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부활이 없다면(고전15:16-22)
2026, 4,5. 부활절,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얼마 전에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은은한 녹차 같은 글을 읽었다. 제목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에게 해 줄 말들"이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연애가 잘 안되면 집으로 와라. 돈 문제로 너무 힘들면 집으로 와라. 마음이 힘들고 지친다면 집으로 와라. 슬프거나 외롭다면 집으로 와라. 어디에 있든, 몇 살이든 상관없다. 너는 언제든지 집에 올 수 있다. 나는 언제나 너의 집이 되어줄 테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 때,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집에는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고, 나를 기다려주는 가족들이 있다. 집에는 내가 좀 실수해도 용납해 주고, 내가 절망 속에 헤맬 때 함께 울어주는 부모님이 있다. ‘힘들 때 집으로 오라’라는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그래서 고향이 생각나고, 집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들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내가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찬479장)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질병과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내 아들/딸아, 너무 힘들지? 집으로 와라."
그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 영원한 집이 바로 천국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히 기쁘게 살 수 있도록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 이것이 우리(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음이다.
우리 주변에는 죽음을 그냥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죽으면 끝이지, 무슨 천국이고 부활이야?"
"부활은 종교적인 신념이나 신화일 뿐이지, 과학적으로 어떻게 증명할 수 있어?"
"당신이 죽어 봤어?" "
그러나 이러한 의문이나 질문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거나 못된 사람 취급을 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고, 오히려 이런 고민들이 오히려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의문이 2,000년 전 초대교회 시절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 그룹 중의 하나인 ‘사두개인들(Sadducees)’은 겉으로는 경건해 보였지만, 부활을 믿지 않았다. 특히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고린도교회 신자들 가운데도 부활을 믿지 못하고, '죽으면 끝'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사도 바울의 말처럼, 만약 천국이나 지옥이 없고, 부활도 없고 심지어 죽으면 그냥 끝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특히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더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이후에 영원한 천국이 있고, 장차 다시 살아나는 부활도 있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장차 모습에 대해서 강력하게 변증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로 있었던 팩트이고, 제자들을 비롯해서 허다한 부활의 증인들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그들 중에 대다수는 지금도 생존하고 있고, 자신 역시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고전15:5-8),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이치를 생각해 보라(고전15:35-44)“고 강조했다.
정말 그렇다. 하나님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통해서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가능한 것을 예시해 주셨다. 요즘 날씨가 더워지면서 봄꽃들이 급속하게 피고 있다. 교회화단에도 수선화를 비롯한 봄꽃들이 올라오고 있다. 다 죽어서 없어진 것 같았는데, 다시 올라오고 있다. 그런데 씨앗이 땅 속에서 발아하려면 반드시 종피(seed coat)가 씨앗 주변의 토양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껍질이 부패(decomposition) 과정이다. 이 분해 과정 없이는 속에 있던 배아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밀 한 알이 땅에 심기면, 그것에서 20~25개의 이삭을 내고, 이삭 하나에 40~60개의 낱알이 달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밀 한 알에서 약 800~1,500낱알이 생산된다. 이것이 바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의 실제 식물학적 의미이다(요12:24, 고전15:36).
이것은 매미의 경우에도 유사하다. 여름철에 울어대는 매미들은 굼벵이에서 하늘을 나는 매미가 되기까지 작게는 7년에서 길게는 20년 가까이 땅 속을 기어 다닌다. 그러다 껍질을 벗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몸으로 변해서 하늘을 날게 된다. 굼벵이 시절에는 장차 자신들이 하늘을 날개 될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도들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죽음 이전의 육체 상태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영원히 썩지 않는 상태로 변화해서 살아나셨다는 점이다. 이것을 부활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죽음 이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나시지 않고, 부활체의 모습으로 살아나셨을까? 만약 예전의 모습으로 똑같이 살아났다면(나사로나 임사체험자들처럼), 그것은 곧 언젠가는 다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그런 몸의 상태로는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얻을 수 없게 된다(고전15:50-52). 그래서 다시는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모습으로 살아나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 상태가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는 우리들(나)의 장차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the firstfruits of those who have fallen asleep)”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장을 마치면서 이렇게 권면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나)를 위해 영원한 집을 준비하셨고, 우리들 모두가 한 명도 낙오자 없이 아버지의 집에 들어오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독생자를 희생시키시고, 부활하게 하셨다. 그리고 성령님까지 보증으로 주셨다(고후1:22). 그렇기에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아무리 세상의 어지러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할지라도, 천국신앙과 부활신앙으로 넉넉히 이겨내자. 특히 요즘처럼 세계적인 전쟁의 소식과 그로인한 기름 값 폭등과 물가인상 그리고 각종 질병의 공포들로 인해서 ‘죽겠네, 죽겠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오기 쉽다. 그러나 앞으로 믿음의 성도들은 그런 말 대신, “주께 있네, 주께 있네!”라고 말하자. 주님이 다 보고 듣고 계신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그랬왔듯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천국소망, 부활의 믿음으로 정진하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