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루카 11,42-46
이태리에서 공부하는 한국의 신부들은 언어의 장벽을 누구나 체험하게 됩니다.
일단 이태리어는 한국말과 어순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흔히 공부해 온 영어와는 달리 동사 변화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한 동사에 6가지의 변화가 있는데, 이 동사 변화는 시제마다 제각각 다릅니다.
예를 들면 현재, 과거, 과거 완료, 미래, 미래 완료 등등 시제가 바뀔 때 마다
저마다 다른 6개의 동사변형을 갖게 됩니다.
한마디로 동사의 쓰임새마다 50개 이상의 변화가 생기는 셈입니다.
언어구조가 이렇다보니 처음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한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교수님의 말은 너무 빠르고 강의록의 양은 하염없습니다.
그 와중에 각종 레포트와 발표가 쏟아지니 그야말로 다른 서구권 학생들에 비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서구권 언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은 어순체계가 같고 단어도 비슷해
훨씬 빨리 언어를 습득하지만
이에 반해 한국인들은 언어를 체득하는데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교수님의 얼굴을 마주보고 치르는 구술 시험이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작 시험에 들어가면 한국 신부들이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언어가 조금 부족할지라도 그만큼 노력하기 때문이며
대충 비슷한 말로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한 단어를 잘 정리해 논리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에 가장 오래 앉아 있는 학생들도,
정확히 수업 시간을 지키며 앞자리에 앉아있는 학생들도 한국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외국 교수님들은 한국인들은 언제나 성실하고 열심히 한다며 높이 평가해 줍니다.
이처럼 얼마나 성실히 공부를 했는가는, 문법이 아닌 용어의 사용과 평소의 행실에서
잘 드러나는 셈입니다.
출발점과 조건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에 대한 노력에 따라 평가 받는 것.
저는 이것을 “평등” 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외국인 신부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다소 불평등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말도 훨씬 잘 하고 이해력도 빠른데 한국인 신부들보다 점수가 낮은 것을
처음에는 다소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도 점차 한국인들의 성실함을 인정하게 되고,
결국 그들이 먼저 다가와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 안에서,
자기의 소출과 수입의 십분의 일을 꾸준히 바쳤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신앙은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강했고 지식도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에 비하면 신앙의 출발선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교만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하느님께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드러내고
자랑하는데 급급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랑의 실천에는 무디고 그저 남들보다 자신들이 더욱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교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항상 거만했으며
다른 이들에게 일을 종용할 뿐 모범을 보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 너희 율법 학자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이들에 비해 한참 나중에 출발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죄인들과 병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도 낮고 지식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힘입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만큼의 노력을 더 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들 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그 공로를 인정받는 것은 평등함의 측면에서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점차 성장하고 결국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1독서에서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결국 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주제는 “평등함”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조금은 두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출발점과 개인의 조건은 모두 무시되고 각자의 자리에서의 행실을
정확하게 평가받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선을 실천하는 이들이라면,
이 두려움은 의로움 혹은 자비로 치환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행실을 모두 알고 계시며 이에 대한 보답을 해주시는
정의롭고 공평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서의 불평등, 정의롭지 않음은 한낱 일시적인 인간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일 앞에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오로 사도가 독서의 말미에서 이야기 하듯,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바로 우리를 돌보시는 지혜로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항구한 마음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따를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 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