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구의 효용
임병식
가끔 차를 타고 지나다니는 길목에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전신주를 지탱하는 철사줄 한쪽에 낯선 기구가 매달려 있었다. 땅에서 1.5미터쯤 되는 높이였다. 모양은 마치 등갓을 거꾸로 매달아 놓은 듯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러다 어느 날 차를 세우고 한참 바라보게 되었다.
그제야 그 용도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이 깊어지자 풀이 무성해졌고, 그 사이로 칡넝쿨이 철사줄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아하, 이 용도였구나.'
칡넝쿨은 그 기구에 가로막혀 더 이상 위로 뻗지 못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제법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등갓처럼 생긴 기구에 닿은 칡순들이 그 안에서 서로 뒤엉켜 있었다. 마치 구덕에 담긴 게들이 먼저 기어오르려다 서로의 다리에 걸려 다시 밀려나는 모습 같았다.
칡넝쿨도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위로 오르려 하지만 결국 서로를 붙든 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 장치를 만든 사람의 발상에 감탄했다.
이 정도면 특허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은 크고 작은 발명품으로 가득하다. 바닷가 방파제의 테트라포드도, 거리의 보도블록도 누군가의 관찰과 생각 끝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살펴보니 그 기구는 위로 뻗어 오르는 식물이 일정한 각도 이상 몸을 세우지 못하도록 만든 구조였다.
구조는 단순했지만 효과는 놀라웠다.
가을이면 과수원이나 가로수 밑동에 볏짚을 둘러놓은 모습을 본다. 나무를 따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해충이 그 속에 알을 낳게 한 뒤, 봄이 오면 걷어내 소각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 또한 자연을 다루는 인간의 지혜다.
그러나 철사줄에 매달린 이 작은 기구는 조금 다른 방식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었다. 힘으로 제거하는 대신 자라나는 길목을 살짝 바꾸어 놓는 방법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칡넝쿨이 무성한 산림에도 이런 원리를 활용할 수는 없을까. 인력으로 제거하는 수고와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식물은 저마다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낸다. 칡넝쿨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그 끈질긴 생명력도 작은 장치 하나 앞에서는 방향을 잃는다.
철사줄에 매달린 그 기구는 칡넝쿨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앞에서 인간을 생각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언제나 큰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사소한 관찰 하나가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해답은 오히려 단순한 곳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칡넝쿨의 길을 바꾸어 놓은 작은 장치를 바라보며, 인간의 지혜 또한 아직 자라날 길이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2026)
첫댓글 전신주의 작은 기구 하나로 생명의 속성과 인간의 지혜를 관통해 낸,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힘을 지닌 글입니다.
청석님의 따뜻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이 문장마다 잘 녹아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전등갓처럼 생긴 간단한 기구가 뻗어오르는 칡넝쿨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의 번뜩이는 지혜가 감탄스러웠습니다.
문명은 편리함을 좇는 게으른 자의 지혜에서 발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전 담벽을 따라 설치된 주차장의 담벽에 까지 주차선을 표시하여 화제가 된 공무원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누구나 이용하며 보아온 주차장인데 아무도 그런 발상을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담벽에 주차선을 그어놓은 것도 참으로 참신한 발상이군요.
후진하면서 차선을 바로보는 효과가 있겠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