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조)는 내가 김동리 문학에 두번째 도전하는 영화였다. 이 소설을 월간 (현대문학)에서 읽었으며 이 잡지는 나의 정기구독물 몇권 가운데 하나였다. 전작 (까치소리)와 동일한 주제를 갖고 있으며 불교의 윤회사상을 느끼게 한다. 이 무렵 제작자인 중앙극장 김인동 사장에게 파리에 유학중인 윤정희를 불러올 것을 제의했더니 거부반응이 심했다. 사실 쓸 만한 여배우들은 기라성 같은 스타의 자리를 버리고 여자의 행복을 찾아 속속 결혼했기 때문에 충무로는 주연배우 공백상태에 빠져 있었다.
고은아의 결혼에 이어 남정임은 재일동포를 만나 도쿄로 떠났고 문희는 신문재벌 며느리로 들어간 것이다. 불꽃튀는 선의의 경쟁이 오히려 문희-윤정희-남정임 트로이카체제를 탄탄하게 만든 몇년이었는데 혼자 남은 윤정희는 허전함을 못이겨 유학을 결심하고 프랑스로 떠난 것이다. 그런데 헛소문 하나가 집요하게 그를 따라붙고 있었고 그것을 많은 사람이 사실처럼 믿고 있었다. 박대통령과의 연분 때문에 영부인이 윤정희를 국외로 추방했다는 것이다. 나는 사장이 반대하는 이유를 알아차리고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은 결코 설득이 아니라 이 기회에 진실을 밝히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윤정희가 서울을 떠나기 일년 전쯤 나는 다도해의 연대도에서 (작은 꿈이 꽃필 때)를 촬영하고 있었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일선교사 수기를 바탕으로 열악한 낙도의 교육환경 속에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지도하는 여교사가 중심인물이다. 우리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달간 섬학교 교실에서 합숙하며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윤정희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밤이 되면 생기를 되찾고 바다로 뛰어들어 혼자 수영을 즐기곤 했다.
어느 날 나는 우연처럼 그가 떠 있는 바다를 향해 헤엄쳐갔다. "감독님, 수영 좋아하세요?" "별로., 하지만 예쁜 여배우가 밤마다 혼자 수영하니 봉변이라도 당할까봐 걱정이 돼서" "어머 그럼 보디가드." 달이 휘영청 밝아 파도는 온통 은빛으로 부서졌다. "감독님도 제 소문 들으셨지요?"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했다. "역시 감독님도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사실 그 졸개들이 몇차례 찾아왔지만 단연 응하지 않았어요. 나는 죽을 각오로 버텼거든요. 지금 프랑스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한 지 10개월이 넘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요. 고민이예요. 친구들이 다 떠난 빈자리를 혼자 지키느니 이 기회에 공부나 더할까 하고 파리대학 입학허가서까지 받았어요." 나는 그의 유학이야기를 처음 듣고 놀랐지만 도와줄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는 분이 S대 불문과 교수로 있어 마지막 떼를 쓰고 있는 중인데 잘될지 모르겠어요."
윤정희는 그뒤 한달 만에 유학길에 올랐다. 김 사장은 소문이 사람잡는다고 혀를 차더니 두말없이 윤정희의 출연을 승낙했다. 그것도 왕복 항공편과 촬영기간중 자가용을 붙여준다는 조건으로. (극락조) 촬영은 경주와 설악산에서 올로케이션으로 진행됐다. 불국사와 경주 최씨네 종가에서 대부분을 찍었는데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무남독녀 중학생인 그녀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다. 그날밤 여관에서 친구들과 한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밖에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봐도 사람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솔밭 사이로 훤히 트인 황톳길뿐이고 그 길은 언젠가 걸어본 느낌이 든다. 언덕을 넘으면 왼편에 성황당이 있을 것 같다. 소녀가 찾아간 곳에 상상하던 그대로의 성황당이 있다. 마을이 나타나고 고래등 같은 최진사네 기와집도 찾았다. 안마당에 들어선 소녀는 울 안에 낡은 샘이 있으리라는 상상을 했고 그곳에서 실제로 이끼낀 옛 우물을 찾는다. 그리고 그 깊은 밑바닥에 자기 얼굴이 비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드디어 300여년 전 종과의 불륜 때문에 생매장된 별당아씨 윤정희의 모습이 되살아나면서 본격적인 드라마가 펼쳐진다.
윤정희의 상대역은 신성일. 사랑과 증오의 갈등, 결국 영화 피날레에 눈내리는 설악산에서 동사한 두사람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육체는 한덩어리가 돼 뗄 수 없다. 나는 두사람이 최후의 정사를 하면서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장소를 깊은 계곡의 암자로 설정하고 설악산 울산바위 아래 동굴 같은 선방을 찾아냈다. 그날 새벽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스탭들은 무거운 기자재를 짊어지고 산을 올랐고 그들보다 앞서 숙소를 떠난 신성일과 윤정희, 그리고 감독은 맨몸으로도 힘겨운 가파른 길을 한시간이나 올랐다.
목적지를 눈 아래 내려다보는 지점에서 한 승려가 마당의 눈을 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배우들에게 장소 교섭을 부탁하라고 눈짓했다. 그러나 스님은 묵묵히 눈만 쓸고 돌아보지 않는다. 감독이 나설 차례다. "스님, 이 사람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들이고 이 영화는 윤회전생을 통해서.." 스님이 고개를 확 들어 말을 막는다. "산승이 무슨 영화입니까. 윤회전생도 모르겠고 배우 이름도 모르겠오. 그런데 당신 얼굴은 주간지에서 봤지요. 뭐 스캔들 없는 괴짜감독이라고 썼던가." 윤정희는 눈물을 흘리며 요절복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