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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은교는 관능적이다. 그는 내 불안한 과거 속에 머물러 있으며, 또 가능성으로 무작정 열려 있다. 은교는 건강하다. 위험하다. 어리다. 나를 위협한다. 지켜야 한다. 빼앗길 수 없다. 버려야 한다. 잃을 수는 없다. 그를 사랑한다. 내 일생의 명성과 도덕을 한 순간에 허물어뜨릴 강력한 팜므파탈, 그는 내 안에서 걸어 나왔다. 은교는 어려서 관능적이다. 생명의 기운을 흠뻑 발산하며, 나를 잠식한다.”
70세 노인과 17세 소녀의 성애(性愛)를 다룬 작품인 ‘은교’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노인이 기껏해야 자신의 손녀뻘의 아이에게 이성애를 느끼고,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나 더 나아가 생물학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어떤 일탈행위로 비춰지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가치를 판단하고 진실의 무게를 가늠하는 과정에서 다분히 폭력적인 사유구조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감정이란 사회적 검열 이전에 들끓는 욕망과 정서적 감응, 이성적 사고의 영역이 뭉쳐져 있는 복합적인 구조물로 존재하며, 언제·어디서든 폭발하여 뭉개지고, 흘러내릴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교’는 바로 욕망하는 존재로써의 인간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물론 텍스트로써 ‘은교’를 도덕적으로 가늠할 필요는 없다. 종교가 도덕을 지향하며, 학문이 도덕을 검증한다면, 예술은 궁극적으로 도덕의 확장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반(反)도덕(非가 아닌)을 지향한다.
‘은교’를 구성하고 있는 욕망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서는 원작인, 문학작품으로써 ‘은교’와 그것을 각색한 2차 저작물로써 ‘은교’를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욕망하는 주체인 이적요와, 서우진, 은교는 모두 박범신이라는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했으며, 작가의 의도와 욕망이 생생하게 조직된 작품이 바로 소설 ‘은교’이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을 영상화하는 리메이크(remake)의 관건은 바로 원작의 밑바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현해내며, 동시에 개성적으로 재해석해내는 가에 있다. 원작의 모방이라는 사실적인 측면과 함께, 독창적 재해석이라는 창작적 측면이 균형을 이뤄야 재창작물을 풍성하고 입체감있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원작은 그것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는 재창작물의 굴레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재창작물이 작품의 미적인 구현보다는 원작의 모방 혹은 재현에 무게 중심을 둬야 하는 태생적인 문제점 때문이다. 사실 영화 ‘은교’는 소설 ‘은교’에서 큰 줄기를 따왔지만, 서로 별개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원작의 원형을 변형 혹은 훼손하였다.
영화와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나이가 고희(古稀)에 이른 시인 이적요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화의 영웅이자, 젊을 적 10년간의 옥살이의 고초를 겪기도 한 국민시인이다. 그는 시외곽에 있는 전원주택에서 홀로 사는데, 제자이자 스릴러 계통의 대중소설을 쓰는 인기작가 서지우가 그를 물심양면으로 모시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며, 오히려 닮고 배워야 할 모습으로 세인(世人)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사실은 재능이 없는 서지우에게 이적요가 대신 작품을 써주는 형편이었다. 이제 삶의 너머를 적요(寂寥)히 응시하며, 죽음을 기다리던 이적요 앞에 은교라는 관능적인 17세 소녀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야기된다. 이적요는 은교에게서 강렬한 생의 충동을 느끼며, 서지우 또한 은교와 이적요 사이에서 갈등과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적요, 서지우, 은교 사이에 삼각관계가 형성되며, 질투와 분노를 이기지 못한 이적요가 제자 서지우를 살해한다는 것이 작품의 큰 줄기이다.
영화는 소설에서 대부분의 이야기를 빌려 왔으며, 활자화 된 내용을 영상으로 생생하게 묘사해 내었다. 사실 원작인 소설이 육체의 관능적인 묘사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기에, 필자 또한 영상물로 만든 은교가 무척 기대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영화도 큰 이질감 없이 원작의 공간과 인물들을 구성해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극 전개의 개연성을 위해 인물의 성격을 변경하고, 사건의 전개에 있어서 원작의 중요한 부분을 누락하면서, 원작과 재창작물이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다는 실망감이 가장 컸다. 재창작물인 영화는 은교의 육체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전체적인 전개가 결말 부분의 성애(性愛)를 위해 작위적으로 구성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독자의 무궁무구진한 상상력을 통해 바라본 소설 작품과, 감독이 제작적으로 선별한 화면을 통해 바라본 작품이 꼭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원작이 주는 가장 본질적인 메시지를 놓치는(혹은 의도적으로 배제해버린)순간, 작품은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설 ‘은교’는 대중소설의 한 양식인 추리소설, 스릴러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시인 이적요가 죽으면서 남긴 유서를 읽는, 서간체 형식으로 서지우의 죽음과 신비스런 은교의 모습을 재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는 바로 평생 순수문학인 시를 써서 문학적 일가견을 이룬 시인 이적요가, 한편으론 몰래 대중소설과 에세이, 단편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전개 과정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작가 박범신의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적요는 능력과 재능은 없지만 열정과 성실함만 가진 제자 서지우에게 자신이 쓴 소설을 내주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 버린다. 이적요의 욕망과 본능, 리비도를 수용하고 표상하는 대상 서지우는 바로 이적요 스스로라고 봐도 큰 오류는 아니다. 노령의 작가가 돌이켜 볼 때, 재능은 없지만 욕망만 가득한 서지우였던 과거와, 권위는 있지만 욕망과 열정 없이 껍데기 같은 삶을 사는 현재의 모습이 '지금'에 나란히 놓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젊은 이적요 서지우와, 현실의 이적요가 충돌하며 생기는 에너지가 작품의 첫 번째 줄기이고, 다시 은교라는 아이로 극화되는 것이 두 번째 줄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필자가 감히 평가할 때, 소설 ‘은교’도 썩 좋은 작품이라고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삼각구도 갈등에서 이루어지는 뻔 한 갈등과, 결말은 소설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며, 우연적인 전개를 남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적요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와 달리 서지우와 은교는 생명성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다소 이적요를 위한 들러리라는 생각까지 들었기에 원작 '은교' 우수한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작품이 여러 부분에서 미흡한 이유라면 바로, 시인 이적요에게 투영된 작가 박범신의 직접적인 욕망과 애착에서 찾고자 한다. 문학과 예술은 어떠한 방식이라도 ‘화자’를 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작가의 이야기를 배제하고는 논의 될 수 없을 것이다. 즉 여러 형식으로 숨기고 변형하여도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것이 예술작품에 내재된 숙명일 것인데, 이러한 부분에서 소설 ‘은교’는 ‘사랑의 추억’, ‘상실의 기억’, ‘젊음의 상처’, ‘삶과 죽음’이라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와 삶의 원형을 효과적으로, 아니 감동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문체에서 감히 거장의 연륜과 지혜가 느껴진다고 할까. 진실하지 않았다면, 외설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욕망의 풍경이, 작가 자신에게 수렴해 갈수록 치열한 내면의 싸움으로 변형되어 전개되었다. 재능이 없어서 스승을 훔쳐야만 했던 젊음과, 무능한 제자를 위해 대신 작품을 써주어야 했던 스승은 모두 작가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은교의 생명력을 갈망하고 그것을 탐하는 스승과, 스승을 갈등하고 갈망하기 위해서 은교를 이용했던 제자 또한 자아의 양가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이 드러난 한 장면으로 보인다. 예술은 의례 감동과 충격을 주어야 한다. 재현의 범주 안에서, 우리가 외면했던 삶의 치부를 열어 보이며, 욕망과 갈등,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동력에 대해 해부학적인 시선을 가지고 접근 해야만 한다. 감히 말해서, ‘진실’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양식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을 재현한 영화의 무수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이적요'라는 고유명사를 ‘노시인’이라는 일반명사로 치환시켰다는 데 있다. 소설에서 이적요는 들끓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여 사창가에 가서 여자를 사고, 동물적인 충동을 해결하기 위하여 유부녀 제자와 오랫동안 치정관계를 유지하며, 서지우를 경멸하고 살해충동에 시달리는 등 욕망하며 갈등하고 번뇌하는 불완전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면, 영화에서 ‘이적요’는 연륜과 권위를 지닌 시인으로서 한정지었으며, 그의 입체적인 인간성을 발견하기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 이는 바로 인간의 ‘늙음’과 ‘욕망’, ‘젊음’을 단선적으로 이해하고 배치하는 데서 오는 오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의 욕망과 복합적인 갈등의 양상을, 나이를 먹은 보통 ‘노인’의 욕망으로 변형시키면서, 이적요를 박해일이라는 배우의 껍데기라고 밖에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린 것은 차마 안타까운 사실이다. 또한 여러 사회적인 논란을 감안하여, 도덕적 방어기제를 설치한 것이 ‘은교’의 흐름을 크게 바꿔 버렸다. 예를 들면, 이적요와 은교의 만남은 그녀와 원조교제 관계에 있던 서지우가 의도한 것이었으며, 서지우와 이적요, 은교의 관계는 영화에 묘사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각한 것이었다. 또한 영화에서 이적요가 '은교'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그 속에서 상상으로 은교와 성관계를 갖는 다는 부분은 다소 생뚱맞아 보였다. 이야기의 큰 줄기와 상관없는 겉다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영화가 좀 더 도발적이고 야해서 관객들을 경악에 빠뜨리는 것이 오히려 더 미적으로 가치있어 보였을 것 같다. 도덕과 사회적인 범주 안에서 욕망과 성을 이야기한다는 부분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 영화가 여러모로 아쉬워 보이기만 했다.
필자가 소설 ‘은교’를 접했을 때는 그 긴장감과 미묘한 매력에 빠져 한 번에 다 읽어 버렸다. 정말 살 떨리게 도발적이고 관능적이었으며 작가의 솔직한 목소리에 무게와 연륜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는데,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는 참 기대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분명히 선을 긋자면 원작의 작품성이 월등하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이적요에 투영된 박범신의 무게가 독법에 방해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솔직한 것도 좋지만, 인물과 필자간의 객관적 거리감 형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기에, 매혹적이었지만 동시에 아쉬운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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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차분하고 균형감 있게 잘 작성된 논평이라고 생각됩니다. 박범신 씨는 감각적이고 세련된 표현을 구사하는 작가이지만 ('살 떨리게 도발적이고 관능적'이라는 표현은 아주 적합합니다.), 그래서 대중적이고 젊은 독자들에게 인기는 있지만, '대가'라 칭할만한 작품성을 보여주는 작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인배님의 말씀대로, 영화가 노시인과 은교의 성애에 집중했다면 ('차라리 좀 더 도발적이고 완전히 야해서') 오히려 영화로서는 더 의미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감독은 원작을 살리는 데도, 영화로 재창조하는 데도 실패했다는 평가가 적절합니다.
새벽에 정신없이 쓴 글이라, 어색한 문장과 호응을 일부 수정 하였습니다. 문장이 미숙하여 글이 잘 읽히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글쓴이의 부족함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영화의 감각'에 대해서 본격적인 글을 준비하고 있는데, 첫 번째로 최근의 영화 '퍼펙트 센스'에 관한 에세이를 다듬고 있습니다. '퍼펙트 센스'를 보고 나서 그 충격과 감흥 때문에,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였습니다. 이완 맥그리거와, 에바 그린이 주연한 젊고 감각적인 SF영화'퍼펙트 센스'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 (세상의 종말을 독특한 시각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하반기 추천작 1순위^^
아직 영화를 못봤습니다만 김불가꼬프님과 인배님의 영화 평론이 영화보다 더 나을 듯도 하네요. 원작과 영화의 언바란스 중에 하나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인데, 동성극장에서 보면서 참 많이 졸았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타고 오르내리면서 보는 풍경- 할아버지에게 연세가 조금 덜 들어보이는 할머니/아주머니가 길을 묻거나 하면 너무너무 좋아하시고 아는데로 친절히 설명해 주십니다. 하루종일 말 한 번 걸어주는 사람없이 보내는 분들도 있으리라 싶은데 그 고독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공원의 노인 분들 심정을 확대/확장하면 영화 속 노시인의 심정도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