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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로 보낼 사람만 기용하라."- 세종대왕
" 무릇 잘된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전대의 잘 다스려진 세상과 어지러운 세상의 남긴 자취를 보아야 할것이다."
"관직이란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데려다가 앉히는게 아니다.
그 임무를 가장 잘해낼수 있는 사람을 택해 임명하는 것이다.
'나에게 불경한 신하 일지라도 말이다'
인재를 얻어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아야 한다. "
" 백성이 나를 비판한 내용이 옳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니
처벌해서는 안되는 것이요,
설령 오해와 그릇된 마음으로 나를 비판 했다 해도
그런 마음을 아예 품지 않도록 만들지 못한
내 책임도 있는 것이다.
어찌 백성을 탓할 것인가?"
" 남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고
위엄과 무력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자는
항상 사람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 내가 깊은 궁중에 있으므로 백성의 일을 다 알수가 없다.
만일 이해 관계가 백성들에게 절실한 것이 있으면
너희들은 마땅히 모두 아뢰라."
" 소수의 의견도 끝까지 경청하되
한 사람의 말만 가지고 결정해서는 안된다."
"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할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민을 구별해서 다스릴수 있겠는가? "
" 백성에게 누명을 씌운 관리는 엄벌하되
임금에게 험담한 백성은 용서하라" - 세종대왕
1397년~1450년(재위1418년~1450년)
왕위를 물려받은 셋째 아들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50)은
3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바쁜 정무에 무척 시달렸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보았고
밤에는 학문까지 익혔으니 심신이 무척 고달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30여 년을 하루같이 견뎌 냈다.
그래서인지 쉰 살이 넘고부터는 잔병이 잦았다.
태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 4대 임금이 된 세종대왕은
3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문화, 교육, 학술, 의료, 과학, 예술 등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수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세종은 죽기 직전까지 정무를 보았는데,
죽기 이틀 전에는 일대 대사령을 내렸다.
1450년 2월 15일 이전의 모반대역죄와
악질적인 살인죄나 강도죄 이외에는
모두 사면한다는 유지를 내린 것이다.
세종이 죽음을 앞두고
대사면을 내린 사례는 대단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은 죽기 직전에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집에 있는 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세종이 거처를 영응대군 집의 동별궁으로 옮겨갈 때 선공감 벼슬아치들이 화재를 막기 위해 주변의 인가를 허물려고 했다. 하지만 세종은 인가를 허물지 말고 화재를 예방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분부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방원은 무력을 써서 왕위에 오른 태종이다. 태종에게는 맏아들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있어 셋째인 세종에게 왕의 자리가 돌아갈 리 없었다. 그런데 양녕대군은 아버지의 관심이 셋째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 또한 효령대군도 형의 마음을 읽고 왕위에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불교에 심취하며 형의 뜻을 따랐다. 그리하여 세종은 자연스럽게 동궁으로 책봉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태종은 셋째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했을까?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세종의 총명함과 근면함과 자애로움을 보았기에 조선 왕조의 수성(守成,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이어서 지킴)을 맡기려 한 것이다. 원래 한 왕조가 창업을 하게 되면 뒤이어 기반을 다지는 군주가 있어야 탄탄해지는 법이다. 태종은 왕권의 확립 등으로 수성을 도모했지만 아직 미진한 데가 있었기에, 그 수성의 마무리를 셋째 아들에게 맡기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두 단계를 거쳐 세종은 동궁에 책봉되었다.
10대인 세종은 몇 달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도 손에서 결코 책을 놓지 않았다. 건강을 염려한 부왕은 모든 책을 거두어 감추도록 명했다. 그런데 병풍 사이에 책 한 권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 세종은 그 책을 숨겨놓고 몰래 수백 번이나 읽었다. 세종의 총명함은 그 자신도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았다”고 했고, “내가 궁중에 있을 적에 책을 손에 잡지 않고 한가로이 지낸 적이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총명만을 믿지 않고 경서와 같은 중요한 책은 100번씩 읽어 그 뜻을 완전히 터득했고 제자백가와 역사 책은 30번이나 읽어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정도로 정진을 거듭했다. 이런 세종이었으므로 호학(好學)의 군주로서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즉위 뒤에도 호사스런 생활을 즐기지 않았다. 세종은 경회루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남은 재목으로 별실을 짓게 했다. 그런데 돌층계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짚으로 만든 짚등을 올려 늘 이곳에 거처했다. 문 밖에 짚자리를 깔아 놓아도 이를 거두도록 했다.
어느 벼슬아치가 “공물로 금 · 은을 바치는 것을 감해 주었으니 보라매를 대신 바치게 하여 궁중에서 기르자”고 건의했다. 이에 세종은 태종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보라매를 잡기가 매우 어려우며, 날마다 꿩 한 마리를 먹여야 하고 길들이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또한 달아나면 길들이는 사람이 여염집에 들어가 수색하는 따위로 폐단이 커져 태종 임금도 놓아 준 적이 있었다며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세종은 소갈증(일종의 당뇨병)으로 늘 고생했는데, 어느 신하가 소갈증에는 흰 수탉, 누런 암탉, 양고기가 효험이 있으니 매일 임금에게 들이자고 건의했다. 이에 세종은 양고기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요, 또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동물의 생명을 해칠 수 없다며 끝내 이를 올리지 못하게 막았다.
세종은 남다른 우애를 지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형 양녕대군은 방탕한 생활을 한 탓으로 아버지 태종에게서 내쳐졌다. 이후 그는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태종이 죽자, 세종은 “형이 나이가 많아 예전 행동이 없어졌을 것이다”라며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서울로 오게 하여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자주 찾아가 깍듯이 대했고, 신하들이 너무 가까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만류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형과 아우들을 남달리 아끼며 자주 술자리를 베풀고 친분을 나누었다.
세종은 술을 마시면서도 거기에 빠져들지 않았고 잔치를 좋아하면서 탐닉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검소와 자애로 대했기에 궁궐의 창고에는 늘 물품이 남아돌았고, 세종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큰 옥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세종은 18남 4녀를 두었다. 그는 왕비 심씨 이외에 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 자녀를 둔 세종의 여인들은 소헌왕후를 비롯해 6명이었다. 세종은 조선조 27대 왕 가운데 아버지 태종 29명, 증손자 성종 28명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은 자녀를 둔 임금으로 꼽힌다.
어느 궁녀가 임금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 궁녀는 늘 세종을 가까이 모시고 지냈다. 그 궁녀가 어느 날 세종에게 작은 청을 드렸다. 아마 본가 오라비의 벼슬자리 하나를 부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계집아이가 감히 청탁을 하는 것을 보니 아마 내가 너무 사랑한 탓일 게다. 이 계집아이가 어린데도 이러하니 자라면 어떤 짓을 할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고는 그 뒤부터는 멀리했다고 한다.
또 세종은 아끼던 후궁의 오라비인 홍유근에게 늘 입던 옷을 내려 주었다. 홍유근은 겸사복(兼司僕, 임금 곁에서 심부름하는 직책)이 되어서 임금의 거둥마다 따라다녔다. 하루는 연(輦)을 끄는 말이 다리를 저는 것을 보고 그 내력을 알아보니, 온전한 말은 홍유근이 타고 다리를 저는 말은 연을 끌게 한 것이었다.
“만일 대간(臺諫, 언관들)이 이 일을 안다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니 소문을 내지 말라.”
임금은 홍유근에게 조용히 이르고 걸어서 돌아오라고 명했다. 뒤에 대간이 이 일을 알고 홍유근을 죽여야 한다고 청했으나, 그를 풀어 주어 멀리 달아나게 하고 끝내 찾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세종의 인품을 알 수 있다. 총애를 받는 후궁이 청탁을 하면 웬만한 임금이라면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행동으로 교훈을 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했다. 또 홍유근이 임금의 사랑을 받는다고 공사를 구분하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자, 그를 죽이지 않고 놓아 보내면서도 다시 찾지 않는 결단력과 목숨을 아끼면서도 공사는 철저히 구분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종친의 단속도 소홀하지 않았다. 종친들은 나라에서 주는 녹을 먹으면서 벼슬아치들을 깔보며 거들먹거리기 일쑤였다. 세종은 종학(宗學)을 설치하고 종친들에게 학문을 익히게 했다. 기본 수양을 쌓음으로써 종친의 비리를 없애려는 의도였다. 양녕대군의 아들 이혜가 아버지가 자신의 첩을 빼앗았다고 불만에 차서 술을 먹고 돌아다니며 함부로 사람을 죽이자 이혜와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시는 무리를 형벌로 다스리고 이혜에게도 엄한 처벌을 내렸다.
이와 같이 세종은 관용과 제재와 배려를 통해 한편으로는 위엄을 잃지 않고 한편으로는 목숨도 아꼈던 것이다.
세종은 정치와 학문에도 위민(爲民)과 창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백성이 자신의 뜻을 문자로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해도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노라.
- 《훈민정음》 서문
이 말은 곧 정음 창제는 백성을 위한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어려운 한문은 평생 배우고도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선비들은 어렵게 한문을 배우고 관습으로 쓰는 축문이나 편지, 혼서 따위를 한문으로 써서 대행해 주며 백성들에게 거들먹거렸다. 이렇듯 한자 생활권에서는 문맹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각주[1] .
세종은 이런 문자 환경을 바꾸려고 한 것이다.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등의 도움을 받으며 노력 끝에 정음을 창제했다. 학자들보다는 오히려 둘째딸 정화공주와 아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도움을 더 받았다. 한문을 선호한 이들을 배제한 것이다. 세종은 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 등 7명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놓아 주기도 하고, 처음에는 찬성해 놓고 뒤에 반대한 김문은 장형 100대에 처했으며 정창손은 벼슬을 떼 버렸다. 또 대간들의 죄를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내려보냈으며 언문으로 시험을 보게도 하고 서리 10여 명을 뽑아 언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한문 책들을 한글로 풀이했다.
세종의 열정적 노력으로 궁중에서는 언문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차츰 역대의 임금도 관례대로 한문 전교를 내리면서 언문으로 옮겨 공포하기도 하고 효유문 등 조정의 정책을 알리는 글도 언문과 한문 두 가지로 공포했다. 세종은 백성의 의사 표현과 이해를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고 보급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문화 · 서민문화를 화려하게 만들었고 문자 우민정책을 없애 버렸다. 다시 말하면 그는 언어귀족주의자가 아니라 언어민권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은 백성의 의사 표현과 이해를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우리 민족문화와 서민문화의 꽃을 피게 했고,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어 문자 우민정책을 없애 버렸다.
세종은 또한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농사법을 고쳐 《농사직설》을 짓게 하고 우리의 향약을 모아 후세에 전하게 했다. 또한 여러 천문기기와 과학기술을 개발하게도 했다. 한편 음악을 정리해 의례에 사용하도록 하고 백성들의 윤리의식을 넓히기 위해 《삼강행실도》를 간행해 보급했다.
세종은 수령이 현지에 내려갈 때에는
어김없이 불러서 수령이 해야 할 일을 낱낱이 일러 주고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과 형벌을 조심스럽게 베풀라고 당부했다.
또 죄인들에게 한 대의 매를 때리더라도
법조문에 따라 시행하라고 일렀고
그 조문을 관아의 벽에 걸어 놓게 했다.
감옥을 만드는 도면을 그려서
춥거나 더운 철에 따라 그 위치를 달리해
죄수가 병들지 않게 배려했다.
집현전을 설치해
고금의 서적을 수장하고 학사들을 모았으며,
녹봉을 넉넉하게 주면서 독서와 연구에 진력하게 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직접 나가 학사들과 곧잘 토론을 벌였다.
때때로 내시를 집현전에 보내
학사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알아보게 했다.
하루는 새벽에 신숙주가 글을 읽고 있다고 하자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전해 주게 했다.
세종은
장영실같이 낮은 신분의 인물이라도
재주가 뛰어나면
높은 벼슬을 주어 등용했다.
그리고 낮은 벼슬아치 출신의 천문학자들에게
서울 주변의 수령자리를 주어 연구와 관찰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정사를 부지런히 보았으나
혼자 모든 일을 결정하려 하지 않았다.
적절한 벼슬아치를 골라 정승과 판서를 맡기고
그들의 손을 빌려 정치를 폈다.
합리적이고 근실한 성품을 지닌 황희를 영의정 자리에 앉히고
맹사성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 여러 정사를 맡겼다.
유교를 익힌 벼슬아치들이 불교를 억제하려고 나섰지만
그 자신은 부처의 공덕을 기린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직접 지어
백성들이 노래하게 했다.
또 만년에, 철폐했던 내불당(內佛堂)을 복원해
비빈과 궁녀들은 물론 궁중에서도 불교를 받들게 조치했다.
하지만 불경을 읽어도 결
코 부처에게 절을 하거나 빌지는 않는 절도도 보여 주었다.
여느 유학자들과는 달리 불교를 과도하게 이단으로 몰아가지 않은 것이다.
성현의 학문을 열심히 읽었으나
성리학 같은 관념적인 이론에도 빠져들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실용적인 학문 또는 백성에게 유용한 이론과 실제에 몰두했다.
당연히 풍수설이나 비기(秘記) 따위 신비의 학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외교에도 탁월한 솜씨를 보여 엄청난 국익을 챙겼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말 2만 마리를 보내라고 강요했으나
세종은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 엄청난 말의 수를 채우기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말이 육지로 요하를 건너거나 배로 산동반도로 보내
남경까지 가는 경비는 말을 기르는 비용보다 훨씬 더 들었다.
이것은 얼토당토 않은 요구였다.
무력으로 임금이 된 태종은
책봉을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말 500필을 요동에 보냈고,
그 뒤에 책봉을 받고 나서는 연달아 6000필의 말을 바쳤다.
세종도 즉위한 뒤
명나라의 요구로 말 300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또 많은 금 · 은을 조공품으로 바쳐야 했다.
그런데 명나라 성조는 북방을 정벌하면서 말 1만 필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보내야 할 처지였다.
이때 세종은 ‘인삼 로비’를 벌였다.
곧 명나라에서 오는 칙사나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은밀히 로비를 해
인삼의 효용성을 선전하고
금 · 은과 말을 인삼으로 바꾸게 했다.
명나라 사람들은
“고려의 인삼은 진시황이 구하려던 불사약이다”는
선전에 넘어가 인삼을 무척 좋아했다.
세종은 국가이익을 영구히 가져오게 한 뛰어난 외교수완을 보인 것이다.
세종은 국경지대의 안정을 도모해
국경을 개척해 오늘날의 두만강과 압록강의 국경을 긋게 한 단서를 만들었고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쓰시마를 정벌했다.
그는 이처럼 외교정치에도 큰 업적을 쌓았던 것이다.
아버지 태종이 맏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은 데에는
특별한 뜻이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심약하고 병약한 맏아들 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뒷날 큰 살육을 불러왔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그는 형이 죽고 어린 조카인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이어 태종이 했던 것처럼 형제와 조카를 죽이고 중신들을 살육했다.
태종은
사병으로 왕권을 잡았지만
나중에는 사병을 뿌리 뽑기 위해 애를 썼다.
태종은 살아 있을 때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도
군사권만은 쥐고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군사권의 중요성을 세종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은 이 점을 소홀히 한 탓에
결국 수양대군이 사병을 기르고
이를 발판으로 왕위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게 한 것이다.
세종은 아들과 조카가 골육상잔을 벌일 줄은 예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은
아들대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세종은 적어도 수양대군의 야심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아예 왕위를 물려주든지
아니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또 세종은 재주 있는 인사를 신분의 차별없이 등용했으나
서자의 차별과 과거를 통한 낮은 신분의 인사들이
벼슬을 할 수 있는 길은 터 주지 못했다.
선대가 만든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완전한 계급타파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도적 개선을 도모할 능력과 환경이 되는데도 이 점을 소홀히 한 것이다.
세종은
늘 병에 시달렸는데 54세가 되어서는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온갖 처방을 써도 효험을 보지 못했다.
명나라 사신 예겸이 성삼문에게
임금의 병명을 묻자 ‘풍증’이라고 대답했다.
풍증은 온갖 신경의 장애로 일어나는 병이다.
곧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신경쇠약의 병이다.
늘 노심초사하면서 낮에는 정무를 보고
밤에는 학문에 정진하는 일상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는 병이었을 것이다.
그는 몸이 비대한 탓으로
늘 소갈병에 시달렸다.
조선 세종 때의 여러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
단종 2년(1454)에 정인지 등이 엮은 세종 재위 32년간의 실록이다.
오례의, 악보, 지리지, 칠정산 따위도 함께 수록했다.
세종이 죽기 며칠 전
동별궁 앞에 승려 50여 명이 모여 징을 치며
요란스럽게 임금의 쾌유를 비는 재를 올렸다.
승려들이 모여 재를 올린 것은
단순한 궁중의 관례가 아니라 적어도 세종이 평소 불교를 이단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의 학구적 탐구욕은 불경도 예외의 대상이 아니었다.
세종은 사리판단이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 지도력을 지닌
보수적 군주였다.
[세종 치세의 역사적 의의]
세종대왕의 시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날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세종대의 주요편찬서]
이 편찬물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역사서, 유교경서, 유교윤리와 의례, 중국의 법률 및 문학서, 정치귀감서, 훈민정음·음운·언역(諺譯) 관계서, 지리서, 천문·역수서, 농서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하였다.
즉, 정치·법률·역사·유교·문학·어학·천문·지리·의약·농업기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종합 정리하는 사업으로, 이 작업을 통해 이 시대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특기할 일은 이러한 많은 편찬사업이 왕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고, 왕 자신도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 예로서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의 편찬은 집현전의 학자뿐 아니라, 53인이나 되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총동원되어 3년에 걸쳐 이룩한 큰 사업이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위해 왕은 계속했던 경연까지 중지하고 밤늦게까지 친히 교정을 보았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유산임에 분명하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길러 낸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문화 의식과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크게 발전을 보았다. 천문대와 천문관측기계 방면에서의 발전이 이러한 측면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 초기 서운관에는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에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한 바 있으나, 이것은 아주 미흡한 것이었다.
세종 14년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의 제작사업과 함께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높이 약 6.3m, 세로 약 9.1m, 가로 약 6.6m의 석축간의대가 세종 16년에 준공되었다. 그리고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간의대와 그 중요한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과 전통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세종 15년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이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古典)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장영실(蔣英實) 등 기술자들에게 실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다.
그리고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한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公衆時計)였다. 또한,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 시계였으며,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이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지면서 시각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시계는 갠 날과 낮에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공적인 표준시계로는 물시계가 더 유용했는데 자격루가 그것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해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해 세종 16년에 완성하였다.
그것은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세종 20년에는 장영실에 의해 또 다른 자동물시계이며 천상시계인 옥루가 완성되었다. 세종은 천문·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큰 관심을 가져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제가역상집 諸家曆象集≫ 등이 편찬되었다.
세종 15년에는 정인지·정초·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했으며, 세종 24년에 완성되어 2년 만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도 이순지·김담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가장 완전한 이슬람 천문학서의 번역본이라 하겠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으로 조선의 역법(曆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또한, 세종 27년에는 이순지에 의해 ≪제가역상집≫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세종대에 이룩한 천문·역법의 총정리 작업과 천문의상 제작의 이론적 근거를 찾기 위한 고문헌(古文獻) 조사사업의 결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높은 수준의 중국 천문학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측우기의 발명도 이 시기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시대에서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은 매우 큰 뜻을 가진다고 하겠다. 측우기는 세종 23년 8월에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의 측정제도가 마련되었고, 그 미흡한 점은 이듬해 5월에 개량·완성되었다.
이 측우기를 발명해 강우량을 측정함으로써 농업기상학의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한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도량형 제도도 세종대에 확정되었다. 즉, 세종 13년과 28년에 확정된 도량형제도가 그 뒤 ≪경국대전≫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이 제도는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률(黃鐘律)을 낼 수 있는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삼은 것으로서, 황종관의 길이는 자[尺]로 길이의 단위를 삼았고, 그 속에 담기는 물은 무게의 단위로 삼은 것이었다.
인쇄술에서도 세종대는 특기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403년에 주조된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세종 16년에는 더욱 정교한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다.
세종은 계미자 인쇄기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와 인쇄기를 만들게 해 활자의 주조와 인쇄기술상의 큰 발전을 가져 왔다. 세종 16년에는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자체인 갑인자의 주조사업이 이천(李?)의 감독 아래 이루어져 20여만 자의 크고 작은 활자가 주조되었다.
그 뒤 세종 18년에는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주조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일단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화약과 화기(火器)의 제조에 있어서도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세종대는 종래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탈피하려는 독자적 경향이 나타나서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다.
완구(碗口)가 개량되고, 소화포(小火砲)·철제탄환·화포전(火砲箭)·화초(火?) 등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세종에게서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못되었다. 세종 26년에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를 짓게 해 뛰어난 성능을 가진 새로운 규격의 화포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이듬해는 화포의 전면 개주(改鑄)에 착수하였다.
세종 30년에 편찬·간행된 ≪총통등록 銃筒謄錄≫은 그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그리고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책이었다. 이 책의 간행은 조선시대의 화포제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세종대에는 농사법의 개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사시찬요 四時纂要≫ 등과 우리 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 本國經驗方≫ 등의 농업서적을 통해 농업기술의 계몽과 권장을 했으며,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 農事直說≫을 편찬·반포하였다. 이 책의 반포는 조선시대 농업과 농업기술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의약발명에도 세종대는 특기할 만한 시대로서 ≪향약채집월령 鄕藥採集月令≫·≪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유취 醫方類聚≫ 등의 의약서적이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의 편찬은 15세기까지의 우리 나라와 중국 의약학의 발전을 결산한 것으로 조선과학사에서 빛나는 업적의 하나이다.
이 시대는 또 음악에 있어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시기였고, 그것은 세종의 지휘와 참여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교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유교적 의례인데, 국가의 의례인 오례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유교적인 의례의 정리와 함께 음악의 정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의 부흥, 악기(樂器)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업적은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세종이 박연(朴堧)과 같은 음악의 전문가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왕은 종래 미비하고 불완전한 아악을 바로잡기 위해 박연 등을 시켜 중국의 각종 고전을 참고해 아악기를 만들게 하고, 아악보를 새로 만들게 해, 조회아악(朝會雅樂)·회례아악(會禮雅樂) 및 제례아악(祭禮雅樂) 등을 제정하였다.
그 뒤 아악은 국가·궁중의례에 연주되었고,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부흥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아악의 부흥은 그 악기의 국내 생산과 직결된 문제로서 종래 중국에서 수입했던 악기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악기인 편경(編磬)과 편종(編鐘)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세종은 또한 박연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게 해 모든 악기의 음(音)을 조율(調律)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친히 <정대업 定大業>·<보태평 保太平>·<발상 發祥>·<봉래의 鳳來儀> 등 대곡(大曲)을 작곡하였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는 여민락(與民樂)도 <봉래의> 일곱 곡 중 한 곡이며, <정대업>과 <보태평>은 현재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은 또한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했으니, 곧 정간보(井間譜)가 그것이다. 정간보에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은 이 정간보를 사용해 향악인 <정대업>·<보태평>·<봉래의>·<봉황음 鳳凰吟>·<만전춘 滿殿春> 등을 기보하였다. 정간보는 세조대에 약간 개량된 것을 현재에도 국악에 사용하고 있다.
법제적 측면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적 민본주의·법치주의가 강화·정비된 시기였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다. 그리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 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해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제도를 정비하고 흠휼정책(欽恤政策)도 시행하였다. 형정(刑政)에 관한 왕의 시책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율문(律文)에 적합한 조목이 없는 경우에는 법률의 적용을 신중히 할 것, 고문으로 사망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사죄는 삼복법(三覆法)을 적용할 것 등과 고문에 태배법(笞背法)을 금하며, 의금부삼복법(義禁府三覆法)을 정하였다.
또, 15세 이하와 70세 이상인 자는 살인·강도죄를 제외하고는 수금(囚禁)하지 못하며, 10세 이하 80세 이상인 자는 사죄(死罪)를 범해도 수금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죄인(徒罪人)의 부모가 70세 이상인 자는 노친(老親)의 소재지에서 복역하도록 정하였다.
또한, 남형(濫刑)을 금할 것, 주인을 살해한 노비는 반드시 관에 고해 시행하게 할 것, 도류(徒流) 죄인의 수속금(收贖金)이 과중하므로 빈민에게는 감면하도록 할 것 등을 정했으며, 옥도(獄圖)를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여러 차례 옥내(獄內)의 위생과 난방을 철저히 관리해 병들어 사망하는 일이 없도록 신칙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했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관해서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다. 그리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제도(田稅制度)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해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해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해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의 업적으로 빼놓을 수 없다.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다. 그리고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해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사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文治)만을 힘쓰지 않고 군사훈련, 화기의 제조·개발, 성진(城鎭)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에도 힘을 기울인 결과인 것이다. 동쪽의 일본에 관해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세종 1년에는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세종 8년에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세종 25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은 개국 초부터 억불책을 써왔고, 태종대에는 더욱 강화하였다. 세종도 불교에 대한 시책은 선대의 것을 따랐다. 왕실 중심의 기우(祈雨)·구병(救病)·명복(冥福) 등을 위한 불사(佛事)는 세종대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세종은 유신(儒臣)들의 극단적인 불교전폐론에도 불구하고 조종상전(祖宗相傳)의 불교를 급히 없앨 수는 없다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불교의 세속권을 재정리할 필요를 느껴 세종 1년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를 정리해 국가에 귀속시켰다.
세종 6년에는 불교의 종파를 선교(禪敎) 양종으로 병합했으며, 사사(寺社)·사사전·상주승(常住僧)의 액수를 재정리하였다. 즉, 선교 양종에 각 18사(寺)합 36사를 본사로 인정하고, 사원전은 7,760결(結), 상주승 3,600인으로 삭감·정리하였다.
법석송경(法席誦經)과 도성(都城) 안에서의 경행(經行)도 파했고, 궐내의 연등행사도 없앴다. 그리고 여항(閭巷)에서의 연등도 승사(僧舍) 이외에서는 일체 금하였다. 이처럼 세종의 불교에 대한 시책은 불교의 세속권의 정리·약화와 불교행사의 제한으로 나타났으나 왕실과 세종 개인적인 면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못하였다.
세종 14년에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7일간의 수륙재(水陸齋)를 행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세종 17년부터 24년까지는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舍利閣)·석탑(石塔)의 중수, 안거회(安居會)·경찬회(慶讚會)의 설행(設行)을 둘러싸고 유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또, 세종 28년에 왕비 소헌왕후가 죽자 왕은 유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경(佛經)의 금서(金書)와 전경법회(轉經法會)를 강행하였다. 그리고 세종 30년에는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내불당(內佛堂)을 세웠다.
세종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말년에 오면서 크게 변하는데, 이는 세종 26년에 광평대군(廣平大君), 그 이듬해에 평원대군(平原大君), 세종 28년에 왕후를 연이어 잃게 됨에 따라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왕 자신의 건강도 악화된 것도 그가 불교로 기우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결과 세종 말년에 오면 세종과 유신간에 불교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논란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은 개국 초부터 국가의 기본시책이 숭유억불이었으나, 유교는 정치이념·학문·철학·윤리적인 면의 욕구를 채워줄 뿐, 종교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이러한 유불(儒佛)의 갈등 가운데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정치·유교사회의 기반이 다져진 시대였다. 이 밖에도 금속화폐인 조선통보의 주조,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한 불서언해(佛書諺解) 사업 등을 폈고,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봉사하게 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한, 종래 춘추관·충주의 두 사고(史庫)였던 것을 성주·전주 두 사고를 추가 설치하게 하였다. 그 덕분에 임란중 전주사고본이 전화를 면하고 오늘날 조선 전기의 실록이 전해질 수 있게 한 사실 등도 기억해야 될 일이다.
-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에서 옮김
영응대군(永膺大君)[1424~1467]
아버지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영응대군의 졸기(卒記)가 『세조실록(世祖實錄)』
권 41 1467년(세조 13) 2월 2일자 기사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영응대군 이염(李琰)이 졸(卒)하였다.
겨우 말을 할 줄 알 적에 어린아이를 조각(雕刻)하여 만든 화촉(花燭)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초[燭]가 타면 반드시
‘초에 조각한’ 어린아이에게 화가 미치게 될 것이니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니,
세종이 이를 크게 기특하게 여기었다.
세종이 매우 사랑하여
세조가 보살펴 주기를 여러 아우들보다 특별히 하였다.
염이 일찍이 병이 드니,
세조가 매우 염려하여 무릇 병이 나을 수 있는 것은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대궐에서 집까지의 길에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아니하였다.
염은 타고난 바탕이 순후(醇厚)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며, 음률(音律)에 밝았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內帑庫)의 진귀한 보물을 염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미처 못하고 사망하였으므로,
문종이 즉위하고 얼마 있다가 내탕고의 보물을 내려 주어
그 집으로 다 가져갔다.
이로써 어부(御府)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가
모두 염에게로 돌아가니,
그 재물이 누거만(累巨萬)이 되었다.
그러나 자못 검소하고 절약하여 사치를 일삼지 아니하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 곁에 있을 때도
자신을 낮추어 공손히 하고 삼가하고 조심하여
조금도 허물과 실수가 있지 아니하므로,
세조가 매우 중히 여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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