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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시대 | 성격 | 제작시기 | 간행, 발행 |
문헌 | 조선 | 교과서 | 1604년(선조37) | 정경세 |
번역본에 관하여는 우복 정경세 선생의 모든 저서와 번역본이 실린 ‘우산동천(진양 정씨 어사공파)’ 카페1)를 참고하였고 참고문헌으로는 허재영 저자의 『국어사 국어교육 자료집1-양정편·아희원람·몽학·계몽편』을 참고하였다. 사이트에서 참고한 번역문 또한 허재영 저자가 쓴 것으로 보인다.2)
養正篇은 《소학》의 아동용 수신교과서이다. 《소학》의 아동용 교과서이니 만큼 《소학》과 성리학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성리학적 사회윤리는 성리학이 조선사회의 지배사상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같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3) 15세기 조선의 건국과 문물제도의 정비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흥사대부들은 철학적인 측면보다는 실천윤리·의례적인 측면을 강조하였으며≪소학≫과≪주자가례≫ 등 성리학적 지배이념에 입각한 사회윤리와 유교의례의 시행에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다. ≪소학≫은 12세기 후반 주자가 소자·동몽에게 예절과 禮·樂·射·御·書·數의 익힘, 愛親·敬長·隆師·親友의 도리를 가르쳤던 삼대의 교육법을 재현할 목적으로 그의 문인인 유자징을 시켜 편찬한 책으로, ‘일용지사’를 통해 학문의 근본을 배양하여 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이루는 것을 중요한 내용으로 담고 있다. 주자는 이 책을 성리학의 대강을 서술해놓은≪대학≫을 배우기 전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단계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한 수신·제가의 학문이 아닌 수기치인과 천하를 다스리는 과정의 하나로서 제시하고 있다. 체제는 입교·명륜·경신·계고의 내편과 가언·선행의 외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편은 주로 예서와 경전 등에서 내용을 뽑아 편집하고 외편은 주로 송대 성리학자들의 언행을 기록하였다. 특히≪예기≫의 내용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기본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입교와 명륜·경신은 대부분이 禮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외편의 가언 역시 비슷하였다. 고려말 신흥사대부들에 의해 성리학과 함께 도입되어 유교적 수양의 한 방법으로 주목받은≪소학≫은 조선에 들어와서는 초기부터 官學의 중심 교과목으로 선택되었다. 이 중요성에 반해 15세기≪소학≫의 보급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당시≪소학≫교육이 주로 국가의 주도로 법령과 제도에 의해 이루어져 형식적·강제적인 측면이 강하였으며, 학생들이 이 책을 일상의 내용만을 다룬 진부한 것으로 받아들여 공부하는 것을 기피하고 시험 준비를 위해 마지못해 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기묘사화 후에는 《소학》이 금서로 지정되기에 이른다.4) 조광조와 사림들은 소학실천파라고 불릴 정도로 소학에 깊은 바탕을 두고 있었고 이러한 사림들이 기묘사화에 화를 당하자 현량과와 향악은 폐지되었고, 《소학》은 금서로 인식된 것이다. 《소학》의 금서 인식은 《소학》이 현실의 정치 운영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향악의 실시로 지방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소학》 이념이 점차 사회화와 대중화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5)
'16세기에 <소학>을 통해 이상적인 정치와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던 조광조와 그의 무리들,
이른바 '소학의 무리들'은 기묘사화로 축출되기 전에 무려 10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이들 개혁 가운데는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있는 기관들을 없애거나 기존 법제도를 유명무실하게 할 만한 개혁들도 있었다.'
- <조선 전기의 사림과 <소학>> 122쪽6)
하지만 양정편은 1604년 쓰였다. 어쩌면 《소학》의 금서 지정, 정치적 시대 상황, 저자의 정치적 관점이 연관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이 독후감을 작성하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양정편의 내용을 밝히고 저자의 정치학적 관점을 소개하여 양정편의 저술 배경을 설명하고자 한다.
II. 양정편의 내용
이 책은 저자가 1604년(선조 37) 소학용으로 편찬한 수신교과서로, 자신이 8세에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가며 소학서로 겸손하고 공경하는 방법을 배우고 행하려 했으나, 그리하지 못한 점이 많아 자신의 아들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7) 뛰어난 유학자의 『鄕校禮集』 가운데 ‘童子禮篇’을 약간 손질하여 ‘양정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8) 책의 내용은 검속심신지례(檢束心身之禮)·입사부모출사사장통행지례(入事父母出事師長通行之禮)·서당사업지례(書堂肄業之禮)의 28조로 이루어져 있다. 원문에 토를 달고, 언해된 내용이 동시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본을 살펴보면 새벽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손끝과 발끝의 움직임까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몸가짐뿐만 아니라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동몽들이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준행해야 할 생활규범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다.
졍신을 거두어 항상 귀와 눈으로 하야곰 온전하고 일케 하야 눈으로 글을 본즉 이 한가지로 글 잇서셔 가히 다른 바를 기우려 보지 아니하며 귀로 부모의 훈게와 선생의 강론을 드른즉 한 으로 밧들아 바다서 가히 다른 말을 썩거 듯지 아니하며 비록 글을 보고 강을 드를 가 아니라도 한 맛당히 자시 보고 거두워 들어 마음과 생각으로 하야곰 밧게 달니지 말것이니라.
무릇 반찬을 존쟝의게 나수거든 몬저 괴와 상을 가자서 씰고 근 연후에 두 손으로 식긔를 밧드라서 그 우에 두고 긔명을 반다시 말여셔 긋하게 하며 고기와 나물을 반다시 차레로 벌이되 존쟝의 질기고 조와하야 자조 먹는 바를 보와서 그 압해 옴기 갓기이하고 존쟝의 쉬라 명하신 즉 물너와 겻해 서고 먹기를 맛치거시든 나아가 것으며 뫼시고 먹어라 명하신 즉 읍해 자리예 나아가셔 먹으되 반다시 존쟝의 향한 바를 보와서 먹지 아니신 자를 감히 먹지 아니하며 장차 맛치신 즉 급히 맛칠 것이니라.
책의 구성은 일상적인 행위에 대한 세밀한 지침으로 되어 있다. 세수하고 머리빗기·옷입기·읍하기·절하기·쓸고 닦기·나들이·상(床)보기·음식들기·글배우기 등 일상생활의 행동거지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에는 까다로운 예법과 범절이 있음을 강조하고, 아동들에게 있어 서당의 수업기간은 기존의 문화를 착실히 내면화하는 단계로 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아동들은 연장자에 대해 순종하고 존경하는 존재로 되어있다. 따라서 거의 모든 부분이 연장자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교재의 서술방식은 대부분 ‘존장’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지다. 아마 당시 시대상으로 아동은 배움의 주체로 항상 배우고 조심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솔직히 지금의 시대상으로는 지나치게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적 입장이 강하여 요즘 아동을 가르치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사항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양정편에서 세세하게 머리 빗기, 옷 입기, 음식 들기 등을 설명하고 있어 기본적인 예의를 원류적으로 가르치는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양정편은 사료로 쓰일 만하다.
III. 정경세의 정치학적 관점
愚伏 鄭經世(1563~1633)는 조선조 명종에서 인조 때까지의 성리학자이자 문인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장으로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1598년 경상감사를 지냈다. 도남서원을 세워 정몽주, 이황,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등 5현을 모셨으며, 1630년 <광해군일기> 편찬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호는 愚伏이며, 시호는 文壯이다.
기묘사화로 爲己之學 운동이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묘사림의 정치적 몰락이 이 운동 자체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화 이후 爲己之學 운동은 외견상 명맥이 끊어진 것 같이 보였지만, 爲己之學의 태도를 옳게 여겨 그 길을 밟는 士大夫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고, 이들은 爲己之學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小學》이 ‘禁書化된 상황’에서 기초적인 문자학습서를 개발하거나 《소학》을 토착적인 형태로 翻案하는 작업에 정력을 쏟았다. 하지만 이 서적은 여전히 읽기만 해도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그래도 국왕인 중종도 소학의 가치는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후에 문정왕후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소학》의 명예회복은 전조때보다 진일보하게 되었다. 소학과 함께 사림파의 명예 또한 점점 회복되었을 것이라 본다.
우복 정경세는 17세기 영남 남인 출신 퇴계학파였다.9) 서애로부터 <주자서절요>를 물려받아서 간행함으로써 퇴계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주자대전> 가운데 중요한 글을 선택하고 모아서 <주문작해>를 편저함으로써 <주자서절요>의 한계를 보완하고 주자학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우복의 이러한 행보가 아마 <양정편>의 저술과 정치학적 관점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복은 정통 퇴계를 잇는 성리학자로서 성리학에 대한 고집스런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아동 교육에 있어 다른 사료보다 <소학>에서 발췌한 내용을 인용했다고 추측한다.
IV. 결론
결국 양정편은 소학의 아동용 수신용 교과서로서 의의를 넘어 시대적인 의의도 있다고 본다. 정통 성리학적 지표로 여겨지는 소학이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것과 당시 소학이 금서로 지정되는 과정 속에서 사림파의 위상 또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굉필, 조광조, 이황, 정경세까지 그들의 정치학적 입장과 저술들이 시대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소학》의 금서 인식은 《소학》이 현실의 정치 운영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향악의 실시로 지방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소학》 이념이 점차 사회화와 대중화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10)” 라고 했듯 소학과 양정편 또한 지방사회의 향악 실시와 성리학적 이념의 보급과 깊은 연관이 있어 양정편은 단순히 교과서적 의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교의 이념보급과도 관련이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일부분은 순 한글로 적혀있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아동 교육의 입장에서 저술을 했을지 보이는 부분이다. 결국 양정편은 역사학에서 뿐만 아니라 국어사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또한 양정편의 저술 배경과 정경세의 정치학적 배경이 관련이 있을 거라 추측한 개인적인 가설이 어느 정도 확인되는 조사였다.
V. 참고문헌
인터넷 사이트
http://cafe.daum.net/WooBok11)
참고단행본
신편한국사 제 28권
윤인숙, 『조선전기의 사림과 소학』, 역사와 비평, 2016
정순우, 『18세기서당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허재영, 『국어사 국어교육 자료집1-양정편·아희원람·몽학·계몽편』, 박이정출판사, 2008
참고논문
우인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현실대응>,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퇴계학과 유교문화> 49권0호, 2011
장승구, <상주지역 퇴계학파(退溪學派)의 학문과 사상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철학과 경세론>,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퇴계학과 유교문화> 50권0호, 2012
최정묵, <우복 정경세 성리설의 기본입장과 율곡학 비판, (사)율곡연구원(구 사단법인 율곡학회), <율곡학연구> 14권0호, 2007
1) http://cafe.daum.net/WooBok
2) http://cafe.daum.net/WooBok/IXES/5
3) 신편한국사 제 28권 조선 중기 사람 세력의 등장과 활동 참조.
4) 윤인숙, 『조선전기의 사림과 소학』, 역사와 비평, 2016, p.221
5) 윤인숙, 『조선전기의 사림과 소학』, 역사와 비평, 2016, p.309
6) 윤인숙, 『조선전기의 사림과 소학』, 역사와 비평, 2016, p.122
7) 양정편原跋 첫 문장 - “내가 여덟살 때 아버님께서 文公의 《小學》을 가르치셨는데 날로 읽고 쓰는 사이에 귀에 익혀 겸손하고 공경하는 방략이 되도록 하셨다.…”
8) 허재영, 『국어사 국어교육 자료집1-양정편·아희원람·몽학·계몽편』, 박이정출판사, 2008, p.1
9) 우인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현실대응>,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퇴계학과 유교문화> 49권0호, 2011, p.110
10) 윤인숙, 『조선전기의 사림과 소학』, 역사와 비평, 2016, p.309
11) 양정편의 원전 발문이 번역되어 있는 것을 비롯하여, 정경세가 부인 진성 이씨에게 보낸 한글 간찰을 포함, 『우복집』, 『상례참고』, 『주문작해』 등의 저술이 더 남아 있다.
첫댓글 누가 번역한 책을 읽었는지 서지적 고찰이 필요함.
제 실수로 각주에 쓰고 본문에서 밝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정해서 다시 올렸습니다.
한글로 쓰여진 어린 아이들을 위한 교육서라는 의미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