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혼자 남게 된 어느 소년의 고독
堂井 김장수
◆프롤로그
우석(友石) 이경수. 2000년 4월 10일생. 경수는 회사에서 일하시는 아빠와 가정주부인 엄마,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누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비록 살림이 풍족하지 않았고, 힘든 시간들이 있어도 부모님의 누나와 경수는 서로를 의지하며 좋은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고향은 경기도 의정부시였다. 경수는 어릴 때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누나처럼 음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경수에게 누나는 고민을 들어주고 감싸주는 위대한 선생님 같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2015년 5월 13일에, 그 꿈은 틀어지고,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 터진 후 경수의 삶은 바뀌고 만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순간
경수는 중학교에서 귀가하던 도중, 부모님과 누나가 흉기에 찔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119를 불러서 부모님과 누나를 응급실로 데려다 주었으나, 불행하게도 부모님과 누나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숨져 있었다. 경수는 서로를 의지할 대상을 영원히 잃어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 범인이 잡혔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범인이 붙잡힌 후 여러 가지 재판을 거치며 경수는 지쳐있을 만도 했으나, 경수는 의연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저 범인은 제 혈육을 너무나 참혹하게 살해한 것도 모자라, 저까지 죽이려 했습니다. 저는 의정부에서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차라리 무인도로 떠나고 싶은 심정입니다. 난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나는 용서를 할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어 저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원수라지만, 관대하게 처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심이 어린 용서를 경수는 바랐다. 하지만, 재판관의 판결은 단호했다.
“피고 XXX를 사형에 처한다!”
이 광경을 조부모님, 외삼촌, 고모 등이 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경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 모른다. 급기야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엉엉 울고 말았다. 그 순간 법정은 경수에 대한 동정과 슬픔,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측은함이 가득했다. 얼마 후 범인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뒤
주변 사람들은 걱정을 했다. 한 가족의 비극과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이 험한 세상에 혼자 남겨진 아들 경수를 걱정했다. 한창 꿈을 꿔야 할, 그래서 부모님의 돌봄이 필요했던 이제 겨우 ‘15살’이었다. 대법원 재판이 끝난 지 얼마 후인 2016년 12월 20일이 되었지만, 경수의 시간은 1년 전 그 때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경수는 최소한 조금씩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왜냐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고모와 고모부 등이 자상하고 따뜻하게 경수를 감싸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회사에서 조금이나마 고아가 된 경수에게 5천만 원의 장학금을 준 것이었다. 친척들은 고아가 된 경수를 누가 보살피나 의논했으나,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 경수를 보살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조부모님이 경수를 보살피기로 했다. 이 순간이 꿈이기를 바라고, 악몽이기 바랐지만, 고등학교 1학년에 갓 입학한 경수가 이 상태를 받아들이기에는 눈앞에 닥쳐온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하기만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고1 때 경수는 경상북도 영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봉양하면서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한 후 농사일을 도우며, 밤에는 숙제와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공부는 상위권이었다. 그러나 조부모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경수를 계속하여 돌봐줄 수 없었다. 하지만 경수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도 열심히, 효도도 열심히, 농사일도 열심히 하는 착한 아이로 거듭나고 있었다. 자연 속에서 공부하며 살면서 경수를 감싸고돌던 트라우마와 악몽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한편, 경수는 자신의 짜증을 받아주는 엄마가, 고민을 들어주는 누나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아빠가 보고 싶어 그들을 그리워하며 매년 5월 13일이 되면 그들이 보고 싶어 엉엉 울곤 했다. 그것을 지켜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그런 경수의 처지를 걱정하시며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
“경수야, 원래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단다. 네 부모와 누나를 그리워하는 마음, 우리가 왜 모르겠느냐. 하지만 슬픈 일은 잊을수록 좋단다. 대학에 가서 열심히 사는 것이 부모님께 대한 효도란다. 너는 대학교 들어갈 준비나 하렴. 농사일은 할미랑 이 할아비가 다 할 테니까, 공부나 열심히 하렴.”
“이 할미가 맛있는 거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렴. 네 부모와 누나, 좋은 곳에 갔으니 하늘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꼭 가야 하지 않겠니?”
조부모님의 뜻밖의 격려에 힘을 얻은 우석(友石) 이경수. 그 후 경수는 공부와 효도, 농사일도 열심히 했다. 조부모님이 무리하지 말라고 얘기해도 걱정 말라는 투로 조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렸다. 당연히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그 후 고3 때는 수능을 보았는데, 그 동안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인지, 또 하늘나라에 간 부모님과 누나가 축복을 해 주었는지, 놀랍게도 만점이었다. 수능을 치르는 동안 추호(秋毫)의 실수도 없었고, 최선을 다하여, 절대로 부정행위를 하지 않은, 그 동안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엄마, 아빠, 누나, 보고 계시죠? 제가 해냈어요!’
그런 수능 만점 메시지를 하늘나라에 보낸다. 어느새 가족들에 대한 원망을 버리고 해탈(解脫)의 경지에 다다른 경수. 그런 경수에게 하늘에 있는 부모님과 누나는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 아빠의 꾸중, 엄마의 잔소리, 누나의 바이올린 소리…. 그립지만 참고 이겨낼 수 있어서 좋았던 경수. 이제 경수는 예술대학교에 입학한 후 누나의 뒤를 이어 바이올린을 잡았다.
◆위기 그리고 극복
2019년의 어느 날 홈페이지를 본 경수는 깜짝 놀란다. 자신은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자신을 살인자로 몰아붙이는 추측성 인터넷 댓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경수는 그 댓글들을 모두 지웠다. 이미 경수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부모님과 누나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한편 어느 복지재단에서 경수의 조부모가 사시는 집을 새 집으로 만들었다. 비록 외딴 시골이었어도, 주변에 이웃이 없어도 자연과 함께 사니까 조부모님은 편안한 마음으로 농사를 지으실 수 있게 되었다. 새 집도 있겠다, 고양이와 개도 함께 키우게 되었다. 경수가 귀향하면 함께 살게 하려는 마음에서였다. 그것을 보고 조부모님도 기뻐하셨다.
◆고등학교 때의 슬럼프
고등학교 2학년 때 슬럼프가 찾아왔는데, 그 때 경수는 ‘삶에 낙이 없다, 살아도 별 의미가 없다, 살 길이 막혔다’라며 비관적인 말을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그러나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 더 생각해 보라. 생명은 조물주의 선물이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고, 그건 어떠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제일 소중한 것이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경수에게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다. 그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저는 이미 청산가리를 먹었을 겁니다. 한 번 믿어 보고, 힘든 일이 있으면 선생님께 언제라도 고민을 털어놓겠습니다. 참, 무슨 일이 있어도 누나가 이루지 못한 꿈을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문자는 훗날 경수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진심어린 격려가 한 생명을 살린 셈이었다.
◆바이올린과 함께
경수는 예술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갔다. 바이올린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서였다. 경수가 다니던 예술대학에서는 경수가 바이올린 학습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학자금과 생활비를 대 주었다. 경수의 고향인 의정부시와 선친이 다니던 회사에서도 도움의 손길은 끊이지 않았다. 또한 조부모님이 계시는 경북 영양에서도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지원금도 지원해 주었다. 조부모님도 경수를 위해 기도해 주심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 고마운 후원을 받은 경수는 바이올린을 열심히 배우며 어느덧 음대 졸업 후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다. 힘든 순간들이었어도, 동양인인 경수를 배려해 주는 사람들 덕분에 무사히 오케스트라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주위의 배려 덕분에 경수는 어느새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셈이었다.
◆어느덧 은퇴
세월이 흘러 경수의 나이 70세. 노인이 되어 바이올린을 잘 잡을 수 없었지만, 고국에서의 기쁜 소식과 낭보(朗報)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통일 한국의 꿈을 그리며 우석(友石) 이경수는 어디선가 솟아오르는 힘과 활력을 느꼈다. 왜냐하면 자신도 자식들을 키우다 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자신이 부모가 되어 보니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으로 인해 마음 한 구석이 짠해온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아내와는 29살에 결혼했는데, 피아니스트였다. 게다가 다재다능하고 똑똑하여 심지가 강하고 착한데다 남편을 공경할 줄 아는 여자였다. 게다가 신앙도 깊고 바른 생활을 철저히 하여 남편이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잘 잡아주었다. 요리면 요리, 음악이면 음악, 육아면 육아, 정말이지 어머니 자격이 있어서 1등 여자로 손색이 없었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첼리스트로, 차남은 소아과 의사로, 장녀는 바이올린을 전공하면서 음악 대학의 교수로 활동했고, 차녀는 플루트를 잘 불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약했으며, 막내아들은 문학가로 활약하여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가다
어느덧 경상북도 영양이 그리워진 경수. 서둘러 귀향해 보니, 조부모님은 돌아가시고, 고모와 고모부 내외분이 살고 계셨다. 고종 사촌들도 경수 가족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고모와 고모부는 이미 늙으셨고, 외삼촌과 외숙모는 이미 돌아가시고 없었다. 대신 외사촌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으며, 친구들 또한 늙었지만 모두 다 경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친구들 중에는 40대~70대에 결혼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아들딸 구별 없이 하나만 낳는 풍조가 유행이었지만 남달리 경수는 일찍 결혼했고, 자식은 무려 5남매였다. 영양에서는 귀국한 경수를 위한 잔치와 행사가 줄을 이었다. 인구는 비록 조금 줄었어도 자신을 맞아주는 그리운 제2의 고향 풍경이었다.
꿈같은 영양에서의 날들을 마무리하며 고향인 의정부시로 가보니, 신형 아파트가 세워져 있었고, 의정부 시장은 어느덧 73세의 영수를 반가이 맞아주며 여러 가지 행사가 펼쳐졌다. 얼마 후 납골당에 갔는데, 납골당 어느 구석에 안치된 부모님과 누나의 유품과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항아리에 담은 것들, 가족사진만이 경수를 반겼다.
“아버지, 어머니, 누님, 제가 왔습니다. 제가 왔어요. 저 경수예요. 오늘따라 모두들 너무 보고 싶네요. 저,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습니다. 하늘에서도 보고 계시죠? 오늘따라 모두 보고 싶어요.”
의정부 납골당에 안치된 부모와 누나, 그 유품들을 보는 경수의 마음은 슬픔과 외로움으로 눈물이 흐른다. 곁에 있던 아내도 경수를 위로해 준다.
“여보, 슬퍼하지 말아요. 하늘에서도 시부모님하고 시누이께서 당신을 축복해 주실 거예요. 걱정 말고 우리 열심히 살아요. 자식들 생각도 하셔야지요.”
“그 살인범이 너무 불쌍해요.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 그자가 부모님과 누나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불쌍해요.”
“그 살인범이 없었더라면 당신이 꿈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물론 사람을 죽인 건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이것도 주님의 섭리 아니겠어요?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고맙소, 부인.”
아내의 위로에 용기가 생긴 경수. 하지만 부모님과 누나, 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고모, 고모부 등등……. 어느새 지나간 추억들이 살며시 떠오른다. 하지만 이미 세월은 되돌릴 수 없이 흘렀고, 통일 한국은 더욱더 발전해 갔다. 통일 한국에서 강연을 하니, 곳곳에서 박수가 우레와 같이 퍼져 나갔다. 그렇게 통일 한국은 철저히 발전해 있었다.
◆독일에서 쓰러지다
독일에 돌아간 경수는 손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음악대학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건강을 돌보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경수의 나이 79세 때, 쉽게 낫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 집안사람들과 가족들이 경수를 돌보며 병수발을 했지만, 어느 병원에서 진찰해 보니, 췌장암 3기란다. 이미 완치되기에는 너무 늦은 경수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이제 고국에 나를 데려다 다오. 다들 훌륭하게 커야 한다. 비록 부모님과 누님 곁으로 가지만, 너희들은 형제간에 싸우면 안 된다. 알겠지?”
이 말을 남긴 지 얼마 안 되어, 심근경색이 악화되었다. 수술실로 옮겨 수술을 했지만, 얼마 후 가족들은 비보를 듣는다.
“선생님, 우리 아버님 어떻던가요?”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췌장암에 복막염, 심근경색이 겹쳤습니다.”
그 말에 울음바다가 되는 수술실 문 앞. 얼마 후,
“환자가 숨이 끊어졌습니다. 장례 절차를 준비하십시오.”
이 말에 모두 울고 만다. 부인은 쓰러진다. 장례는 기독교식으로 치러졌다. 우석(友石) 이경수의 나이 79세. 우석 이경수, 그는 갔지만 그가 바이올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모두의 가슴 속에 남아 우리 가슴 속에 역경을 이겨내고 꿈을 이룬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우석 이경수의 시신은 통일 한국으로 운구되었다.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고, 부모님과 누나가 안치된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납골당 한 곳에 쓰여진 메모는 다음과 같다.
부모님과 누님이 계신 곳에 가서 행복하게 지낼 생각을 하니 기쁘다. 모두 항상 겸손히 살며 용기를 잃지 말기 바란다.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