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통신 #35 #성주간 월요일 (3월 29일)
성주간 월요일 저녁, 여러분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흐린 날씨와 자욱한 미세먼지가 겹친 날이었습니다.
사목단은 아침 성찬례로 성주간을 시작하고, 바로 이어서 대성당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습니다.
교우들도 몇 분 참여하셨습니다.
사목단만 쓸쓸하게 드렸던 작년과는 좀 달라서 참 고마웠습니다.
성 수요일까지 아침 미사 직후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칩니다.
성주간은 주님을 수난의 길로 재촉합니다.
오늘 전례 독서에는 지금까지 독서보다도 더 안타까운 대비가 드러납니다.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는 자비롭고 정의로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상한 갈대라고 하여 잘라버리지 않고, 등불의 심지가 시원찮다고 꺼버리지 않는’ 자비로움이 드러납니다.
다만, 신앙인은 세상에 정의를 세우라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어떻게 응답할지 늘 고민해야 합니다(이사 42:1-9).
시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기대어 신뢰하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오만한 자와 불의한 자들은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복음에서는 이런 대비가 더욱 뚜렷합니다(요한 12:1-11).
따뜻한 환대와 존중이 펼쳐지는가 하면, 냉혹한 계산과 힐난, 그리고 생명을 빼앗으려는 음모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수난을 향한 길목에서 친밀한 인연을 기억하셨지요.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의 집입니다.
이 집은 아름다운 환대의 향기로 넘쳐납니다.
감사의 기억을 잊지 않고, 서로 찾고 존중하는 일은 참으로 향기롭습니다.
이 집을 채운 극진한 감사와 환대의 향기는 부활의 향기로 피어오르게 되겠지요.
그들이 아낌없이 부은 ‘향유’는 신앙인이 실천하는 ‘거룩한 허비’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한편, 가리옷 사람 유다는 값비싼 것을 허비하고 있다며 이 집의 행동을 격하하고 비난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말은 갸륵하고 정의롭게 들립니다.
그런데 그 뒤에 다른 속셈이 있습니다.
입바른 명분만을 주장하는 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좋은 말을 주워섬긴다고 다 들을 말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른 속셈이 없이 투명해야 합니다.
특히, 사람을 악담하거나 모함하거나 해치는 일이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신앙인의 입과 귀가 칭찬보다도 악담을 담거나 그에 솔깃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편이 줄어든다면서, 예수님으로도 모자라 라자로까지 해치려는 무서운 생각이 파고듭니다.
몸과 마음, 입과 귀를 조심스럽게 단속하지 않으면, 언제 빠져들지 모르는 유혹입니다.
이 장면은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그런 유혹으로 서서히 미끄러지는 나약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성주간은 인간의 이중성을 다시 되새기는 시기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빠져드는 자신의 죄, 공동체의 죄, 사회의 죄를 분별하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그 기도와 성찰이 우리를 향기롭게 합니다.
복된 향기가 흘러드는 성주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주임사제 주낙현 요셉 신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