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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菩薩의 出家
가. 菩薩의 十種事示現出家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十事故로 示現出家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爲厭居家故로 示現出家하며 爲着家衆生으로 令捨離故로 示現出家하며 爲隨順信樂聖人道故로 示現出家하며 爲宣揚讚歎出家功德故로 示現出家하며 爲顯永離二邊見故로 示現出家하며 爲令衆生으로 離欲樂我樂故로 示現出家하며 爲先現出三界相故로 示現出家하며 爲現自在不屬他故로 示現出家하며 爲顯當得如來十力無畏法故로 示現出家하며 最後菩薩이 法應爾故로 示現出家가 是爲十이니 菩薩이 以此調伏衆生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일로써 출가함을 보이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집에 있는 것을 싫으므로 출가함을 보이느니라. 집에 애착하는 중생에게 집을 버리게 하느라고 출가함을 보이느니라. 성인의 도를 따르고 믿고 즐거워하느라고 출가함을 보이느니라. 출가한 공덕을 선전하고 찬탄하느라고 출가함을 보이느니라. 두 가지 치우친 소견을 영원히 떠남을 나타내느라고 출가함을 보이느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탐욕의 낙(樂)과 ‘나’라는 낙을 여의게 하느라고 출가함을 보이느니라. 먼저 삼계에서 벗어나는 모양을 나타내느라고 출가함을 보이느니라. 자유자재하여 다른 이에게 소속되지 않음을 나타내느라고 출가함을 보이느니라. 장차 여래의 열 가지 힘과 두려움 없는 법을 얻는 것을 나타내느라고 출가함을 보이느니라. 최후의 몸 받은 보살은 법이 으레 그러하므로 출가함을 보이느니라. 이것이 열이니, 보살이 이것으로 중생을 조복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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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출가(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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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사시현출가(十種事示現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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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이십사고(以十事故)로: 이러한 열 가지 일로써
시현출가(示現出家)하나니: 출가함을 보이나니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가 되느냐.
소위위염거가고(所謂爲厭居家故)로: 이른바 집에 있는 것을 싫어함을 보이므로
시현출가(示現出家)하며: 출가함을 보인다. 이건 내 얘기다.
위착가중생(爲着家衆生)으로: 집에 애착하는 중생에게 부처님은 우리에게 출가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이런 뜻이다.
정확하게는 보살 이름이 누구인가? 석가모니 부처이다. 비로자나 부처님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아미타불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영사리고(令捨離故)로: 집을 버리게 하느라고
시현출가(示現出家)하며: 출가함을 보이고
위수순신락성인도고(爲隨順信樂聖人道故)로: 성인의 도를 따르고 도를 따르고 믿느라고
시현출가(示現出家)하며: 출가함을 보이고, 출가라고 하는 게 뜻이 확 명확하다. 성인의 도를 따르고 욕심의 집을 버리고 애착을 버리고 그렇잖은가.
위선양찬탄출가공덕고(爲宣揚讚歎出家功德故)로: 출가한 공덕을 선양 찬탄하고 출가 공덕을 선전하고 찬탄하느라고
시현출가(示現出家)하며: 출가함을 보이고, 출가가 그만큼 좋으면 출가하면 되지.
위현영리이변견고(爲顯永離二邊見故)로 : 치우친 소견을 여읨을 나타내느라고
시현출가(示現出家)하며 : 출가하는 것을 보인다. 이변견이라고 하는 것이 계속 나온다. 이변견을 떠난 것을 이세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간은 뭐냐? 두 가지의 이변이 있다. 단상이 있고 유무가 있고, 있고 없는 것이 있고, 또 깨달았다 생사와 열반이 있고 이런 것들을 다 떠난다는 것이다.
위령중생(爲令衆生)으로: 중생들로 하여금
이욕락아락고(離欲樂我樂故)로 : 욕심의 락과 나라고 하는 락을 여의게 하느라고
시현출가(示現出家)하며: 출가함을 보인다.
치문에 ‘일기진락(一期趁樂)이여 부지낙시고인(不知樂是苦因)이로다. 한 번 달콤한 줄 알고 폭 빠졌더니 나중에 눈물의 씨앗이 되었다’라고 나온다.
위선현출삼계상고(爲先現出三界相故)로: 삼계에서 뛰어난 모양을 나타내느라고
시현출가(示現出家)하며: 출가함을 보이고
딱 마음 먹고 출가를 한다고 대구 서부 정류장에 가서 밤새김밥 21개를 먹고 아침에 7시 첫차를 타고 해인사로 갔다.
집에서 나오니까 할 일이 없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이제 공부 안 해도 되고 운동 안 해도 되고 할 일이 없으니까 너무 좋은데, 해인사 행자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뺑뺑이를 도는 것이다.
제 인생에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않았던 때, 그 때 행자가 되기 직전 경계인으로 살 때였다.
스님들은 어떤가.
그때가 아마 해탈이었지 않나 싶다.
행자가 되니까 첫날부터 얼마나 군기가 빡센지.
해인사 들어가서 딱 차수해서 묵언하고 첫 참회를 받았는데, 왜 참회를 받았느냐, 이렇게 있다가 스님이 지나가시길래 눈을 떴더니 왜 눈 떴냐고 500배를 했다.
어릴 때 운동하던 몸이 되놓으니까 몸이 쭉 벌어졌는데 다소곳하게 있으려니 얼마나 아픈지, 차수하고 다닌 손에는 나중에 물집이 다 생겼다.
행자실 걸레로 방을 닦는데, 방 닦는 것도 뭐라고 하고, 그때 행자반장스님이 지금도 친한 도반으로 지내는데 지금 봐도 초긴장을 한다. 스님이 제주도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그래도 전화가 오면 깜짝깜짝 놀란다.
행자 때 한번 군기 잡혀 버리니까 지금까지도 긴장이 된다.
얼마나 재수 없으면 그 스님은 고향이 전라도 고창이다. 선운사 있잖은가. 우리 때는 해인사에서 같이 행자 생활을 해도 전부 본사가 다 갈라졌다. 수덕사로 불국사로 범어사로 통도사로 해인사에서 받는 사람도 있고, 저는 나옹스님 고향인 영덕에서 태어났다. 고창하고 영덕이 어떤가 하면 동서로 딱 대각선에 있는 곳이다.
우리가 재수 없이 딱 제일 중간인 해인사에서 만난 것이다.
그때부터 재수가 없었다.
“도정스님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죠. 그 스님. 지금도 긴장한다니까요. 제가 방송이라서 얘기도 못하지만.”
“도정스님?”
“도정스님?”
“얘기도 하지 마요. 지금 머리 끝에 소름이 돋습니다.”
덩치도 얼마나 부리부리한가?
제주도 가서 제가 살만하다.
그래도 제가 아프고 이러니까 어디 있는 거 없는 거 행자 도반들 거 돈 다 끌어 와서 간호한다고 욕봤다.
요새는 그런 의리도 다 사라지고 강원의 의리가 다 사라졌다.
위현자재불속타고(爲現自在不屬他故)로:
시현출가(示現出家)하며
위현당득여래십력무외법고(爲顯當得如來十力無畏法故)로: 장차 여래의 열 가지 힘과 두려움 없는 법을 얻는 것을 나타내 보이느라고
시현출가(示現出家)하며: 출가함을 보이고
최후보살(最後菩薩)이: 최후 보살이
법응이고(法應爾故)로: 법응이고로, 맨 나중에 한 번만 일생 보처다. 그 사람이
시현출가(示現出家)가:출가함을 보이느니라. 완성된 보살 최후보살.
시위십(是爲十)이니: 이것이 열 가지이니
보살(菩薩)이:보살이
이차조복중생(以此調伏衆生)이니라 : 이것으로써 중생을 조복 복시키느니라. 중생교화, 중생조복.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남 중생은 남 중생이지만 지 중생 자성 중생서원도다.
나. 菩薩의 十種事示行苦行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爲十種事故로 示行苦行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爲成就劣解衆生故로 示行苦行하며 爲拔邪見衆生故로 示行苦行하며 爲不信業報衆生으로 令見業報故로 示行苦行하며 爲隨順雜染世界하야 法應爾故로 示行苦行하며 示能忍劬勞하야 勤修道故로 示行苦行하며 爲令衆生으로 樂求法故로 示行苦行하며 爲着欲樂我樂衆生故로 示行苦行하며 爲顯菩薩의 起行殊勝하야 乃至最後生히 猶不捨勤精進故로 示行苦行하며 爲令衆生으로 樂寂靜法하야 增長善根故로 示行苦行하며 爲諸天世人이 諸根未熟하야 待時成熟故로 示行苦行이 是爲十이니 菩薩이 以此方便으로 調伏一切衆生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일을 위하여 고행을 보이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지혜가 용렬한 중생을 성취시키느라고 고행을 보이느니라. 삿된 소견 가진 중생을 빼내느라고 고행을 보이느니라. 업과 과보를 믿지 않는 중생에게 업과 과보를 보게 하느라고 고행을 보이느니라. 혼잡하고 물든 세계를 따르게 되면 법이 으레 그러하므로 고행을 보이느니라.
능히 고생을 참고 부지런히 수도함을 보이느라고 고행을 보이느니라. 중생으로 하여금 법 구하기를 즐겁게 하려고 고행을 보이느니라. 탐욕의 즐거움과 '나'라는 즐거움에 집착한 중생을 위하여 고행을 보이느니라. 보살의 수행이 수승하여 마지막 태어난 몸으로도 오히려 부지런히 정진함을 버리지 않음을 나타내느라고 고행을 보이느니라.
중생으로 하여금 고요한 법을 좋아하고 착한 뿌리를 증장케 하느라고 고행을 보이느니라. 천신과 사람들의 근성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이에게 때를 기다려 성숙하게 하려고 고행을 보이느니라. 이것이 열이니, 보살은 이 방편으로 일체 중생을 조복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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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사시행고행(十種事示行苦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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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위십종사고(爲十種事故)로: 열 가지 일을 위하여
시행고행(示行苦行)하나니: 고행을 보인다.
하등(何等)이: 어떠한 것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냐
소위위성취열해중생고(所謂爲成就劣解衆生故)로: 이른바 지혜가 용렬한, 지혜가 아주 함양미달이다.
함양에 사는 스님들은 전부 미달 스님이다.
함양 있잖은가. 안위 함양, 용추사 있는 데 함양, 거기도 함양 미달 스님이 한 분 계신다.
용렬한 중생을 성취시키느라고
시행고행(示行苦行)하며: 고행을 하고
위발사견중생고(爲拔邪見衆生故)로:또 우리가 왜 고행을 하느냐, 삿된 소견을 가진 중생을 구해주느라고, 빼내느라고
시행고행(示行苦行)하며: 고행을 한다.
우리는 삿된 소견을 가지면 다시 안 돌아보려 한다. 모자란다 싶으면 확 밟아버리고 무시한다.
근데 보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고생을 한다는 것이다.
뭐하려고 그렇게 고생하느냐 하니까, 저 모지리를 위해서
위불신업보중생(爲不信業報衆生)으로 :업과 과보를 믿지 않는 중생에게
영견업보고(令見業報故)로:업과 과보를 믿게 하느라고
시행고행(示行苦行)하며:고행을 한다.
제가 어릴 때 출가하기 전에 스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님이 “인과를 안 믿으면 중이 아니데이.”
그게 아주 쟁쟁하게 들린다.
인과를 안 믿으면 중이 아니다.
저도 인과를 부정하고 싶을 때가 너무 많다.
왜냐하면 위선적으로 너무 많이 살아와서 “설마 설마”인과를 부정하고 싶을 때가 너무 많다.
늘 스님의 말씀이 가슴을 한 번씩 때릴 때가 있다.
“인과를 안 믿으면 중이 아니다.”
우리 어른스님은 옛날 소임자들은 그렇게 했다고 말씀하셨다.
인과를 아는 사람한테 주지를 맡기고 소임을 맡겼다는 것이다. 사판(事判)을 인과를 아는 스님들한테 맡겼다는 것이다. 인과를 모르면 다 해먹을 거거든. 다 해먹지 않고 막 해먹을 것이다.
위수순잡염세계(爲隨順雜染世界)하야: 물든 세계를 따라서는
법응이고(法應爾故)로:으레 그리함으로
시행고행(示行苦行)하며:고행을 하고 잡되게 살고 힘들게 살고 푹 빠져서 그냥 어둠의 중생들을 으레 그러함으로 그 사람들 때문에 법응이고로 고행을 해야 되고
시능인구로(示能忍劬勞)하야: 고생을 참고
근수도고(勤修道故)로: 부지런히 수다함을 보이느라고
시행고행(示行苦行)하며:고행을 하고
위영중생(爲令衆生)으로: 중생이 법을 구하기를
낙구법고(樂求法故)로:즐겁게 하려고
시행고행(示行苦行)하며: 고행을 한다.
모든 고행의 대표적인 이는 석가모니다.
용맹정진, 설산동자도 석가모니다. 상불경보살도 석가모니다. 당신은 경전 속에서 해놓은 것이 많다.
“내 이와 같이 고생했다.”
6년은 고사하고 6일만 하라면 우리는 죽어버린다.
위착욕락아락중생고(爲着欲樂我樂衆生故)로: 욕락과 아락에 집착한 중생, 내 즐거움에 폭 빠져 있는 중생을 위해서
시행고행(示行苦行)하며: 고생을 하고
위현보살(爲顯菩薩)의: 보살이
기행수승(起行殊勝)하야: 수행이 훌륭하여
내지최후생(乃至最後生)히: 내지 최후생까지, 마지막으로 태어난 몸으로도
유불사근정진고(猶不捨勤精進故)로: 유(猶) 아직도 불사근정진고로, 마지막으로 태어났으면 이제 끝날만 한데도 후반전 연장전 끝까지도 패널킥 찰 때까지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인생의 촛불이 꺼져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부처님께서도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관 밖으로 발을 쑥 내밀었잖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리고 또 다비를 다 하고 나서도 사리를 다 나줘가면서 정진하시잖는가. 부처님을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다 합친다고 해도 부처님 한 분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누구의 게송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살 인행시에 부사불을 보고 찬탄했던 게송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자 시절에 했던 게송이 천상천하무여불이다. 게송도 너무나 멋지다.
얼마나 멋지면 계속 대장경 속에서 계속 되뇌이고, 남방은 남방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부사불이 성불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천상천하무여불이라. 부처님 같은 분 없다고 찬탄했던 석가모니 부처님, 당신도 결국 그렇게 게송대로 됐다.
시행고행(示行苦行)하며
위령중생(爲令衆生)으로:모든 중생에게
낙적정법(樂寂靜法)하야:고요한 법을 좋아하고
증장선근고(增長善根故)로:선근을 증장케 하려고
시행고행(示行苦行)하며: 고행을 하시고
위제천세인(爲諸天世人)이: 또 제천세인이
제근미숙(諸根未熟)하야: 근기가 미숙이라. 근기가 미숙이는 안 좋다. 근성이 성숙하지 못한 이를
대시성숙고(待時成熟故)로: 때를 기다려서 성숙시키려고
시행고행(示行苦行)이:하는 까닭으로 고행을 하느니라.
시위십(是爲十)이니:이것이 열 가지니
보살(菩薩)이: 보살이
이차방편(以此方便)으로: 이 방편으로
조복일체중생(調伏一切衆生)이니라: 일체중생을 조복시키느니라.
(8) 菩薩의 成道
가. 菩薩의 往詣道場十種事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往詣道場에 有十種事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詣道場時에 照耀一切世界하며 詣道場時에 震動一切世界하며 詣道場時에 於一切世界에 普現其身하며 詣道場時에 覺悟一切菩薩과 及一切宿世同行衆生하며 詣道場時에 示現道場一切莊嚴하며 詣道場時에 隨諸衆生心之所欲하야 而爲現身種種威儀와 及菩提樹一切莊嚴하며 詣道場時에 現見十方一切如來하며 詣道場時에擧足下足에常入三昧하야 念念成佛하야 無有超隔하며 詣道場時에 一切天龍夜叉乾闥婆阿修羅迦樓羅緊那羅摩睺羅伽와 釋梵護世一切諸王이 各不相知호대 而興種種上妙供養하며 詣道場時에 以無礙智로 普觀一切諸佛如來가 於一切世界에 修菩薩行하야 而成正覺이 是爲十이니 菩薩이 以此敎化衆生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도량에 나아가는 데 열 가지 일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도량에 나아갈 적에 모든 세계를 밝게 비추며, 도량에 나아갈 적에 모든 세계를 진동시키느니라. 도량에 나아갈 적에 모든 세계에 두루 몸을 나타내며, 도량에 나아갈 적에 모든 보살과 지난 세상에 함께 수행하던 중생을 깨우치느니라. 도량에 나아갈 적에 도량의 모든 장엄을 나타내며, 도량에 나아갈 적에 모든 중생의 욕망을 따라 몸의 갖가지 위의와 보리수의 모든 장엄을 나타내느니라.
도량에 나아갈 적에 시방의 모든 여래를 분명히 보며, 도량에 나아갈 적에 발을 들거나 놓을 적마다 항상 삼매에 들어가서 잠깐잠깐 동안에 부처님을 이루되 뛰어 넘거나 막힘이 없느니라. 도량에 나아갈 적에 모든 천신과 용과 야차와 건달바와 아수라와 가루라와 긴나라와 마후라가와 제석과 범천왕과 사천왕과 일체 모든 왕이 각각 서로 알지 못하면서 갖가지 훌륭한 공양을 일으키느니라.
도량에 나아갈 적에 걸림 없는 지혜로 일체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모든 세계에서 보살의 행을 닦아 바른 깨달음을 이룸을 두루 보느니라. 이것이 열이니, 보살이 이것으로 중생을 교화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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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성도(成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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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왕예도량십종사(往詣道場十種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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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이 도를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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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왕예도량(往詣道場)에: 도량에 나아가는데
유십종사(有十種事)하니: 열 가지 일이 있으니
하등(何等)이:무엇이
위십(爲十)고:열 가지냐.
소위예도량시(所謂詣道場時)에:이른바 도량에 나아갈 때, 수행처에 나아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수행다운 수행에 나아갈 때는
조요일체세계(照耀一切世界)하며: 모든 세계를 밝게 비추고
예도량시(詣道場時)에: 도량에 나아갈 때는
진동일체세계(震動一切世界)하며:일체 세계를 감동시키고 예 도도량시에는 진동일체세계하며.
일체 세계를 왜 진동시키는가? 다 흔들어 깨우는가?
예도량시(詣道場時)에: 도량에 나아갈 때는, 자기 혼자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어일체세계(於一切世界)에:일체세계에는 누가 사는가? 일체 중생이 산다.
일체중생은 일체업과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세계’라면 ‘모든 업을 저지를 때’ 이 말이다.
모든 세계에
보현기신(普現其身)하며: 두루 몸을 나타내는데, 왜 두루 몸을 나타내느냐? 몸을 나타내는 것은 너무너무 자비롭기 때문에 그 사람 수준에 맞춰 주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다. 자기 혼자 얍삽하게 돌아서서 먹는 게 없다 이것이다.
예도량시(詣道場時)에: 예도량시에
각오일체보살(覺悟一切菩薩)과: 각오일체보살과 모든 보살과
급일체숙세동행중생(及一切宿世同行衆生)하며: 지난 세상과 일체 숙세의 함께 수행하던 중생을 깨우치며
예도량시(詣道場時)에: 도량에 나아갈 때에
시현도량일체장엄(示現道場一切莊嚴)하며: 도량의 모든 장엄을 나타내고, 여기서 장엄이라고 하는 것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고 존중을 하는 것이고 존경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능라주단이라고 가벼운 비단옷을 걸치든지 머리에 띠를 매든지 주단을, 무거운 비단을 밑에 깔든지 레드카펫을 깔고 하는 것이 장엄을 나타낸다.
단청을 하고 부처님 개금을 하고 도량청소를 하고 하는 것이 존중이고 존경이고 예의라고 했다.
그것은 회향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천수경 하나만 하더라도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場)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凉)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康)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모든 법문을 할 때마다 법회를 할 때마다 제일 처음이 뭐라 하는가?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법계도 맑히고 내 마음도 맑히고. 그리고 이제 들어가는 것이다.
예도량시(詣道場時)에: 도량에 나아갈 때
수제중생심지소욕(隨諸衆生心之所欲)하야: 중생들의 욕망에 따라 중생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고
이위현신종종위의(而爲現身種種威儀)와: 몸의 갖가지 위의와
급보리수일체장엄(及菩提樹一切莊嚴)하며:보리수의 장엄을 나타내고 보리수의 일체 장엄을 나타낸다.
이것도 세주묘엄품에 어떻게 나오는가?
땅이 장엄되고 보리수가 장엄되고 궁전이 장엄되고 사자좌가 장엄이 되고 이렇게 쭉쭉 순서대로 나오잖는가.
그 장엄이라고 하는 것도 세주묘엄품에 왜 장엄을 이렇게 해놨을까? 도량이라고 하는 것은 예의로서 의례로서 염불하는 소리도 염불이지만 염불의 염자는 뜻이잖은가.
지혜롭게 자비로움을 푹 담아서 염불을 해야 될 것이다.
예도량시(詣道場時)에:도량에 나아갈 때
현견시방일체여래(現見十方一切如來)하며 :시방의 모든 여래를 분명히 본다.
견불에 대해서 저 앞에 뭐라고 나왔는가?
염불을 해야 견불이 된다고 했다.
부처님을 생각해야 부처님을 볼 수가 있다.
입법계품 첫번째는 덕운해운선주승이 나온다.
덕운은 공덕의 구름이라고 해서 부처님 공덕을 상징한다.
해운은 해운 바다 해자 해서 법회를 법보를 상징한다.
선주비구는 잘 머무른다, 수행자는 어떻게 인생을 머무르는가?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으로 머무른다는 뜻이다.
불법승이 입법계품 처음에 나오는데 덕운비구를 선재동자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었잖은가.
그런데 너무 간절히 생각했기 때문에, 염했기 때문에 결국은 다른 쪽 산에서 서서히 경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염했기 때문에 견한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염불 다음에 견불이다. 그 견불도 수행의 지위에 따라서 예를 들어서 10지 초지에서 천불이 보였다면 10지 3지에서는 3천불이 보이고 4천불이 보이고 5천불이 보이고 계속 십지 십주를 설할 때 십행을 설할 때 십회향을 설할 때 십지를 설할 때 부처님의 숫자가 점차 늘어난다.
나무가 1년생에 과일이 달리는 수가 있고 10년생 가지에 달리는 수가 있다.
용문사 같은 데는 600년 된, 천년 된 은행나무 가지의 은행숫자가 어제아레 심었던 은행의 수하고 다르잖은가.
복숭아도 그렇다.
그런 것들이 아주 순리적으로 화엄경에 잘 되어 나오고 있다.
그런 이치를 같이 한 번 견줘봐야 책도 재미가 있고 ‘아 이거는 책이 아니고 화엄경은 그냥 내 사는 실상의 모습이구나.’ 주방에 가야 밥을 해먹지 식당에 가서 먹는 건 밥이 아니잖은가.
예도량시(詣道場時)에: 도량에 나아갈 때
거족하족(擧足下足)에: 발을 들어 놓거나 거족하족에.
이것도 저 뒤에 나온다.
입법계품 미가장자 부분에 거족하족이 나온다.
들어도 법이고 놓아도 법이고 당겨도 법이고 밀어도 법이다.
거족하족의
상입삼매(常入三昧)하야: 상입삼매라. 그래 상시삼매라 항상 삼매에 들어간다. 상시삼매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상입삼매라.
염념성불(念念成佛)하야: 염념성불에 잠깐잠깐에 부처를 이루되
무유초격(無有超隔)하며: 뛰어넘거나 막힘이 없으며 초격하지 않고
예도량시(詣道場時)에: 도랑에 나아갈 때
일체천룡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一切天龍夜叉乾闥婆阿修羅迦樓羅緊那羅摩睺羅伽)와: 모든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석범호세일체제왕(釋梵護世一切諸王)이: 제석과 범천왕과 사천왕과 모든 왕들이
각불상지(各不相知)호대:서로 알지 못하면서
이흥종종상묘공양(而興種種上妙供養)하며: 갖가지 훌륭한 공양을 일으키며
예도량시(詣道場時)에: 도량에 나아갈 적에
이무애지(以無礙智)로: 걸림없는 지혜로
보관일체제불여래(普觀一切諸佛如來)가: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어일체세계(於一切世界)에:일체 세계에
수보살행(修菩薩行)하야: 수보살행하고
이성정각(而成正覺)이:일체 모든 세계에서 모든 보살행을 닦아서 바른 깨달음을 이룸을 보느니라
시위십(是爲十)이니: 이것이 열 가지니
보살(菩薩)이:보살이
이차교화중생(以此敎化衆生)이니라 :이것으로 중생을 교화하느니라.
나. 菩薩의 坐道場時十種事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坐道場時에 有十種事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坐道場時에 種種震動一切世界하며 坐道場時에 平等照耀一切世界하며 坐道場時에 除滅一切諸惡趣苦하며 坐道場時에 令一切世界로 金剛所成이며 坐道場時에 普觀一切諸佛如來獅子之座하며 坐道場時에 心如虛空하야 無所分別하며 坐道場時에 隨其所應하야 現身威儀하며 坐道場時에 隨順安住金剛三昧하며 坐道場時에 受一切如來神力所持淸淨妙處하며 坐道場時에 自善根力으로 悉能加被一切衆生이 是爲十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도량에 앉을 때 열 가지 일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도량에 앉을 때에 갖가지로 모든 세계를 진동시키며, 도량에 앉을 때에 모든 세계를 평등하게 비추느니라. 도량에 앉을 때에 일체 모든 나쁜 길의 고통을 소멸하며, 도량에 앉을 때에 모든 세계가 금강으로 이루어지게 하느니라. 도량에 앉을 때에 일체 모든 부처님 여래의 사자좌를 널리 관찰하며, 도량에 앉을 때에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분별이 없느니라. 도량에 앉을 때에 마땅한 대로 몸의 위의(威儀)를 나타내며, 도량에 앉을 때에 금강삼매를 수순하여 편안히 머무느니라. 도량에 앉을 때에 모든 여래의 신통한 힘으로 유지되는 청정하고 묘한 곳을 받으며, 도량에 앉을 때에 자기의 착한 뿌리의 힘으로 모든 중생에게 가피하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
보살(菩薩)의 좌도량시십종사(坐道場時十種事)
*
불자(佛子)야:불자여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보살마하살이
좌도량시(坐道場時)에 :도량에 앉을 때는
유십종사(有十種事)하니: 열 가지 일이 있으니
하등(何等)이:무엇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인가?
소위좌도량시(所謂坐道場時)에: 소위 도량에 앉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종종진동일체세계(種種震動一切世界)하며: 갖가지 모든 세계를 진동시키고
좌도량시(坐道場時)에 : 도량에 앉을 때는
평등조요일체세계(平等照耀一切世界)하며:또 모든 세계를 평등하게 비추고
좌도량시(坐道場時)에:도량에 앉을 때는
제멸일체제악취고(除滅一切諸惡趣苦)하며:모든 나쁜 길의 고통을 멸하고
좌도량시(坐道場時)에: 도량에 앉을 때는
영일체세계(令一切世界)로:모든 세계가
금강소성(金剛所成)이며 :금강으로 이루어지게 하고
좌도량시(坐道場時)에 : 도량에 앉을 때는
보관일체제불여래사자지좌(普觀一切諸佛如來獅子之座)하며: 모든 부처님 여래의 사자좌를 널리 보며, 여기서 사자좌라 해놓고 해석해 놓은 것을 보면 모든 도량에 앉을 때를 말한다.
들짐승들이 사자 앞에서는 똥폼 못 잡는다. 그 사자라고 하는 것도 화엄경에서는 앞에 개 구(犭)자가 없다. 책에는 개 구(犭)자가 붙어 있는가? 원래 화엄경에는 전체에 한 글자도 안 붙어 있다. 사자좌를 널리 보며
좌도량시(坐道場時)에:도량에 앉을 때는
심여허공(心如虛空)하야: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무소분별(無所分別)하며:분별이 없으며
좌도량시(坐道場時)에:또 도량에 앉을 때, 다 똑같은 뜻이다.
수기소응(隨其所應)하야:딱 그게 응당한 바에 따라서
현신위의(現身威儀)하며: 그 몸의 위의를 나타내고
좌도량시(坐道場時)에:도량에 앉을 때는
수순안주금강삼매(隨順安住金剛三昧)하며: 수순안주 금강삼매라, 금강삼매경은 금강을 반야로 해석하고 금강반야경은 삼매로 해석을 한다. 흑돌 다 집어내면 검은돌만 남고 검은돌을 다 집어내면 흑돌만 남는다. 따라서 편안히 머물며
좌도량시(坐道場時)에 : 도량에 앉을 때는
수일체여래신력소지청정묘처(受一切如來神力所持淸淨妙處)하며 :모든 여래의 신통한 신력으로 유지되는 청정하고 묘한 것을 받으며
좌도량시(坐道場時)에:또 도량에 앉을 때는
자선근력(自善根力)으로 : 자기 선근의 힘으로
실능가피일체중생(悉能加被一切衆生)이 :모든 중생에게 가피하나니
시위십(是爲十)이니라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오늘은 여기까지 해서 마치겠다.
다음 달하고 그다음 달 해서 이세간품을 끝내도록 하겠다.
근념하셨다.
(죽비소리)
하강례
“건들지 않으면 본래로 고요하다.”
예고없이 갑작스럽게 큰스님께서 유튜브 시험 방송을 하시더니 컨디션이 되는 날 문득 하겠다고 하셨는데 4월 20일 월요일부터 이 글을 작성하는 금요일까지 5일간 연달아 법성게를 강의하셨다.
아침 8시 40분부터 9시 사이에 방송이 있는데 8시부터 모두 긴장하면서 시간을 맞추신다는 이야기들을 댓글로 남기셨다.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신다는 이야기부터 더군다나 새로 시작하신 법문이 법성게임에 모두가 놀라고 환희하셨다.
법성게를 종이에 가방에 손수건에 사경집에 노래에 영어 가사에 뿌리고 뿌려서 20년 전과 지금 사이에 알아듣는 말들이 많아졌다고 감격하는 말씀도 적었는데 금요일에 법문에서는 ‘법성게는 주문이다’ 라고 못박으셨다.
강의할 수 없으며 알아들을 수 없지만 분명 강력한 공덕이 있으니 많이 쓰고 많이 읽으라고 하셨다. 역대 조사스님이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로 준비하신 노래가 법성게인 이유라고 하셨다.
순서대로 녹취하고 싶었지만, 이번 달에는 그중에 이미 녹취를 한 제3강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강의 전문을 싣는다.
화엄경 3방 법성게 3강
2026년 4월 22일 수요일 (AM 8:45-9:02)
어서 오십시오. 오늘도 화엄경 법성게 한단락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진화님 “꿈만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꿈만 같습니다.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예.
이렇게 출석해서 여러분들 이름 뵙고, 이름 보니까 얼굴도 떠오르고 한 법당에 같이 한 것하고 똑같은 느낌입니다.
제가 요즘 방송 세 번째 하면서 법성게를 가지고 하는데 법성게를 가지고 벌써 두 번 이틀 했죠.
오늘 세 번째인데 이틀 해도 법성(法性),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그 한구절 기껏 조금, 그것도 부족한 대로 조금 설명하다가 말았습니다.
*
법(法)과 성(性) 분명히 저는 그렇게 나눠서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보면 법과 성이 원융합니다. 또 법과 성이 원융하면서 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뒤에 금방 증지소지비여경 그렇게 했어요.
우리는 하도 불교 공부를 많이 하고 하도 들어와서 뭐 가짜로 깨달았지만은, 그래도 어느 정도 깨달은 상태가 되고 뭐 가짜 지혜지만은 그래도 어느 정도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 되어 있어서, 그래서 ‘아, 법과 성이 원융하다. 두 모양이 없다. 그 사람 얼굴 보면 그 사람 마음 알 수 있다. 그 사람 인격도 알 수 있고 사람 됨됨이도 알 수가 있다.’ 뭐 이런 이야기까지 쭉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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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오늘은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인데요.
제법부동본래적. 일단 글자 해석부터 하면은 제법은 뭐라고? 모든 것, 앞에 법성 나왔는데 또 법(法)자가 나왔어요.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거니까 이 세상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법(法)자입니다. 법(法)자.
법(法)자가 세상을 한마디로 거론할 때 법(法)자로 거론해요. 그래서 법성이라고 했고 또 그다음에 제법부동본래적이라고 했습니다. 제법(諸法)은 모든 것이에요.
모든 것은 건들지 아니하면 본래로 고요하다.
부동은 뭡니까? 동(動) 자동도 있고 피동도 있습니다. 자기가 건들든지 남이, 다른 경계가 와서 나를 건들든지 어쨌든 건들지 아니하면은 건들지 아니하면은 어떻게? 본래적(本來寂) 본래로 고요합니다. 사람이 그렇고 사물이 그렇고 모든 인간사가 다 그렇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한쪽에서 침범하지 아니하면 그쪽에서도 가만히 있어요.
한쪽에서 침범하니까 이쪽에서 덤벼들지요.
어린아이도 지혼자 잘 놀도록 놔두면은 안 웁니다.
괜히 건들어 가지고 울게 만들어요. 야, 이게 신기한 이치입니다. 그래 부동은 ‘건들지 아니하면’ 이라고 제가 그렇게 해석해 봤습니다. 야, 근사하네요. 그렇게 해석해 놓고 나니까 아주 근사하고 좋아요. 건들지 아니하면, 남이 건들든지 자기 스스로 건들든지 아, 그러고 보니까 세상에 시끄러운 거 복잡한 거 이런 것들이 전부 건들어서 문제입니다. 건들어서.
안 건들면 조용해요. 본래적입니다. 본래부터 고요한 자리거든요. 아, 근사합니다.
이것도 사실은 깨달음의 지혜가 좀 있으면은 퍼뜩 알아들어요. 지혜가 있으면은 얼른 알아듣습니다. 근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니, 건들지 않아도 시끄럽기만 하더라’ 이럴 텐데 지혜로운 사람은 얼른 알아듣습니다.
모든 것들은 건들으니까 시끄럽지 건들지 아니하면 부동(不動) 건들지 아니하면 동(動)자가 건들다는 동자입니다. 건들지 아니하면은 본래로 고용하다. 아, 이거 우리 일상생활에 잘 적용하면 적용할 데가 많을 겁니다. 적용할 데가 아주 많을 거예요.
법성원융무이상도 적용을 해야 되고 제법부동본래적도 적용을 해야 되고. 하, 제법부동본래적.
그래서 그런 차원, 다시 말해서 지혜로운 사람의 통찰로 볼 때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일체가 다 끊어졌다.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름을 누가 지어 달래요? 뭐 소나무다, 감나무다 누가 지어 달래? 사람이 괜히 그렇게 지어 놓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게 서로 안 맞으면 거기에 또 문제가 생기고 그래서 무명무상절일체 본래는 다 그런 것이 끊어진 자리다. 지혜로운 사람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 그 자리 가지고 살아요. 그 자리.
지혜로운 사람은 무명무상절일체 자리에서 삽니다.
우리 불자들은 그런 자리를 많이 이렇게 듣고 또 거기에 대해서 이론적이지만은 공부를 그런대로 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짐작을 합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뭐라고?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
깨달음의 지혜로서 알 바고 다른 사람의 경계는 아니다. 다른
경계 아니다. 그럼 깨달음 지혜 지혜가 있어야 된다. 통찰력이 있어야 앞에서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 이 세상이 모두 그렇게 되어있음을, 지혜가 있는 사람이 그렇게 이해하고 알고, 그렇게 그런 자리에서 살아간다.
그 나머지 사람들의 경계는 아니다. 비여경 그랬잖아요.
증지라야 소지지 나머지 경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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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이 글을 쓴 사람은 경전을 결집한 분들도 세상살이를 설명하고 인생살이를 설명하려고 그렇게 의도를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상스님도 법성게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세상을 한번 설명해 보고 인생을 설명해 보고 깨어있는 사람 입장에서 깨어있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그런 두 가지 입장을 같이 하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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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여기까지 공부하고 조금씩 조금씩 음성이 풀려야 할 텐데 쉽게 안 풀립니다.
여기까지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그러나 그 내용은 하늘만치 바다와 같이 깊고도 넓고 심오하고 우리 세상과 인생을 다 통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깊이 사유하고 또 사유해서 그것이 우리 삶이 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유튜브 염화실TV-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생명의 깃발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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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예[도]도량(詣道場時)에: 도량에 나아갈 때는
현[현]시방일체여래(現見十方一切如來)하며 :시방의 모든 여래를 분명히 본다.
거족하족(擧足下足)에: 발을 들어 [놓고나]
도량에 앉을 때
좌도량시(坐道場時)에 :도[랑이 앉는 데는]
좌도량시(坐道場時)에:또 도[랑]에 앉을 때, 다 똑같은 뜻이다.
건[들어]
건드리다
건들다
@연기의 도리와 인생을 알고자 감사합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혜명화님~ 아침 생방송에서 그동안 공부한 표가 납니다요^^
어찌나 글을 빨리 잘올리시는지... 함께 공부하는 사람도 더 생기가 나고 좋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컴퓨터 앞에 있어서 베껴서 붙였어요^^~~
고맙습니다 ...생동감 있는 스케치에 다시 환희심 돋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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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