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부처님 아들의 이름을 '속박'이라 작명한 까닭?
싯다르타의 부인은 몇이나 됐을까. 우리는 싯다르타의 부인이 야소다라이며,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라훌라라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카필라 왕국을 계승할 왕자였고, 더구나 외아들이었다. 싯다르타는 계절에 따라 궁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불본행집경』에는 제1궁에 야소다라, 제2궁에 마노다라, 제3궁에 구다미란 여인이 살았다고 적혀 있다. 또 다른 경전 『십이유경(十二遊經)』에도 싯다르타의 부인이 셋으로 기록돼 있다. 그래도 자식을 낳은 여인은 야소다라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2600년 전 인도의 카필라 왕국은 고대 부족국가였다. 샤카족은 근친혼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싯다르타가 왕자비로 맞아들인 야소다라는 남이 아니었다. 친고모의 딸이었다. 싯다르타의 아버지 숫도다나 왕에게는 아미타라는 누이가 있었다. 그녀는 이웃 나라인 꼴리아족에게 시집을 갔다. 싯다르타가 결혼한 꼴리아족 여인 야소다라는 다름 아닌 아미타의 딸이었다.
인도의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 화장과 치장이 무척 화려하다. 2600년 전 고대 인도의 여성의 치장을 짐작할 수 있다.
네팔에 있는 카필라 성을 순례할 때였다. 그곳에서 나는 ‘야소다라의 생애’를 떠올렸다. 붓다의 여인, 야소다라. 2600년 전, 그녀는 바로 이곳에서 살았다. 싯다르타의 팔짱을 낀 채 저 오솔길을 걷고, 갓난 라훌라를 안고서 바로 이 벽돌길을 오갔으리라.
야소다라의 삶은 드라마틱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연민의 정이 있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 야소다라가 아들을 낳자마자 싯다르타는 출가를 했다.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가장이다. 아무리 지혜로운 여인이라해도 고개가 끄덕여졌을까. 핏덩이 같은 자식을 낳자마자 남편이 집을 나가버렸으니 말이다. 더구나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돼버렸다. 야소다라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지 않았을까.
훗날 하나뿐인 아들 라훌라도 붓다를 따라 출가한다. 나중에는 카필라 왕국마저 이웃 나라의 침략에 멸망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야소다라는 머리를 깎고 붓다의 승가로 출가를 한다. 팔리어 경전에는 그녀가 결국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이 됐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니 야소다라의 생애도 참 파란만장했다.
인도 델리박물관에 있는 석가모니 조각상.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이 설법을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나는 궁금했다. 싯다르타는 왜 출가를 했을까. 그는 무엇에 목이 말랐을까. 무엇이기에 그토록 절박했을까. 야소다라의 가슴에 남는 피멍과 라훌라가 성장하며 감당할 ‘거대한 원망’을 싯다르타는 내다보지 못했을까.
싯다르타는 심지어 야소다라가 아기를 낳았을 때 “라훌라자토(Rahulajato) 반다낭 자땅”이라고 말했다. “속박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 소식을 들은 숫도다나 왕은 손자의 이름을 아예‘라훌라’라고 지어버렸다. 라훌라는 ‘속박’ 혹은 ‘구속’이란 뜻이다.
싯다르타의 출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갓난 아들이었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집을 떠났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수행자가 됐다. 왜 그랬을까. 왕위도, 처자식도, 양어머니도, 아버지의 기대도 떨쳐버리고 그는 대체 어떠한 길을 가고자 한 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카필라 성의 동ㆍ서ㆍ남ㆍ북, 네 성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른바 ‘사문유관(四門遊觀)’이다. 단순한 문(門)이 아니다. 인간의 삶, 거기서 피어나는 온갖 고통의 풍경을 싯다르타는 이 문을 통해 정면으로 마주했다. 네 성문은 삶의 바닥을 직시하게 하는 통로였다. 나는 카필라 성의 성문들을 하나씩 찾아갔다. 당시의 성문은 없지만, 흔적은 남아 있었다.
인도 델리박물관에 있는 조각상. 카필라 성을 나선 싯다르타 왕자가 장례식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백성호 기자
싯다르타 왕자는 주로 성안에서 생활했다. 바깥출입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카필라 성의 동문 바깥으로 나갔다. 거기서 싯다르타는 한 노인을 목격했다. 하얗게 센 머리에 구부정한 허리, 이빨은 왕창 빠져 있고 걸음을 옮기는 일조차 힘겨워했다. 싯다르타가 시종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저런가?”
“늙어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저런 늙음을 겪게 되나? 나도 그런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거기에는 귀한 이와 천한 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제야 싯다르타는 깨달았다. 팽팽한 피부, 풋풋한 젊음, 솟구치는 혈기가 얼만 안가 무너지는 것임을 말이다. 우리가 누리는 푸름은 영원한 푸름이 아니다. 봄이 영원한 봄이 아니고, 여름이 영원한 여름이 아니듯이 말이다. 청춘도 그렇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삶의 시듦’을 봤다.
또 하루는 성의 남문으로 나갔다. 거기서 병든 사람을 보았다. 시종은 말했다.
“누구나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아무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출가한 싯다르타 왕자가 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싯다르타는 또 충격을 받았다. 늙는 것도 서글픈데, 병에 걸려 육신의 고통까지 감당해야 한다. 인간의 숙명이란 이 얼마나 힘겨운가.
성의 서문으로 나갔을 때는 장례 행렬과 마주쳤다. 사람들은 시신을 들것에 싣고 화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바 ‘죽음’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은 밟아야 하는 삶의 마침표다. 그게 죽음이다. 사라짐이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며 평생 살아온 사람들이 처음으로 겪게 되는 ‘나의 없어짐’이다. 그래서 두렵고, 그래서 겁이 난다. 그런데도 피할 수가 없다.
동문과 남문, 그리고 서문에서 싯다르타는 ‘절망’과 만났다. 그에게 삶이란 그저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폭주 기관차에 불과했으리라. 분명히 끝이 있고, 거기서 추락해야 하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달릴 수밖에 없는 절망의 기관차 말이다.
싯다르타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게 삶이라면 왜 살아야 할까. 시들 수밖에 없는 꽃이라면, 왜 굳이 피어나야 할까. 저물 수밖에 없는 태양이라면, 왜 떠올라야 할까. 무엇을 위해 꽃이 피고, 무엇을 위해 해가 뜨고, 무엇을 위해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걸까.’ 그는 이런 물음을 수도 없이 던지지 않았을까.
인도 북부의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간다라 불상. 인도 문화와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융합이 엿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인도에는 길 위에서 살아가는 수행자들이 많다. 순례길에도 종종 마주친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성의 북문으로 나갔다. 거기서 그는 낯선 사람을 만났다. 발우를 들고서 땅만 바라보며 걷고 있는 수행자였다. 당시 인도에는 온갖 종류의 고행과 요가와 명상을 하는 수행자들이 많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집을 떠나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마음을 다스려 영원히 번뇌를 끊고자 합니다. 출가는 그걸 위함입니다. 수행자는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사랑하고 괴롭히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오직 이치에 따라 살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듣고서 싯다르타는 가슴이 뻥 뚫렸다. 아무런 출구도 없는 삶, 사방이 꽉 막힌 벽. 거기에 느닷없이 창(窓)이 생겼다. 그리고 바람이 들어왔다. 싯다르타의 심정도 그랬다.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서,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게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수행자는 연어처럼 숙명의 강물을 거스르고 있었다. 역동적으로 꼬리를 흔들며 삶의 유속(流速)에 맞서고 있었다. ‘이 모든 고통과 이 모든 허무함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소리치며 말이다.
설법하는 부처님의 모습을 그린 고대 인도의 조각상. 법상에 앉은 부처님이 가부좌를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싯다르타에게는 분명한 과녁이 있었다. 그것은 생로병사라는 삶의 궤도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다. 출가의 뜻을 밝히자 아버지 숫도다나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항변했다.
“아버지, 제게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 그럼 저는 출가를 포기하겠습니다.”
왕은 “그런 길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출가를 하겠습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길. 세상에 그런 길이 있을까. 그러니 싯다르타가 가고자 하는 길은 ‘길 없는 길’이었다. 그의 앞에는 아무런 발자국도 나 있지 않았다. 어떠한 이정표도 없었다. 바닥없는 바닥을 밟고, 방향 없는 방향을 잡아야 했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그 길을 택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이 거대한 삶의 허무를 향해 그는 도전장을 던졌다. 그가 출가하던 날은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 지 겨우 7일째 되던 밤이었다.
말을 타고 마부 찬나와 함께 카필라 성을 나서 출가하고 있는 싯다르타 왕자. 인도 산치 대탑 앞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이다. 백성호 기자
인도의 평원으로 떨어지는 해는 무척 아름답다. 카필라 성에도 해가 떨어졌다. 어둑어둑해졌다. 2600년 전, 싯다르타는 이런 어둠을 뚫고서 성문을 나갔을 터이다. 그 문은 동쪽 문이었다. 나는 동문이 있던 자리로 가서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 어둠 속으로 싯다르타의 뒷모습이 멀어졌겠지.’ 후세의 사람들은 그런 싯다르타의 출가를 ‘마하비닛카마나(Mahabhinikkhamana)’라고 부른다. 그건 ‘위대한 포기’라는 뜻이다. 싯다르타의 출가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에서는 무엇이 ‘위대한 포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