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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
화계사는 원래 부허동이라는 곳에 보덕암이라는 암자였으며, 현재 화계사 자리로 이전
하여 조선 중종 17년(1523년)에 신월대사가 창건하였다. 광해군 10년인 1618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다음 해에 도월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1866년 용선스님과 범운스님이 지은 건물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명부전의 지장
보살과 시왕은 특히 유명하다. 이 조각들은 고려 말엽의 나옹스님이 정교하게 깎은 작
품들로서, 1877년 조대비가 화계사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 뒤로 화계사는 고려 왕실의
원찰이 되었다.
화계사 대웅전 양쪽에는 유명한 큰 단지 둘이 있다. 이 단지들은 헌종(1834∼1849재위)
의 왕비인 홍대비가 기증한 것이다.
화계사는 숭산스님에 의해 시작된 관음국제선원의 산실로서 외국인 승려들과 불자들이
이곳에서 수행하고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에 둘러싸여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준다.
화계사는 조선왕조 때 국태민안을 빌던 왕가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
궁궐이라고 불려질 정도였다. 또한, 이곳 골짜기에 있는 오탁천약수로
대원군이 피부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 절에 머물렀기 때문에 대원군의
글씨를 비롯해서 그와의 인연이 많이 얽혀 있다.
화계사 일주문
중건비와 기념비
숭산 스님
1927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출생
1940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공립학교 졸업
1945 평양시 평안공업고등학교 졸업
1946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1947 마곡사 출가 득도
1949 고봉 선사로부터 수계 건당(1.25),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 수지(3.1)
1950 수덕사에서 하안거 이래 11안거 성만(4.15)
1951 마곡사에서 대교과 수료(9.2)
1952 육군 입대(12.3)
1957 육군 중위로 전역(7.20)
1958 화계사 주지로 취임(3.15)
효봉ㆍ동산ㆍ청담ㆍ경산 스님 등과 불교정화운동 추진
대한불교 조계종 종의회 구성, 종회의원 피선
1960 대한불교 신문사 설립, 초대사장 취임(5.3)
1961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취임(6.5)
군승(軍僧)제도 시행으로 젊은 층 신자 흡수, 신불교 포교시대 전개
1962 대한불교 조계종 비상종회의장 피선
비구ㆍ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초대 의장 피선.
승려의 기강 확립을 위한 감찰제도 설립, 초대 감찰부장 취임.
예비역 군 출신, 법조인으로 구성된 불교 지식인 단체 '달마회'조직
동국대학교 동국학원 재단상무이사 피선
대한불교 조계종 재무부장 취임
1964 한국 불교 최초로 승려 대학 교육 실시, 종비생 제도 실시
불교과, 인도철학과 포함 도제 양성, 역경, 포교 종단 3대 사업 확장
1966 일본 흥법원 개설, 초대원장 취임.(한ㆍ일 국교 정상화 이후 최초로 일본에 한국 사찰 건립)
한ㆍ일 불교 유학생 교류와 문화 교류를 일본 정부와 협의, 민간 외교에 지대한 공헌
군에불교ㆍ기독교ㆍ천주교 3대 종교의 동등한 헌법상의 종교 활동 자유 보장을 정부에 건의, 국회 국방의원회에서 심의 결정.(군법사 제도 확립)
1969 홍콩 홍법원 개설, 원장 취임
1972 미국 홍법원 개설, 원장 취임
1974 캐나다 토론토 선원 개설
1978 폴란드 바르샤바 홍법원 개설, 8개 선원 개설, 원장 취임
1980 영국 런던 선원 개설
1981 스페인 팔마 선원 개설
1982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서 재미 홍법원 개설 10주년 기념 "세계 평화 종교 지도자 대회" 개최
1983 브라질 상파울로 선원 개설
1985 프랑스 파리 선원 개설
세계평화문화인대회(WUM)에서 세계평화상 수상(5.13)
중국 북경 불교회 초청, 여러 고승들과의 법거량 통해 한국 선불교 위상 떨침
1986 구소련 정신문화협회 초청으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문화적ㆍ정신적 지도자들의 역사적 회합' 에 참가, 구소련 포교 여행
1987 수덕사 '제1차 세계일화대회' 개최
1988 폴란드 한국 선불교 포교 10주년 기념 행사 개최
1989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한국 선지식으로 최초로 포교 활동
1990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생존과 환경을 위한 국제대회' 에 종교분과위원으로 초청강연(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영접 받음)
대만에서 한국 선을 지도하고 포교
서울 화계사에서 국제선원 신축을 위한 불사 시작
수덕사에서 '제2차 세계일화대회' 개최
1992 중국 본토 육조 혜능 대사 남화사에서 승려와 일반인을 위한 참선 지도
홍콩 국제선원 개설
재미 홍법원 개설 20주년 기념 대회 개최
1993 싱가폴 국제선원 개설, 수덕사에서 '제3차 세계일화대회' 개최
1994 한국인 선지식으로는 최초로 베트남 방문(베트남 지도자급 승려들과 법거량)
1995 스리랑카, 미얀마 성지 순례 및 한국 선불교 포교 활동
1996 대한불교 조계종으로부터 '해외 포교 30주년' 감사패 전달받음(6.20)
2000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개원
2004년 11월 30일 화계사에서 세수77세 법납 57세로 원적에 들었습니다.
고봉 큰스님 추모탑
고봉 대선사는 1890년 9월 29일 경북 대구에서 태어 나셨다.
정혜사, 백운사, 건봉암 조실로 전법을 지도 하던 중 숭산행원선사를 법제자로 삼으셨다.
6.25 동란시 공주 마곡사 은적암에서 선회를 열어 선자를 거양하시고 이어 아산 봉곡사, 대전 복전암, 서울 미타사 조실로 계셨다.
1961년 8월 19일 세수 72세 법랍 51세에 삼각산 화계사에서 입적하셨다
화계사 전경
조실당
숭산 행원 큰스님께서 조석으로 거처하셨던 곳이다.
대원군과 화계사와의 인연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 여흥민씨는 외가의 원찰인 화계사를 자신의 원찰인 것처럼 자유롭게 출입을 하고 있었던 터라 대원군도 자연 이곳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화계사와 깊은 인연을 맺어 장차 왕업을 이루려는 꿈을 꾸게 되었으니 그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졌다.
어느 여름날 흥선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게 되었다. 서울에서 십리 길이라 화계동구에 도착하였을 때는 갈증이 몹시 심하였다. 그런데 절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웬 동자승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꿀물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기이하게 여긴 대원군은 그 연유를 물었고, 동자승은 그 일을 시킨 만인(萬印)스님에게 안내하였다. 만나서 차차 심금을 터놓게 되었는데 만인스님은 흥선대원군의 야심을 꿰뚫어 보고 있는지라 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도로부터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게 되었다.
만인스님은 인연의 도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탄식하고 자신이 불가(佛家)의 중죄인이 되어 업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나 시운(時運)이라 하며 그 방법을 일러주었다. 충청도 덕산(德山) 가야산의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니 남연군 묘소를 그리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대원군이 많은 돈을 마련하여 가야사를 찾아가 그 곳 주지를 매수하여 가야사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탑을 허물고 여러 형제들을 설득하여 그곳으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해 갔다. 그 후에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탄생하였으니, 스님의 말이 꼭 들어맞는 셈이었다.
사실여부야 따질 일이 아니지만 어떻든 이런 전설과 부합되는 흔적을 사적기나 현존 건물 및 대원군 친필의 여러 현판 글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명부전
명부전은 죽은 뒤 명부세계의 주인공인 지장보살과 좌우보처인 도명존자, 무독괴왕, 그리고 염라계의 십대왕과 사자들이 모셔져 있다. 현재의 건물은 맞은 배지붕의 익공계 건물로 1878년(고종 15)에 초암스님이 화주가 되어 조대비(趙大妃)의 도움으로 중건하였다.
이 명부전은 원래 황해도 백천군 강서사(江西寺)에 있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1877년에 옮겨와 봉안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당시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던 화계사에 왕명으로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모시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서사에 있던 이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선정되어 절에 봉안되게 되었다.
지장보살 후불탱화는 1815년에 그려졌고 시왕각부탱화는 1878년에 조성되었다.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봉안한 후에 새로 그려 모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명부전의 현판과 주련은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전한다. 과연 추사의 제자답게 추사체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어 무궁한 변화와 회화적 공간 구성이 돋보인다. 자학(字學)에 통달하지 않고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문자향(文字香)이 나타나 있다.
2001년 윤사월에 주지 성광스님이 명부전 내부 보수불사와 기와불사를 하였으며 지장보살 개금불사와 도명존자상, 무독귀왕상, 십대왕상을 비롯 판관 수문장상 등을 보수 불사하였다.
대웅전 삼존불상.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걔 건물로 1866년(고종 3)에 용선(龍善)스님과 초암(草庵)스님이 화주가 되어 중건한 것이다. 1870년 지리산인 환공야조(幻空冶兆)가 지은 화계사『 대웅보전중건기문』에 의하면 석수 30명, 목공 100명이 달려들어 불과 수개 월안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본존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이 대웅전의 삼존불상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석가모니불의 후불탱화는 1875년(고종 12)에 화산(華山)스님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다.
주불은 중품인을 하고 계시는 아미타 부처님이시고 관음대세지, 지국, 증장, 지록, 지장, 문수 보현, 가섭, 아난 등 십대제자, 다문 광목천왕을 좌우보처로 하고 있다.
대웅전의 현판 글씨는 근세의 명필인 몽인(夢人)정학교(丁鶴喬)의 필체이고, 주련의 글씨는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이다. 1986년 서울시의 지방 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성각
고종 22년 서기 1885년에 금산(錦山)스님이 산신각을 고쳐지었다. 건물이 쇄락하여 이를 헐고 주지 진암(眞菴)스님이 1975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건물에 동기와를 올린 것이 현존한다.
삼성각 내부
안에는 1973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그리고 산신탱화를 모셨다.
삼성각 벽화 십우도.
천불전 내부
천불오백성전
범종각
범종각에는 1898년 경상북도 풍기 희방사에서 옮겨온 대종과 목어, 북이 있다.
목어는 원래 고려때 창건된 보턱암에 있던 것이라고 전하는데 만지기만 하여도 나무 부스러기사 떨어질 듯 심하게 풍화되어 범종각 2층에 지붕천장에 매달려 있다. 대종은 명문에 의하여 주조연대가 1683년임을 알 수 있으며 무게는 300근이라고 하나, 현존하는 대종은 주지 진암(眞菴)스님이 무오(戊午 1978년)에 조성한 것이고 범종각은 1972년에 건립된 2층 육각의 건물이다
대적광전
1991년에 주지 정수스님에 의하여 조성된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포 4층 건물이다. 1층은 공양간, 2층은 요사, 3층은 대적광전 법당, 4층은 국제선원 선방으로 사용한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노사나, 삼존불을 본존으로 하고 관음, 대세지, 보현, 문수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삼존불의 뒷면에는 각각의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그 위로는 닫집을 마련하였다. 그 외에 지장 보살상과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원래 대적광전의 부처님들은 대웅전 부처님과 등을 대고 있었다. 1998년 상단에서 일어난 부분적인 화재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상단을 모셨다. 부처님들과 협시보살님은 1991년에 모신 부처님과 협시 보살님이 탱화와 닫집은 1998년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보하루
대웅전 아래 공자형(工字形)의 큰방이 있는데 이것이 현재 요사와 종무소로 쓰이고 있는 보화루(寶華樓)이다.
이 큰방 뒤의 마루에서 대웅전을 향해 예배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은 것이 서울 주변 왕실 원찰의 공통된 조영방식이다.
보화루의 현판글씨는 추사의 수제자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0 ~1898)가 쓴 것이다.
대적광전 내부
첫댓글 가끔 가서 철야정진 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자유스러워서 마음내기 좋았구요. 밤12시 30분에 먹던 깨죽이 생각납니다. ^^ 담엔 지장전을 꼭 들러봐야겠군요.
화계사는 제가 77년 처음으로 불교를 접하면서 학생회 첫발을 디딘 참으로 인연 깊은 사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