뢰하여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신뢰를 두며
오만한 자들과
거짓된 변절자들에게 돌아서지 않는 사람!
(시편40,4-5)
“많은 이들은 보고 두려워하며”는 모세의 출애굽 상황(탈출15,14이하)을 연상시킨다.여기서 시인은 개인적으로 도움을 얻었지만“많은 이들”앞에서 공적으로 찬양을 드린다.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조종하려 해서는 안 되고 찬양을 드리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하느님을 부를 때 찬양으로 부르고 그분께 강요하려 하지 마라.네가 네 원수를 억압해 달라고 그분께 간구하면서 하느님을 부른다면,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호소한다면,너는 악행으로 그분께 강요하는 것이다.네가 그렇게 한다면 너는 그분을 찬양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조종하는 것이다.”새로운 노래는 우리가 무절제한 모든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후에 새롭게 되어 부르게 된다(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
시인은 현인의 모습으로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교훈을 준다.그는‘행복한’사람이 누구인지 말한다.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4절)은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며 시인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다.“오만한 자들과 거짓된 변절자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는 점은 시편1,1에서 말하는 행복한 사람과 비숫하다.‘오만한 자들’은‘우상’,‘우상숭배자’등으로 이해된다.‘변절자들’은 거짓 신을 따라서 빗나간 사람들이다.‘돌아서다’는 기본적으로 ‘방향’을 뜻하지만 종교적으로는 거짓 신에게로 돌아간다는 맥락에서 사용된다(신명29,17;호세3,1).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뜻이 된다.“주님의 이름은 영원한 구원이며 믿는 이는 그분의 이름에 신뢰를 둔다.그는 자신의 장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총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는다”(카시오도루스).
시편40편에 대한 전체적 의미:시편40편은 인간의 힘으로 벗어나기 힘든 위기 가운데 있던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는 내용이다.하느님은 그를 위해 수많은 기적과 계획을 이루셨다.그는 감사와 찬양에 그치지 않고 숱한 어려움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성실.자애.진실을 알리는 사명을 다하는 선교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시인은 큰 모임에서“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10절)선언한다.그리고“제가 왔습니다”(8절)라며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이룰 준비가 되어있다.이 시편은 신약성경의 관점에서도 이해된다.특히7-9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다.“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히브10,5-6).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제사 대신에 참된 예배를 세우기 위해 오셨다.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친히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다.이 시편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12,1)로 바치도록 요청받는다.또한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할 준비된 자세로 살아가도록 초대받는다.(‘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1-41편’/전봉순 著/바오로딸)
나는 이제 늙은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 버리고 정갈해진 노인같이
부드럽고 편안한 그늘을 드리우고 앉아
바람이 불어도
좀체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성한 꽃들과 이파리들에 휩쓸려 한 계절
온통 머리 풀고 울었던 옛날의 일들
까마득한 추억으로 나이테 속에 감추고
흰 눈이 내리거나
새가 앉거나 이제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저 대지의 노래를 조금씩
가지에도 휘감는
나는 이제 늙은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초겨울 저녁/문정희)
행복한 겨울 날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