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동란과 다부동 전투
松鶴 〮〮 김시종
세계 2차 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강대국에 의해 광복을 맞이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든 민족진영은 좌우로 갈라섰고, 북위 38도선 북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이 소련군을 주둔시켰고, 남쪽은 미군정이 통치하였다. 한국은 유엔의 승인 아래 신생 독립국으로 건국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활동한 김일성은 민족진영에서 독립운동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만주에서 마적 질을 하던 김성주가 소련군 장교가 되어 스탈린에 충성하자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둔갑시켜 친일 세력을 척결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립에 혈안이 되었다. 그로 인한 남과 북은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신탁통치 반탁운동으로 민족진영은 좌우로 양립되어 대립하였다.
남로당 당수이며 부수상 박헌영은 남한에는 남로당원이 20만 명이 있으므로 밀고 내려가면 남로당원의 민중 봉기로 쉽게 적화통일 할 수 있다고 김일성한테 충동질을 수차 아래였다.
김일성은 적화통일을 위해 평양에 주둔한 스탈린한테 구십여 차래 군수물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스탈린이 모스크바로 돌아간 후 네 차례에 걸쳐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전쟁 물자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중공이 참전에 동의해야만, 군수물자 지원을 할 수 있다고 김일성과 약속하였다. 모택동은 100만 대군에 무장을 시켜 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다.
북위 38도 선에는 항상 남북 간에 긴장과 충돌이 빈번했다. 한국 정부는 38선의 총격전은 우발적인 사건으로 치유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김일성은 전쟁 준비가 완료되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38선 전역에 걸쳐 소련제 T34 탱크로 38선을 돌파 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정부는 적전 상황을 올바르게 분석하지 못한 채 한강 인도교 폭파로 서울 시민은 공포와 불안 속에 많은 인사가 납북되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6 25〮〮동란 당시 나는 남산국민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다부동 전투가 치열할 때 집집마다 방공호를 마련하여 전쟁 준비에 대비하고 있었다. 학교는 육군 통신부대가 상주하였고 학생들은 들판이나 비가 오면 기와 굽은 공장 등지에서 수업했었다.
투르만 미 대통령은 한국전에 참전키로 결의하고 국무성은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였다. 한국전에 미 지상군으로 처음 투입된 스미스 부대가 금강 방어 작전에 대패하자 정부는 수도를 대전에서 대구로 이동했다.
김일성은 8 ,15일까지 남반부를 적화 통일하겠다고 결의를 다지며 총공세로 진격했다. 괴뢰 인민군 사령관 김책은 낙동강을 따라 5개 사단 병력을 집결시키고 대구 함락을 위한 공세는 연일 계속되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너무나 참혹하고 비참한 전투였다.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55일간) 망정리 328m고지를 빼앗기고 탈환을 15 차래 반복한 전투는 밤 낯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 치열했던 고지는 유학산(673,8m)을 중심으로 망정리 328m고지 전투였다. 전사자의 시신이 구릉을 만들었고, 계곡의 물은 핏물로 가득했었다.
김일성은 광복절 행사를 대구에서 거행하겠다는 망상에 북한군 5개 사단(3사단-성주, 10사단-고령, 13사단-상주, 15사단-선산, 1사단-효령)을 투입하여 총공세로 공격하였고, 연합군은 왜관(303m 자고산 고지), 망정리 328m고지 518m (슾데미산 고지), 673,8m (유학산 고지)에 이르는 Y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과 공방전을 하였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현실이 다가오고 있을 때 정부는 또다시 수도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겼고, 내무부 장관으로 부임한 조병욱 박사는 수도를 부산으로 옮기더라도 대구를 사수해야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며 경찰 15,000명을 투입하여 다부동 전투에서 149명이 전사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구 함락은 촌각을 다투는 문제였다. 다부동은 전략상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유학산을 중심으로 산악지대가 가까이 있어 미군 전투기가 활동하기에 힘든 지형으로 인민군의 공세는 격렬했다.
미 제8군 사령관 워커(Waltdon H.Walker) 장군은 군, 경찰, 학도 의용군, 지게꾼 등 국민이 일심동체가 되어 최후의 교두보를 낙동강 전선을 따라 240km 전선을 구축했다. 낙동강 방어선 사수를 명령함으로써 한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부하들 한데 내가 후퇴하면 나를 사살하라고 장병을 독려하며 반격 작전에 일환으로 다부동 북서쪽 11km 지점의 천생산을 탈환하였고, 유엔군은 B-29 폭격기 98대를 칠곡, 약목, 구미 3공단 지역 일대에 융단 폭격으로 적진지를 초토화한 덕분에 대구 시민은 청도 방면으로 피난길로 갔다가 수성교에서 피난길을 멈추었다.
낙동강 교두보 사수로 방어선이 구축되자 맥아더 원수는 인천 상륙 작전을 구상하였다. 상륙 작전 성공 확률은 오천 분의 일로 생각했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다. 한국군의 켈로 부대가 월미도의 등대를 밝히며 상륙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수도 서울이 함락된 지 3개월이 지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한 한 미〮〮연합군은 10월 1일 38도 선을 넘어 북진했다. 압록강까지 북진한 국군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목을 적시며 통일의 날이 머지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백만의 중국 대군이 인해 전술로 6 ,25동란에 참전하게 되자 동절기에 1,4 후퇴가 시작되었다. 후퇴하는 과정에 동상에 걸린 장병이 수없이 많았다.
흥남 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15일부터 열흘간 계속되었다. 북조선의 인민도 자유를 찾아 피난길의 행렬이 거미줄처럼 이어졌다. 흥남항에 정박 중인 미국 함정에는 미군 10군단과 한국군 1군단이 피난민과 함께 철수하기 위해 군수 장비를 바다에 수장시키고 10만여 명을 남으로 후송했다.
한.미 연합군은 후퇴를 계속하다가 38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에 나셨다. 서부전선이나 동부전선에는 피아간에 공방전은 격렬하였다. 정전협정의 분위기가 익어가자, 백마고지는 12 차래 빼앗기고 탈환하는 공방전이 치열했었다. 철의 삼각지대에서는 영토 확장을 위한 전투는 주야장천 계속되었고, 포격으로 인한 산야는 초토화되어 구릉으로 변할 만큼 지형이 변형되기도 하였다.
휴전협정으로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그로 인한 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고향을 등지게 되었고 많은 미망인을 양산하였다. 상이군경의 사회생활은 비참했다.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나라에 바친 군경 용사들의 영혼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치며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지금 다부동에는 6.25 동란의 참상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한 군경의 충혼비와 전쟁 기념관이 있다. 나라를 지키다가 산화한 군. 경의 위령탑이 치열했던 아픈 역사를 말해 주듯 눈보라와 갖은 풍상을 겪으며 묵묵히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조국 대한민국을 수호하다가 전사한 호국 장병의 영령을 달래기 위한 유골 발굴 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뜻있는 독지가의 후원과 국가 보훈부 산하 보훈 단체협의회에서 6.25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트르만 미국 대통령의 동상을 세우고, 백선엽 장군과 연합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 동상을 다부동에 세운 바 있다. 치열했던 328고지 입구의 지게꾼 길목에는 “그날의 영웅들” 시비와 모형의 지게가 호국 평화 길을 안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칠곡 보훈 단체협의회서는 올해 6.25 격전지 328고지 전몰 용사 위령 추모제에 백선엽 장군의 따님인 백남희 명예 이사장의 참여와 추모 음악회를 한 바 있다.
6월은 호국 영령에 대한 보훈의 달이다. 건국, 호국, 구국을 위해 순국하신 군경 장병의 영전(靈前)에 추모의 글을 바친다.
약력
대구 출생(41년생) 아호 松鶴 『영남 문학』 수필 등단
*제50회 한민족 통일 문예 대전 대구협의회 회장상 수상, 한국 경찰 문학 발전 유공 대한민국 경우회 중앙회장상 수상, 송암 문학상, 한국예술인 복지재단 “디딤돌” 창작 기금 수혜, 제1회 대구문화원 연합회 시각 예술상(사진 작가상) 외 다수
*대구 문인협회원, 대구 수필가협회 이사, 신한국 운동 본부 인성 대학원 이사, K 펜 문학회, 영남 문학회, 수필과 지성 및 이후 문학회 (역), 영축 문학회, 한국 경찰 문학회 대구 경북 지회장.
시집: 『봄의 지열』
수필집: 『영혼 靈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