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렌초 디 비치(Lorenzo di Bicci) / 성 마르코( St Mark)
성 마르코(Mark) 복음사가
마르코는 '비추이다’란 뜻이다. 마르코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의 대부분은 신약 성서에 직접 의거한 것이다. 그는 보통 사도행전 12장 12절에 나오는 마르코와 동일시된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그는 마르코의 어머니 집으로 갔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첫 번째 전교 여행에 그를 데리고 갔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르코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바오로가 바르나바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의 전교 여행에 마르코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르코가 바오로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중에 바오로는 마르코에게 감옥으로 자기를 찾아오라고 청했다. 따라서 그들의 불화는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은 것 같다.
4복음서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짧은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파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음을 강조한다. 아마도 로마에서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해 기원 60년과 70년 사이, 베드로와 바오로가 죽은 다음에 씌어졌다. 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베드로는 마르코를 '나의 아들’이라 불렀다) 고유한 인물이고 다른 등장인물은 대부분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들)와 안티오키아 교회 (대부분이 이방인들)사람들이다.
마르코는 다른 복음 사가인 루가처럼 12사도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어떤 학자들은 그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체포를 이야기 할 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가 예수를 따라가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르코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첫 번째 주교였다고 한다. 성 마르코 광장으로 유명한 베니스는 마르코가 그곳의 수호성인이라고 한다. 그곳에 있는 웅장한 대성당은 그의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고 전해 진다.

카르파초(Vittore Carpaccio) / 성 마르코의 사자(, The Lion of St Mark)
날개 달린 사자는 마르코의 상징이다. 사자는 마르코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1,3)로 세례자 요한을 묘사한 데서 나왔다. 예술가들이 이 소리를 포효하는 사자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날개는 에제키엘이 날개 달린 네 마리 생물을 환시로 본 것을 복음사가들에게 적용 시킨데서 유래된 것이다.
마르코는 일생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소명, 즉 구원의 원천인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특별히 마르코의 방법은 글로 쓰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음악이나 연극, 시 또는 가족들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침으로써 복음을 선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는 다른 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은 별로 없다. 고유한 구절이 넷 있는데 그 구절 가운데 하나는 다음의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마르 4,26-29)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 성 마르코 복음사가
성 마르코(Mark) 복음사가
요한 마르코라고도 불리우는(사도 12,12.25;15,37) 마르코 사가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한 예루살렘의 가정 출신인데, 그는 초대교인들에게 자신의 집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 장본인이다(사도2,12-16).
이 집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도 제공되어 최후의 만찬이 이 집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마르코는 성 바오로의 첫 번째 선교여행에 동반했었는데(사도 12,25;13,5) 바오로 사도의 정열적인 활동에 별로 합세하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혼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는데(사도 13,13) 바오로 사도의 제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마르코에 대한 의견차로 격심한 토론을 하였다(사도 15,39-40). 마르코는 후에 베드로를 로마에 동반하여 베드로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를 돌보았으며(골로 4,10) 후에는 또 다시 바오로를 섬기며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 그의 뒷바라지를 하였다(2디모 4,11).
마르코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의 직접적인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오늘날 세상에 예수님을 소개하기위해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는데 그 질문이란 "그는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마르코에 의한 복음은 아주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쓰여진 것이다. 병자를 치유하며(1,31), 용서를 베풀고(2,10), 악령들을 쫓아내시던 당당한 모습(1,24-11.23;5,7)과 사람들이 그분을 조롱하며 (5,40;6,2;15,29-32) 그분을 없애버리려고 하는(3,6;12,13;14,1) 아주 대조적인 모습으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러한 대립은 제자들 사이에서도(4,13) 예수님의 가정 안에서도 있었음을(3,20-35) 서슴없이 털어놓는다. 그는 이러한 대립들을 부활의 신비로써(16장)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며 (8,31;9,31;10,33), 이런 대립은 모든 크리스찬에게 또 다시 반복됨을 역설한다(8,34;9,35;10,24-39). 수치를 당하고 증오를 받았으며, 고통 받다가 십자가형에 처해진 메시아를 보여주는 이 복음은 결국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는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을 가능케 한다.
마르코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에 대해 가장 관심을 보이는 복음사가이다. 그리스도를 팔아버리는 것과 형제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거부하는 행위는 우리들의 최후의 만찬인 성체성사 후에 우리도 수없이 범하게 되는 배반이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파올로 베로네세 / 성 마르코 복음사가
성 마르코(Mark) 복음사가
사도행전 (12, 6-18)에 의하면 헤로데 아그리파 왕의 박해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성 베드로는 어느 날 밤 두 천사의 힘으로 기묘하게 옥에서 구출된 후 마르코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머무르다가 원수들을 피하기 위해 다시 로마로 출발했다.
여기서 마르코라고 불리는 요한은 복음사가(史家)로서 유명한 성 마르코이다. 성 베드로, 성 바오로가 각각 시몬과 사울이라는 유다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마르코도 유다식으로 요한이라고 불렸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 잘 알려진 바는 없지만 성서에 예루살렘의 예비 신자들이 주로 그녀의 집에 모여기도와 마사 참여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앙심이 깊은 신자로 아마 넓은 저택을 갖고 있던 부유한 과부였던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아들인 요한 마르코는 어머니의 훌륭한 표양과 훈육을 받아 경건하고도 독실한 청년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령 강림 날에 성 베드로에게 영세한 3천명의 신자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한다. 베드로는 마르코를 유난히 아꼈다. 이는 대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의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끝머리에 그를 '내 아들’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실제로 마르코는 사도적 정신의 열정으로 보아도 성 베드로의 아들이라 불리 울 가치가 있었다. 처음 그는 성 바르나바와 같이 성 바오로를 따라 제1차 전도 여행을 떠났으나, 도중에 어떤 사정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곧 다시 바르나바와 같이 키프로스 섬에 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했다.
그 후 마르코는 로마에 가서 성 베드로를 도와 교회의 발전에 진력했다. 그가 신자들의 희망에 의해 성 베드로의 설교를 자료 삼아 간단명료하고 강력한 필치로써 복음서를 저술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주님의 공생활 3년 동안 밤낮으로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친히 거룩한 감화와 교육을 받은 성 베드로가 사랑하는 주님을 사모하는 줄거리는 마르코의 소박한 필적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복음서야말로 세상 끝나는 날까지 불멸의 빛을 발하는 대 금자탑의 하나로서 필자 마르코의 공적도 영구히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양위 사도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곳의 주교로서 은사 성 베드로의 정신을 따라 사람들을 인도하며 교회를 상당히 발전시키던 중에 그도 동양에서 자기 피로써 성스러운 신앙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부임한지 불과 10년도 못되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의인들은 그를 체포하여 목에 줄을 매어 읍내를 돌게 하고 마침내 참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순교의 최후에도 성 베드로의 제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지금 두 성인께서는 천국에서 영복을 누리고 계실 것이다. 성 마르코의 유해는 후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옮겨져, 유명한 성 마르코 대 성당에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서양 각국에서는 성 마르코 축일에 풍년 기원제를 행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오래된 행사로 그의 시초는 이교인들이 서리(霜)의 신에게 오곡 성숙을 기원하는 제사에 대항하여 시작된 그리스도교적 행사이다. 그 뒤 잠시 중지되었으나 그레고리오 1세 교황 치하에 부활되었고 날이 갈수록 발전되어 오늘에 이른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