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나발니에 이어 러시아에서 또 한명의 '반푸틴' 유명 블로거가 탄생할까?
푸틴 대통령 체제 하의 구조적인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블로그 글'로 인기를 얻은 나발니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반부패재단을 세워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더니, 이제는 '반푸틴' 세력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그가 감옥에 가 있는 사이,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푸틴 체제'를 뒤흔든 '바그너 그룹'의 6·24 군사반란이 터지고, 이를 계기로 푸틴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군사블로거가 등장했다. 소련 KGB를 이어받은 러시아 정보기관 FSB(연방보안국) 특수부대 출신의 '이고르 기르킨'(본명 이고르 이바노비치 스트렐코프, FSB 대령 예편)이다.
법정에 출두한 나발니(위)와 기르킨/사진출처:모스크바 시 법원, 텔레그램 영상
러시아 사법당국은 21일 기르킨을 러시아 연방 형법 282조('극단주의 위험')를 위반한 혐의로 2개월간 구속하고 기소했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최고 5년형에 처해진다.
'블로그 글'(실제로는 텔레그램 포스팅)로 푸틴 대통령을 비판하고 퇴진을 요구하다 체포된 그가 앞으로 '푸틴 정권'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제 2의 나발니'가 되느냐, '제 2의 프리고진'(6·24 군사반란을 일으킨 '바그너 그룹'의 수장/편집자)으로 전락하느냐가 결정될 전망이다.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제 2의 나발니'가 될 가능성은 낮다.
우선 이념적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 그는 FSB 출신답게,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지녔다. 개혁 진보 성향의 '나발니'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다.
기르킨은 우크라이나 내전이 처음 발생한 지난 2014년,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으로 건너가 반정부 민병대(러시아계 분리주의 무장단체/편집자)의 지도자로 활약했고, 독립을 선포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의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 개시와 함께 민족주의 성향의 유명 군사 블로거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나발니는 국내에서는 물론, 약물 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에도 치료받은 독일에서 푸틴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푸틴 궁전'(2021년 1월) 폭로 영상을 공개하는 등 체제에 저항하다가 귀국 직후 체포돼 수감중이다. 그의 형량은 특수 군사작전 와중에 계속 늘어나고 있다.
기르킨의 모습/텔레그램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기르킨은 21일 중대범죄를 담당하는 연방수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됐다. 그녀의 아내가 텔레그램을 통해 기르킨이 집에서 무장군인들에 의해 끌려나갔다는 사실을 경비실을 통해 들었다고 주장했다.
21일 모스크바 법원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협심증이 있고, 지난 9년 동안 모스크바에서 일정하게 거주했으며, 부양해야 할 미성년 자녀와 할머니가 있다"며 가택 연금 조치에 처해줄 요청했다. 그러나 법원은 FSB 특수부대에서 익힌 수완에 능하다며 구속을 주장한 검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기르킨의 변호사는 그가 텔레그램 채널에 크림반도 문제에 대한 게시물 2개를 올렸다고 인정한 뒤 "무엇을 숨기거나 수사를 방해할 의도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해외 도피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가 말레이시아 항공사 소속 보잉 MH17편 피격 사건(당시 승객 283명 등 탑승자 298명 전원 사망/편집자)으로 2022년 11월 헤이그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수배된 상태라고 반박했다.
그의 이같은 전력도 '나발니'와 차별화된다. 서방 진영도 중대 범죄를 저지른 기르킨을 나발니와 같은 민주 투쟁 인사로 분류해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은 지원 세력은 러시아내 강경파인데, 그들도 '푸틴 체제'와 근본적으로 각을 세울 것 같지는 않다. 러시아 당국이 6·24 군사 반란의 학습효과로, '반푸틴' 세력의 척결에 나선 상황에서 그가 러시아 안팎 어느 곳에서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나발니와 같은 세력을 형성하기는 어렵다.
스트라나.ua는 "기르킨의 체포는 러시아 당국이 프리고진의 군사 반란 이후 비판세력을 모두 정리하는 차원에 이뤄졌다"며 "친(親)프리고진 네트워크는 이미 대체로 조용해졌다"고 지적했다. 또 "그가 프리고진에 못지 않게 러시아의 군사및 정치 지도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해 왔으며, 푸틴 대통령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체포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해석했다.
프리고진의 군사반란을 비판하는 '기르킨'의 영상/캡처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경노선을 걸어왔다는 점에서 그는 프리고진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돈바스 내전에 직접 뛰어들었고, 특수 군사작전을 지지하지만, 러시아군 지휘부의 무능을 질타한 것도 유사하다. 특히 올해들어 쇼이구 국방장관-게라시모프 총참모장 체제의 지휘및 지도력을 계속 날카롭게 비판했다.
하지만, 프리고진이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반대 입장을 천명했고, 이후에도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거두지 않았다. 러시아와 푸틴 체제를 옹호하는 태도로 여겨졌다.
문제는 푸틴 대통령이 '바그너 그룹'을 사면하고 벨라루스 행을 용인한 뒤다. 우유부단하고 비겁하다며 푸틴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 번즈 미 CIA 국장이 20일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열린 아스펜 안보 포럼에서 "러시아의 무장 반란 사건으로 푸틴 대통령이 구축한 체제의 중대한 균열이 여러 분야에서 드러났다"고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8일에는 푸틴 대통령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퇴진을 촉구하는 글을 텔레그램에 올렸다.
푸틴의 권력 이양을 촉구하는 기르킨의 텔레그램/캡처
"23년 동안, 국가 지도부에는 상당수 국민의 눈에 먼지가 들어가도록 방치한 뭔가 모호함이 있었다. 그것은 이제 국가의 합법성과 안정화의 마지막 섬으로 남았다. 불법적인 방법이라도 그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동안 그를 권좌에 올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끝낸다는 뜻이다. 국가는 앞으로 6년간이나 더 비겁하고 평범한 권력에 참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베일 속에서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는 단 한가지는 ('고르비'처럼 그의 이름이 역사에 영원한 수치로 기록되지 않도록), 현실적이고 유능하며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생각이 머리 속에는 없다. 그러나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동료들의 선택 능력을 확인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은 푸틴 대통령에게 이제라도 권력을 능력있는 자에게 넘겨, 소련을 붕괴시킨 고르바초프와 같은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글이 포스팅된 날 (18일), 러시아 보안당국에는 기르킨의 고발장이 접수된 것으로 전해졌다. 접수자는 그가 비판해온 '바그너 그룹'의 한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그와 (벨라루스로 떠나지 않은) '바그너 전사'의 입장이 뒤바뀐 순간이다. 87만여명의 텔레그램 팔로우를 지닌 기르킨은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크렘린의 힘은 무소불위(無所不爲)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