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1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요한 6,16-21)
"It is I. Do not be afr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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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공동체 안에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하자, 사도들은 공동체를 소집한다. 이제부터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고 일곱 봉사자들은 식탁 봉사 직책을 맡게 된다(제1독서). 어두운 밤,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에 있을 때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게 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시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 어둠과 높은 파도도 무서워할 것이 아니다(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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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첫 부분부터 물과 바다는 혼돈과 어둠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혼돈과 어둠은 사람이 살기에 알맞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기에 알맞게 하려면 바다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바다가 갖는 부정적 의미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호수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어느 깊은 밤, 호수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는 풍랑이 심하게 일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어두운 호수 한가운데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제자들을 안심시키십니다. 배는 어느새 안전한 곳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 물결치는 호수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호수까지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 당신께 오라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신앙은 죽음 한가운데에서도 풍랑을 지배하시는 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사람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져 냅니다. |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 공동체는 신자 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예기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사도들에게 불평하는 교우들도 생겨났다. 그리하여 주님의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교우들에게는 일반 봉사자들 일곱을 뽑아 주었다(제1독서). 제자들의 두려움은 권능의 주님을 확신하지 못한 데에서 왔다. 숱한 기적을 보았지만, 자신들의 체험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 존재로 착각한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위로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1스타디온(stadion)은 그리스의 길이 단위로서, 대략 192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서른 스타디온이면 5~6km 되는 거리입니다. 제법 먼 거리를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로 걸어가신 겁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허깨비’를 보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스승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답하십니다. 살다 보면 허깨비를 ‘보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생각지도 않은 사건에 휩쓸리게 됩니다.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이 전개됩니다. 자신이 가야 할 자리에 ‘실력 없는’ 사람이 앉게 되는 것을 봅니다. 능력은 뒷전이었고, 인간관계로 결정된 것을 알게 됩니다. 이용당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세상의 불공평을 체험할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일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니, 희생되는 것과 희생자로 ‘느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분한 마음이 강해지면 일상의 모든 것을 ‘다시’ 끌어안아야 합니다. 애정으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분의 힘을 만나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실패도 은총입니다. 연약한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실패 때문에 체념하는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
아무도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가십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놀랍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분이 스승이심을 알게 되자 더욱 놀랍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제자들을 놀라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당신께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보여 주시고자 물 위를 걸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힘을 지니면 누구든지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다며 포기하고 제쳐 둔 일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능력을 모셔 오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일입니다. 날마다 기도와 선행을 빠뜨리지 않는 일입니다. 성사 생활에 참여하여 은총을 받는 일입니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 역시 그분의 힘을 받으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힘을 지니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위험하고 아찔한 현실에서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물 위를 걷는 사람이 아쉬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방향 짓는 태도
- 전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니,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닿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보고 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 힘과 능력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겸손하게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지요! 바로 어떤 처지와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내 마음과 영혼 안에 함께하신다는 존재에 대한 신뢰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존재의 궁극적 신비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그 신비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방향이 변화되는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느님께 방향 짓는 태도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매순간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존 포웰 신부는 ‘회개란 내적인 실재이며, 마음의 변화이며,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라고 말합니다. 삶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 기대와 내 바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과 마음으로 자신과 삶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삶 안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온전히 꽃피우고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며 로마 최고의 역사서인 ‘기원론’을 남긴 카토는 80세가 되었을 때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이야 80세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지만, 기원전에 생활했던 그 당시에는 60세만 넘어도 장수한다고 말할 때였습니다. 따라서 80세가 되어 그리스어를 배운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이 카토를 놀리며 말했지요.
“아니, 그 나이에 왜 그렇게 어려운 그리스어를 배우십니까?”
그러자 카토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응, 오늘이 내게 남은 날 중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 시작했네.”
이런 생각을 깜빡 잊곤 합니다. 그래서 늦었다며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솔직히 아직 젊은 저이지만, 저 역시도 나이 들었다면서 포기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시간이 나의 남은 날 중에서 가장 어린 날이고 가장 젊은 날이라는 확신을 잃지 않을 때, 그 어떠한 것도 포기하지 않고 그래서 오늘을 최고의 날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까이 가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가 있습니까? 따라서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 두려워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특히 이미 어두워져서 앞이 잘 보이지는 않는 시각이었고,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고 있을 때였지요. 그래서 그 두려움은 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무서워서 기절할 만한 상황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직접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목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 순간,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만으로도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인 것이지요. 이렇게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인데 어떻게 주님께서 주신 삶을 포기할 수가 있습니까?
따라서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각종 이유를 들어 할 수 없다고 좌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만이라도 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바로 오늘을 내 인생의 최고 날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불만은 자신감이 없고 의지가 약한 것이다(에머슨).
“나다” - 하느님의 이름
-오민환-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은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지만, 요한 복음서는 오천 명에게 빵을 먹이실 때와 같이 여전히 예수님의 신적인 계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닥친 위협적인 상황은 공관 복음서와는 달리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산으로 몸을 피하셨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배를 띄워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큰 바람이 불고 높은 파도가 일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배로 오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섰던 것처럼 주님의 현존이 두려웠습니다(탈출 3,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듯이, 예수님은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신원이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나는 있는 나다”라는 하느님의 자기계시는 하느님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 자체는 구원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그 말씀 이후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의 구원 역사를 이루셨듯이, 예수님께서도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원하는 곳에 닿아 있을 것입니다.
지혜와 성령 충만한 사람만이
-김찬선신부-
지금 제 컴퓨터에는 요즘도 계속해서 “AhnLab V3 Internet Security 2007 Platinium 바이러스/스파이웨어 엔진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는 경고가 뜹니다. 벌써 10여 일이 넘었는데도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무슨 문제인지도 모르고 아마 바이러스를 막으라는 거겠지 추측할 뿐입니다.
못한다면 일종의 장애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에게는 은행의 가는 일이 그렇게 힘들고 잘 처리하지 못하고 동사무소 가는 것, 어디 전화 하는 것, 비행기 표 끊는 것, 어디 가서 물건 사는 것 등 현실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거의 스스로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합니다. 심지어 병원 가는 것도 지금까지 스스로 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늘 누가 절 억지로 데려가서 절차를 다 밟아주어야만 갑니다.
이런 저인데도 일은 수없이 벌리고 책임도 많이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매일 같이 말씀 나누기를 하고 여기저기 강의하러 다닙니다. 그러니까 땍깔이 나고 그럴 듯한 것은 제가 다 하고 그 뒤에는 드러나지 않게 그것을 뒷받침하고 뒷수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저희 수도원에서도 보면 이런 형제들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진짜 수도자들입니다. 밖의 사람들은 이런 형제들이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이 형제들이 사목을 뒷받침하기에 다른 형제들은 걱정 없이 자기의 사목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드러나지는 않고 궂은일은 다 하는 것은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성덕이 뛰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외부 사목은 혹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힘이 들더라도 보람, 성취감이 있기에 할 수 있지만 이런 일은 영적인 충만함, 사랑과 지혜, 그리고 겸손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신앙의 공동체이지만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복음 선포에 몰두하다 보니 공동체 살림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연히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도들이 살림에만 신경 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할 사람들을 뽑는데,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을 뽑습니다.
진정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잘 뒷바라지 하는 사람. 이 사람이 진정 성덕이 뛰어난 사람, 즉 사랑과 겸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주는 평화
-전삼용신부-
이집트 성지순례를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새벽에 시나이 산에 올라 해가 뜨는 장엄함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해가 끝없는 붉은 돌산들 저편에서부터 떠오를 때는 정말 장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벽에 산을 오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낙타를 타고 올라가고 어떤 사람들은 걸어 올라갑니다.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 중에는 낙타를 타는 것이 무서워서 일부러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 낙타를 탔는데 낙타가 일어서니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낙타는 줄을 지어 한 쪽이 낭떠러지인 길을 따라 산을 오릅니다. 옆에서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조금은 안심이 되지만 그래도 뒤뚱뒤뚱 산을 오를 때는 이 동물에게 나의 생명을 맡겨도 되나 싶은 의문이 자꾸 듭니다.
이 동물은 이상하게 안전한 쪽이 아니라 낭떠러지 쪽으로만 걷습니다. 수 없이 낭떠러지로 낙타의 발에 치이는 돌들이 굴러 떨어집니다. 단 몇 센티만 옆으로 디뎌도 낙타와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질 판이라 매우 겁이 납니다. 낙타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며 걸어갑니다.
그렇게 위태위태하며 올라가는데 갑자기 옆에서 고삐를 잡고 함께 오르던 원주민이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낙타는 그저 본능대로 걷기만 합니다. 정상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원주민들이 끝까지 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불안해하며 낙타 안장에 꼭 붙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낙타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아슬아슬 벼랑 가장자리로만 걷지만 불안해 해 봐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낙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늘의 별들을 보며 야경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두려움을 넘어서 믿음을 가지게 되면 편한 마음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낙타가 그렇게 믿을 동물이라면 우리의 주님이야 우리 인생을 얼마나 평화롭게 만드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갈릴래아 호수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물 위를 사람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고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런 두려움이 정말 하느님을 만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첫 번째 반응입니다.
저도 성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새벽에 술 마시고 성당에 올라와 성모님께 기도하려 했는데 성모님의 동상이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술이 취하여 그런 줄 알고 더 자세히 보았지만 그 분의 살갗은 정말 사람의 살처럼 보였습니다. 성모상 앞에서 성모님께 기도하는 것이 너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말 성모님처럼 보이니 가슴이 털썩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감히 동상을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 다시 눈을 들었더니 이젠 동상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는 주님께서 정말 나를 불러주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고 결국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렇게 1년간의 고민은 끝을 맺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보고 겁을 먹었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그 분을 영접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순풍에 돛단 듯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불안하고 풍랑을 만난 배와 같이 흔들리고 있다면 아직은 예수님을 만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 분은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내 자신이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 믿음을 둔다면 그 분은 착한 낙타처럼 우리를 안전하고 평화롭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실 것입니다. 내가 풍랑 속에서 노를 저으며 두려워하고 고생하는 삶을 넘어서 나에게 다가오고 계신 주님을 마음을 열어 영접해 드립시다. 그러면 그 분이 풍랑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인생을 평화롭게 즐기며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해 주실 것입니다.
<<짧은 묵상>>
어떤 분에게 성체조배를 하라고 했더니 성체조배 많이 하는 사람도 잘 사는 것 같지 않더라고 말하며 성체조배를 많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하는 것 같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살아가지 못한다면 실제로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사람을 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더 나쁘게 살 사람이었는데 그나마 기도를 해서 그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산’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본래 하느님이시기에 물위를 걸을 수 있는 분이셨지만 당신의 ‘인성’을 ‘신성’과 결합시키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산’에 오르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세상과 멀어져 홀로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인성보다는 ‘신성’이 더 빛났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모세도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 후 얼굴에서 빛이 나서 사람들이 그를 보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렇게 산은 인간의 본성을 신성화하는 장소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야만 우리 죽을 몸이 영원히 죽지 않을 영원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성인들의 몸이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이유는 그 분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 자신들의 인성을 거룩하게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거룩한 에너지를 얻고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변화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자신도 모르게 변화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마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에 저절로 많은 열매가 열리듯이 우리는 다른 노력보다 우선해서 그리스도께 붙어있으려는 노력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배를 저어 십여 리쯤 갔을 때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
-양승국신부-
<연꽃>
몇 년 전 이맘때 머리 털 나고 처음으로 배낚시란 것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상당한 투자를 해야되는 것이 배낚시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로 배 낚시꾼들이었기에 예전부터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이 배낚시였습니다.
이른 새벽, 한 작은 포구에서 출발하는 소형어선을 탔습니다. 약간은 쌀쌀한 날씨에 바람마저 쌩쌩 부니 파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낚시의 왕초보였던 제가 느꼈던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가 30분 정도 큰바다를 향해 나아가자 중심을 잡지 못해 어질어질해하던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노랗게 변하면서 본격적인 배 멀미를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도저히 갑판 위에 서있기가 힘들어진 사람들은 배 가장 밑바닥에 있는 선창으로 들어가 길게 드러눕고 말았습니다.
집채만한 거센 파도가 솟구치는 바다 위,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해(深海)위에, 심하게 요동치는 소형어선에 타있던 저는 큰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동일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배낚시라면 이력이 나있던 전문직 어부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저어 호수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호수라고 하지만 바다라고도 불릴 정도로 큰 호수였던 갈릴래아 호수였기에 때로 기류의 변화에 따른 큰 풍랑에 일기도 했습니다.
마침 밤낚시를 하려던 제자들이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가던 중에 큰 역풍을 만나 어둠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곤란한 순간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제자들이 탄 배를 향해 걸어오십니다. 안 그래도 역풍을 만나 잔뜩 겁을 집어먹어 갈팡질팡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자 유령인줄 알고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인간역사 안으로 완전히 육화하신 한 인간이셨지만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으셨던 분이었다는 생각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자연스런 한 인간으로 사셨지만 또 한편으로 언제나 영적, 초월적 삶을 사셨습니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상, 인간적인 사고방식, 가치관을 초월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역시 한 차원 승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통교수단만을 이용해서 그분을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 초월적인 예수님이기에 영적이고 초월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사셨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신 분, 진흙 속에 사셨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사신 분, 인간으로 사셨지만 하느님이셨던 분,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어제는 봉성체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성당에 나오실 수 없는 분들이 영성체를 하실 수 있도록 직접 찾아뵙고서 성체를 영하여 드리는 날입니다. 이렇게 한 달에 한 번 봉성체를 할 때면 씁쓸한 마음이 생기곤 합니다. 특히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녀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모습을 볼 때면 더욱 더 안타깝지요.
물론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연세 드신 분을 모신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이 먹는 것에 예외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죽음이라는 시간에 가까워지는 것,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나는 절대로 나이먹지 않을 거야,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모두 불가능한 헛소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헛소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지 연세 많으신 분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보면 아마도 나이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점점 외모 지상주의로 나아가는 세상, 그러다보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힘이 없어지고 젊어졌을 때의 아름다움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원래 우리나라의 정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 선조들은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갑잔치, 칠순잔치를 크게 하면서 동네방네 소문을 내서 함께 모여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힘든 세월을 거쳐 온 어른들을 무조건 존경했고 그들에게 모든 특권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어느 사이엔가 젊음이 특권이고 나이 들어가는 것이 죄짓는 일처럼 되어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선진국일수록 강하다고 합니다. 선진국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기 학대와 우울과 싸우면서 외롭게 노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동양의 사고는 이렇지 않습니다. 삶을 관조하면서 순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느긋하고 대범한 마음으로 나이 듦을 더욱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라며 받아들였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이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조금의 노력으로도 우리들이 원하는 목적지에 쉽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을 과연 하고 있을까요? 이 사회의 새로운 소외층이라고 말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외면하는 그 모습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왜 모를까요?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 먹는 것은 슬프고 외로운 일이 아닙니다.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으로 축하할 일입니다.
부모님께 사랑의 전화를 하도록 하세요.
마음속 계산기
- 김우정 신부-
기도를 드리다 보면 이따금 좋은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기도 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거나 은총의 놀라움에 눈을 뜰 때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확신과 보람을 느낍니다. 반대로 하느님 사랑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분을 드러내는 기도의 목적에서 벗어나, 이런 체험을 하는 것에만 매달려 무언가 자극이 될 만한 것을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의 깊이였지만,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에게 빵을 먹이신 예수님의 모습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우리도 이런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총을 보기보다 우리가 신앙을 가짐으로 인해 생기는 이익에 더 관심을 두거나 무언가 감성적인 것에만 더 집중해서 본질을 소홀히 하곤 합니다. 이런 신앙은 본질이 아니라 선택 사항이 됩니다. 신앙이 선택 사항이 될 때, 우리는 주님을 못 박았던 사람들처럼 미련 없이 주님께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이신 하느님께 당신을 일치시켰던 주님께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계산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산은 아직 미숙하고 서투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계산기를 주님께 맡겨드리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찾아주시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신앙은 때에 따라 선택하는 사항이나 옵션이 아니라 진실한 가치를 지닌 본질로 탈바꿈해 나갈 것입니다.
인생은 항해
-오상선신부-
인생은 항해다. 이승의 항구에서 출발하여 하늘나라라는 목적지 항구에 이르는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다.
바다는 호수와 달리 마냥 잔잔하지만은 않다. 거센 풍파에 시달려야 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그래서 난파될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있어 선장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훌륭한 선장이 있다면 그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 그렇게 염려스럽지 않다.
우리 인생여정에 있어서도 우리가 어떤 선장을 모시느냐에 따라 우리 여행의 안전이 보장되고 우리가 바라는 그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려 있다.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거센 바람을 만나게 되어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 주님께서 등장하신다. 당신 없이 항해하는 제자들이 안스러워서 늘 대기하고 계신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두려워 한다.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고 격려하신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선장으로 모셔들이려고 한다. 그순간 배는 이미 목적지에 닿게 된다.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는가? 제자들의 어려움 속에 언제나 함께 지켜보고 계셨던 예수님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리고 끙끙대며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위험에도 불구하고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시는 순간 이미 당신께서 주시고자 마련해 두신 하늘나라라는 선물을 허락하신다...
그렇다! 우리는 가끔 인생여정 동안 힘들고 어려운 일을 봉착하게 된다. 인생살이가 겁이나고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을 잊지 말자.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에게 늘 다가오시는 그 주님을 잊지 말자.
우리가 할 것은 그렇게 다가오시는 참 주님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참 선장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먹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온갖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다.
그분만이 우리의 여행길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유일한 선장이시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정에서 그분이 함께 하셔야만 우리는 안전하게 그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
그 배를 이미 타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이에 감사하자...
<독서> : 약점과 허물을 통해서도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 - 경규봉 신부-
유다인들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수효는 급증하였다. 그런데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인들(다른 나라 출신의 유대인들)이 본토 유대인들(이스라엘 땅에서 출생, 성장한 이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매일의 식량 배급이나 생필품 지급에서 그리스 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본토 유대인 과부들보다 푸대접을 받거나 누락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 계 유대인들과 본토 유대인들은 상용어가 서로 달랐으므로 자연히 따로 모이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며 이런 와중에서 서로 편견과 불평들을 토로했을 것이다.
당시 사도들은 교회의 중심인물로서 교회 공동체를 지도하고 감독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이들은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임의대로 처리하지 않고 공동체의 회의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논의된 결과에 따라 그 문제를 처리하였다.
그런데 사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0)는 사명이었다. 그러나 신도들의 증가로 인하여 교회 내의 구제 사업과 행정적인 일들이 늘어남에 따라 사도들은 복음전파 이외에도 잡다한 일들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자신들이 맡은 사명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교회 안의 행정 처리와 말씀 전하는 일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위하여 사람들 가운데에서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출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맡을 사람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도들 안에서 인정받고 증명된 평판 좋은 사람이어야 하며, 성령이 충만함으로써 성령께서 주신 은사와 함께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바쳐 하느님의 일을 올바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지혜가 충만함으로써 행정과 사무 및 생활에 필요한 실천적인 지혜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을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일곱 사람을 선발했는데, 유대인들에게 있어 7이라는 수는 거룩한 수 또는 완전한 수로 여겨졌으므로 임의로 특정한 수를 택해야 할 경우에는 대부분 7이란 수를 택하였다. 또한 유대 관습상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7인 위원회를 구성했고, 유대 공동체 지역 책임자들이 7명으로 구성되었으므로 예루살렘 교회는 이러한 관습을 따랐던 것이다. 선발된 일곱 봉사자는 교회 안의 일을 맡음으로써 갈등을 해소시켰으며, 사도들은 기도와 복음 전파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널리 전파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질적으로 계속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믿는 자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심지어 유대교의 많은 사제들까지도 주님을 믿게 될 정도로 교회는 날로 커갔다.
초대교회 신도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진 것을 내어놓고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4,32), 오늘 독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진 것을 나누는 과정에서 갈등과 불화도 있었으며, 아폴로 파나 베드로 파, 바울로 파로 갈라지는 등 파당도 있었다(1고린 1,12).
이처럼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인간적인 허물과 약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질적 양적으로 성장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며, 인간적인 허물과 약점은 교회를 정비하는 기회가 되고, 교리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거룩한 몸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모임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적인 거룩한 면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지닌 약점과 허물도 보일 수밖에 없다. 교회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완성을 향하여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내의 잘못과 약점을 볼지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자. 오히려 악을 통해서 선을 이끌어내시는 하느님께서 교회를 더 발전시키실 것임을 굳게 믿고 교회 안에 머무르자. 사람을 보지 말고, 하느님을 보고, 사람에게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 기대하면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살아가자..................◆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의 모습은 어둠. 고통. 고난의 바다 - 고원일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이시고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신 뒤 군중을 모두 돌려보내고 하느님께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배위에서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시고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한 폭의 그림을 보듯이 복음을 묵상해 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제자들은 조금 전에 보았던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먹은 빵에 대한 이야기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보았던 기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편안하게 배에 앉아서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강해지면서 파도가치고 배가 흔들리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희망으로 함께 하는 예수님은 옆에 없고 상황은 나빠서 파도가 배를 덮쳐 전복시킬 것 같습니다. 불안해 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속을 걸어서 오십니다. 처음에는 파도의 두려움과 함께 그 실체도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실체에 대한 확인이 되고 나서는 다시 평화롭게 됩니다.
한편의 짧은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호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배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은 우리들 삶의 목적지 입니다. 시간적인 상황을 연출한 배경들, 어둠과 거센 바람 그리고 사나운 파도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세상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던 세상의 모습은 어둠이며 고통이며 고난의 길입니다. 그 길에 예수님께서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예수님이 오시자 우리들의 배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은 우리들이 가야하는 목적지에 도착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두려움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느꼈을 때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체험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나서부터는 밝은 빛이 되었고 삶의 목적지인 가파르나움에 도착 한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힘들어하며 고통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며 어둠 속에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빛을 보고 싶지만 현실에서 빛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서 이야기하는 신앙의 모습은 어떨 때는 호강에 바친 사람들 끼리 하는 넋두리 같기도 합니다. 나에게 준 십자가만이 제일 크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은 잘 돌보시는데 나는 영 돌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싫어지기도 하고 급기야는 존재하지 않는 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함께 하십니다. 인간들 서로서로가 주님께서 주신 많은 은총의 선물을 나누지 못하고 혼자 차지하려는 욕심에서 만들어진 힘들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 당신도 아파하시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두 공평하게 은총을 주시지만 인간들이 나누지 못하는 욕심 때문에 세상은 힘들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힘들고 어렵게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보호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다양한 배의 모습 속에서 조금 큰 배는 작은 배를 보호하고 작은 배는 서로서로 도와가며 이겨내면 충분히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곳도 자신만을 위하다보니 배 옆을 지나는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혼자서 외쳐대며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목적지 가파르나움을 향해 나아가면서 끼리끼리 분리된 모습이 아닌 모두가 함께 나누는 모습 속에서 사랑하며 나아갈 때 우리와 함께 그 강을 지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분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복음이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바람 치는 어둠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물위를 걸으신 것과 같이 아무 희망을 찾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모든 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함께하시어 행복과 평화의 땅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들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곳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향하여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문을 닫은 마음을 넘어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함께 이겨내려고 땀 흘리는 그곳에서 당신은 함께 축배를 들것입니다.
가파르나움은 우리들이 함께 땀 흘리는 그 현장입니다. 오늘 나만을 위한 욕심 때문에 함께하는 가파르나움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신동원 신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제가 어렸을 때 주변에서나 텔레비전에서 가끔씩 보았던 마술들이 얼마나 신기하고 신비스러운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마술사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마음만 먹으면 다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 아주 뛰어난 존재로 여겨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빠른 손놀림이나 우리들의 눈을 속이는 눈속임이라는 것을 알고는 어렸을 때 가졌던 마술에 대한 신비함과 마술사에 대한 존경심과 위대함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마술사들이 보여주는 그 마술의 방법들을 알게되었을 때는 마술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세상의 여러 가지 신기한 일들이 정말 신비스러운 능력을 가진 사람이나 신이 보여주는 마술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신비스런 기적들, 베일에 감춰진 비밀을 체험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신비를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재빠른 손놀림도 아니고, 우리들의 눈을 속이는 눈속임도 아닌 하느님과 예수님의 권능으로 우리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마술의 신비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어제 들었던 빵의 기적이나 오늘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마술사들이 보여줄 수 있는 손놀림이나 눈속임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존재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며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신비이며 기적들입니다. 우리들의 눈으로는, 우리들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이기에 더욱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기적들은 신비스럽고, 위대하기만 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다른 여러 가지 기적들이나 신비스런 마술보다도 더 깊은 신비에 쌓여있는 우리에 대한 사랑의 마술입니다. 마술의 신비가 드러난 그래서 허무하고 허탈해 하는 세상의 마술사들의 그런 마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그지없으신 사랑의 마술로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마술입니다. 그러기에 신비스럽고 신기한 마술, 기적에 대해 믿음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더 없는 기쁨과 희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예수님의 이 신비스런 마술을 배워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고통과 시련 - 김훈일 신부-
흔히 인생을 가리켜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바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항상 순풍만 부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역풍을 만나기도 하고 거친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아서 너무 조용한 바람이 불어도 재미없고 너무 센 바람이 불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바람이 불어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갔으면 하는 바람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고 없이 다가오는 고통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고통은 누구에게나 닥쳐온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큰 배를 만들고 기술과 경험이 풍부하다 해도 거친 파도를 모두 이겨낼 수 있는 배는 없습니다. 두 번째,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온다는 사실입니다. 예고 없이 닥쳐오는 고통을 막아 보고자 우리들은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모든 고통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신앙생활을 잘 해도 고통은 닥쳐온다는 사실입니다. 너무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자리로 맞이하면 됩니다. 비록 풍랑이 쳐서 배는 흔들릴지라도 주님이 함께 있는 한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분은 물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재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삶에 함께함으로써 안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배는 결코 좌초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창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다가 바람이 불어 호수의 물결이 사나워지는 어려움에 빠져듭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배 있는 쪽으로 다가오시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어두워진 밤, 물결이 높이 이는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셨으니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한 것이지요.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친히 그들의 목적지까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저는 이런 묵상을 하게 됩니다. 고통의 순간에 같이 있는 일꾼, 고통을 같이 나누는 일꾼, 미풍 속에서 뿐 아니라 격랑 속에서도 같이 있는 일꾼,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일꾼, 위험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일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격랑을 잊고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닿을 수 있는 이런 일꾼 몇 명만 있어도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텐데..
형제 자매 여러분, 사실 우리 주위에 스스로 일꾼이라고 하면서도 일하지 않는 일꾼들, 책임지지 않는 일꾼들, 여기저기에 줄을 서서 기생하려는 일꾼들, 강 건너 불난 집을 걱정하는 일꾼들, 자신에게 권위를 내세우는 일꾼 같지 않은 일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하루 우리 지역과, 우리나라에 주님을 닮은 일꾼을 주십사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립시다.
- 홍성만 신부-
'나'에게 허락된 체험은 더 깊은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내용으로, 그 위치가 흥미롭습니다. 빵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과 빵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중심으로, 먹는 빵은 생명의 빵으로 건너가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군중의 분위기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겨 많은 제자들이 떠나는 분위기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위치인데 그 내용은 빵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물구하고 오늘 복음의 내용인, 거센 바람이 불고 사납게 물결치는 어두운 밤에 호수 위를 걸어오셔서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분명하게 그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에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분위기에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겨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까지도 떠나는 분위기에 앞서 예수님은 당신을 드러내셔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에 대한 체험을 제자들에게 심어 주셔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에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로 당신을 배척하는 험악한 분위기를, 이 체험으로 이겨 낼 수 있기를 기대하시는 예수님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체험은 주어지는 것으로, 믿음에 대한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채험은 주어지는 것으로, 믿음을 깊게 하는 근간이 됩니다. 나에게 체험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당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드립니다.
당신을 따르기에는 늘 부족한 '나', 당신이 허락하시는 체험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 더욱더 굳은 믿음으로 당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저에게 강복하소서.
든든한 예수님
-김유철 신부-
저녁에 제자들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뒤로하고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풍랑이 심하게 일었습니다.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이 풍랑으로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 다가오십니다.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유령으로 착각하고 겁을 먹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20). 어느덧 배는 목적지에 닿아 있었습니다. 호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면 저기 끝에 목표지점이 보이고 쉽게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막상 가기 시작하면 뜻하지 않은 풍랑들이 앞길을 가로 막습니다. 어떤 땐 인생을 걸 정도로 크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조금만 힘을 더해준다면 이겨낼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알면서도 지는 경우가 생긴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때 목숨을 걸고 나타나는 분이 계십니다. 힘껏 내 생각으로 배를 저어 갈 때에는 옆에서 조용히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신 분, 격랑 속에서 허둥댈 땐 안정을 찾을 때까지 대신 키를 잡아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8,25)라고 외칠 때 항상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잊지 맙시다. 항상 마음속에 모시고 믿으며 삽시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차공명 신부 -
우리에게 시각과 청각의 중복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인간승리의 본보기로 많이 알려진 미국의 헬렌 켈러는 사실 훌륭한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중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방금 숲을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뭐 특별한 것을 못 보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헬렌 켈러는 친구와 독자들에게 묻는다. 아니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보지 못하는 나도 촉감만으로도 나뭇잎 하나하나의 섬세한 균형미를 느낄 수 있고 봄에 막 움튼 새순이라도 만져질까하고 하고 나뭇가지를 만지다가 재수좋게 노래하는 행복한 전율을 느낄수도 있는데... 이어서 그녀는 말한다. "때로는 손으로 느끼는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하는 갈망에 사로잡힙니다. 촉감으로 그렇게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데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룰까요? 오랫동안 숲 속을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보겠습니다. 찬란한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그날 밤 아마 나는 잠을 자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을 지켜 보겠습니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꿈꾸던 것을 우리는 매일 너무나 싶게 이루고 산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기쁨이나 감사함은 너무나 부족한게 사실이다. 물론 간혹 자연의 아름다움에 놀라워하지만 말이다. 간혹 매일 보는 일상에서도 깜짝 놀랄만큼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매일 지나다니는 길의 배경산의 전경에 놀라고 매일 사는 방의 창가로 비춰지는 따뜻한 햇살에 놀라기도 한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범상치 않은 출현에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항상 같이 생활하고 이야기 나두던 예수님이지만 그 놀라운 모습에 낯설음을 느낀 듯하다. 성서본문을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그들이 두려워한 예수님은 다른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 알고 있던 바로 그 예수님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신다. 헬렌켈러는 장애인이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슴시리게 느켰지만 모든 것을 직접볼 수있는 사람은 그 똑같은 자연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똑같은 성경말씀 똑같은 신앙생활속에서 예수님을 만날수도 있고 못 만날수 도 있는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님을 첨에 못 알아보았듯이, 또 오늘 복음처럼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의 낯선 모습에 두려움을 느켰듯이 말이다.
예수님의 목소리
-이세영 수녀-
제자들이 험한 풍파를 헤쳐 나갈 때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항상 어려운 상황에서 힘이 되어주시기 위해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오히려 혼란스럽고 어려운 때일수록 쉽게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고 방황하고 갈등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난해 황우석 박사로 인해 사회적으로 많은 논쟁이 일어났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난치병 환자의 입장을 생각하며 황 박사를 지지해야 한다는 의견과 생명윤리 입장에서 근본적인 생명 존중 가치를 주장하는 의견이 갈등을 빚어내며 일부 교우들도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때 의견을 내세우기 전에 먼저 신중히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교회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한 분들의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은 먼저 교회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새겨듣는 것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교회 내 신문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교회의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리의 성령이 내 안에서 힘차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거센 풍랑과 역경에 휩쓸려 서로 반목하고 갈등할 때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예수님의 목소리를 기준으로 진리 안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양승국신부-
<하느님의 선물, 두려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인간은 ‘참 다양한 유형의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슬슬 강도를 더해가는 나 자신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에 대한 두려움, 끔찍한 병고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언젠가 나이를 더 먹고 나면 어김없이 다가오게 될 노화, 고독, 소외감에 대한 두려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삶의 무대 뒤로 물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저 역시 나이 탓인지, 아니면 계절 탓인지 시도 때도 없이 막연한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살다가 갑자기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어쩌지?’하는 느낌과 함께 다가오는 두려움, ‘나이는 점점 먹어가는 데, 인생 헛살았구나’ 하는 자책감에서 오는 두려움, 때로 충만한 행복함을 느낄 때조차도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하는 느낌의 두려움...
다양한 형태의 두려움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하는 것이 우리네 삶인가 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위험에 적절히 대응하도록 도와줍니다. 두려움은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합니다. 결국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안전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본다면 두려움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두려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다 느끼는 자연스런 감정이며 인생에 유용한 감정이 분명합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 삶은 강건해집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두려움은 우리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용감한 사람이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려움을 제대로 응시하고, 적절히 대응해나가며, 적당히 조율해나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어김없이 다양한 유형의 두려움이 다가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두려움에 대응해나가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과 약간 달라야만 합니다.
우리를 두려움 앞에 당당히 맞서게 하는 든든한 산성이자 보루, 의지처는 당연히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함으로 인해 우리는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한 배를 탔다는 인식으로 인해 우리는 그 어떤 세상의 풍랑 앞에서도 두렵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여행길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최종적인 두려움의 대상이십니다. 그분 사랑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은 없습니다. 그분 자비의 품 밖으로 벗어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은 세상에 다시 또 없습니다. 하느님과 비교할 때 다른 모든 두려움의 대상들은 시시해져 버립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이외에 그 어떤 대상으로부터도 두려움을 느끼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어떤 두려움의 대상으로부터도 지배받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외에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앙인들 역시 두려움 앞에 힘겨워 합니다. 신앙인 역시 어쩔 수 없는 한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두려움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방책은 굳건한 신앙입니다. 하느님께 향한 온전한 신뢰심입니다. 철옹성 같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우리 삶 안에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되는 순간 두려움으로 인해 발생한 불안감, 초조함, 공포심이 조금씩 물러나 앉게 됩니다. 그러한 요소들이 물러난 자리에 희망, 용기, 담대함, 확신과도 같은 긍정적인 느낌들이 자리를 잡게 되지요.
이런 이유로 우리의 믿음은 항구해야 합니다. 오늘은 믿음이 강건했다가 내일은 꺼진 숯불처럼 사라지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장해나가는 믿음, 나날이 튼튼해지는 믿음, 강인해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마치 근육과도 같아서 자주,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매일 반복적으로 관리를 해줘야 하고, 발달시켜줘야 하고, 트레이닝을 시켜줘야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 위로의 말씀에 따라 우리의 모든 근심, 두려움을 그분께 맡겨드리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편안하기를 바라십니다. 걱정하기보다는 주님께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두려움 대신 믿음을 선택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은혜로운 사랑의 역사를 계속해나가실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정민수 신부-
◆예전에 시내버스나 택시를 타면 가끔씩 눈에 띄는 사진과 문구가 있었습니다. 웬 소녀가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과 그 옆에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가 적힌 사진. 요즘처럼 이 사진이 마음에 와 닿은 적이 없습니다. 이유는 자연적인 재해와 인간적인 재해로 말미암아 우리네 인생이 참으로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해일로 소중한 생명을 잃거나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돈벌이에 눈멀거나 호기심 가득한 군상들이 만들어 내는 잘못된 기사와 사진이 가상공간을 떠돌아다님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매도되어 정신적인 죽음을 맞이하곤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겪는 것처럼 모진 풍랑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혼돈과 위협적인 세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삶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만은 예외일 것이다’, ‘나는 모를 것이다’, ‘이것은 믿을 만한 것이다’라는 착각 속에 그런 일을 벌이는 군상 속에 슬며시 자신을 밀어넣곤 열심히 다른 이들에게 감염시킵니다. 자연재해나 인터넷에 의한 피해나 모두가 따지고 보면 인간들의 무사안일과 이기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데 곧잘 하늘을 원망하거나 애꿎은 사람들을 원망하곤 합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또다시 사람에게 믿음을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고는 좌절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내 맘 같기만 하다면야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께서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고 하시며 모든 상황을 평정하시고 당신이 누구신지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심에 희망을 가집니다. 혼돈과 위협적인 요소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예수님, 오늘도 무사히!
예수님의 神通力
-강영구신부-
예수님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신통력(神通力)을 여러 곳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 위를 걷기도 하고(요한 6,16-21), 풍랑 치는 바다 위에서 잠을 주무시기도 하고, 말씀 한마디로 사나운 파도를 잠재우시기도 합니다.(마태8,23-27)
저는 요즘 또 다른 신통력(神通力)을 목격하며 감격하고 있습니다. 겨우내 죽었던 것 같던 벚나무에 꽃구름이 피어나고, 어느 새 느티나무는 연초록(軟草綠) 잎사귀들을 날개처럼 펼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신통력(神通力)도 놀랍지만, 저 벚나무와 느티나무가 보여주는 신통력(神通力)도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린 분이고, 꽃피는 벚나무나 기지개 켜듯 연록(軟綠)색 잎사귀를 펼치는 느티나무는 대지(大地) 깊이 뿌리내린 나무들입니다. 뿌리 뽑힌 나무에서 꽃이 피거나 싹이 돋는 법이 없습니다.
당신도 하느님께 귀의(歸依)하여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리십시오. 당신의 인생에 아름다운 꽃이 피고 싱싱한 잎이 돋아날 것입니다.(一明)
인생항해의 안전한 항로이신 예수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일곱 개 기적사화 중 다섯 번째에 속하는 물위를 걸으신 기적을 들려준다. 일곱 개의 기적사화는 ①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2,1-11), ② 고관 아들의 치유(4,46-54), ③ 베짜타 못가의 병자치유(5,2-9), ④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6,1-15), ⑤ 물위를 걸으신 기적(6,16-21), ⑥ 태생 소경의 치유(9,1-12), ⑦ 죽은 라자로의 소생기적(11,1-44)이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은 마태오(14,22-33)와 마르코(6,45-52)복음에도 보도된다. 요한, 마태오, 마르코복음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다음에 오늘 기적사화를 제각기 배치하고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서로 다르다.
원전(原典)으로 통하는 마르코복음(6,45-52)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에 위치한 베싸이다로 보내신다. 그리고는 혼자 산에서 기도하신다. 그 동안 날이 저물어, 즉 밤이 되었는데도 배는 역풍을 만나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었지만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신다. 시간은 흘러 새벽 4시쯤이었다. 이에 제자들이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른다. 모두가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50절)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도 그쳤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는 빵의 기적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복음서는 보도하고 있다. 마르코는 이렇듯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권능을 부각시키고 있다. 물위를 걸으시고, 예수님 앞에 풍랑도 복종하는 이변(마르 4,35-41 참조)을 통해 명실공히 예수님은 인간과 자연 위에 군림하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저 놀라고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음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미성숙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마태오복음(14,22-33)은 마르코복음과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벌어진 독창적인 사건을 첨가했다. 즉, 베드로를 부각시켜 예수를 향하여 물위를 걷게 하지만 거센 바람 때문에 물에 빠져들게 만든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그의 약한 믿음을 탓하신다. 예수와 베드로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친다. 그 때 배 안에 있던 제자들이 "주님의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33절) 하고 고백한다. 마태오가 이 사건을 원전에 덧붙이고 다른 결론을 유추한 까닭은 마태오복음공동체의 현실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이는 곧 마태오복음공동체의 당시 교회적 상황과 미래 교회의 교회론적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요한복음(6,16-21)은 원전의 내용을 대폭 줄여 기적의 다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기적의 맛을 본 사람들이 자기네들 방식으로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시도에 반(反)하는 예수의 태도(6,15)로 시작된다. 빵의 기적이 있은 후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해 가셨고, 그 날 저녁 무렵에 제자들만 배를 타고 호수 북쪽 가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었다. 어둔 밤이 되었음에도 예수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셨고, 배는 거센 바람과 사나운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래도 배는 힘들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로 다가가신다.
이에 제자들이 겁에 질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20절)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려 하는 순간, 그들은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닿았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6장을 통해 '생명의 빵'에 관한 새로운 신학을 모색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그 가운데 삽입함으로써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라는 구약의 하느님 현존(출애 3,14)을 예수님께 적용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며, 그 현존이 체험되는 곳이며, 하느님의 놀라운 생명이 선사되는 곳이다.
하루의 대낮에 빵의 기적이 있었으나 그 대낮이 사람들로 하여금 표징의 참 뜻을 이해시키는데는 밝기가 충분하지 못했다.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 모두에게도 어둠이 깔려있다. 제자들은 분명 군중과는 다르지만 예수께서 부재(不在)하여 계신다는 점은 같다. 예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어둠과 두려움뿐이다. 어둠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항해(航海)는 목적지에 이를 수도 없다. 그러나 빛과 안전함을 베푸시는 "나는 나다"이신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항해는 우리의 인생을 영원한 생명의 목적지로 이끌어 줄 것이다.
생명자체이시며, 이 생명을 우리 세상에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항로(航路)가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나다"이신 그분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확신이다. 이런 믿음과 확신이 없이는 예수가 한낱 '유령'(마르 6,49; 마태 14,26)으로 착각될 수도 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 16-21) -유 광수신부-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 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다. 무슨 단어인가??? "배"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사용되었다.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가파르나움으로 떠났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배는 어느 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라는 말로 끝난다. 배는 무엇인가? 배는 하나의 교통 수단이다. 물건을 실어 나르거나 사람들을 태워 목적지에 건너다 준다. 배를 타고 먼 여행을 하다보면 순항으로 즐거운 여행을 할 때에도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높은 파도를 만나 생명의 위험까지 당할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여행자이다. 때로는 순탄한 여행을 할 때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 고생을 할 때도 있고 심하면 생명의 위험까지 당할 때도 있다. 나는 지금 무슨 배에 몸을 싫고 있는가? 내가 타고 있는 배는 안전한가? 무사히 항구에까지 데려다 줄 수 있는 배인가? 순항 중인가? 아니면 높은 파도를 만나 표류하고 있는가? 어떤 이는 재물이라는 배를 타고 있고, 어떤 이는 권력, 명예, 안주, 게으름, 병마와의 싸움, 이기심, 자기 자신이라는 배를 타고 있다. 아무튼 우리가 무슨 배를 타고 있던 내가 타고 있는 배는 세월이 흐른 만큼 나를 어디론가 데려 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배는 어떤 배인가? 어느 배에 내 몸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가? 그 어떤 비 바람이 몰아쳐서 큰 풍랑이 일어나도 안전하게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배는 어떤 배인가? 많은 사람들이 가장 안전한 "예수"라는 배를 타지 않고 예수 이외의 다른 배를 타고 있다. 앞에서도 열거하였거니와 "나"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환경"이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사람"이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이고 성직자 수도자도 마찬가지이다. 말로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하느님"이라는 배를 타고 있지 않고 다른 배를 타고 있다. 그래서 조금만 상황이 바뀌어도 금방 흔들리고 괴로워 한다. 즉 나를 바쳐주고 있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주위 환경, 자기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이 나를 바쳐주고 있기 때문에 마치 바람을 만난 배가 풍랑에 까뿔리듯이 내 인생이 그것에 의해 좌지 우지 된다. 정말 우리가 "하느님"이라는 배를 타고 있다면, 하느님께 내 몸을 완전히 맡겼다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치 어린이가 어미 품에 안겨 평안히 잠을 자듯이 그렇게 편안함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시편 130,2-3)라는 시편작가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의 상황이 무척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제자들의 이런 어려운 상황을 "이미 어두워졌는데도"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어두움, 또는 밤이라는 표현은 요한이 자주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 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어떤 어려움인가?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는 것과 마침 그 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고 있어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다. 왜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앞에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을 아직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제자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수준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시공간을 초월하시며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느님으로 알아 보지 못하고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함께 있지 않으면 또 자기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믿음이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는 말씀 한마디로 바다와 바람까지 잠재우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님이 아니시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아직 초보단계이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금방 넘어지고 무너지는 미숙한 어린이 수준의 믿음이다. 성숙한 믿음은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요, 초월하는 믿음이다. 즉 주위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 하는 믿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믿음이다.
예수님이 앞에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단순히 배고픈 이들을 먹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제정될 성체성사에 대한 일 단계 교육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밀떡이 단순한 밀떡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밀떡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몸으로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열리기 위해서는 아직도 걸어가야 할 신앙여정이 남아 있다. 요한은 빵의 기적을 전해 주고 바로 이어서 오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과연 제자들이 빵의 기적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았는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보았는가를 시험하기 위함이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았다면 절대로 지금 자기들의 눈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일어났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은 인간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에서든 현존하시고 모든 어려움을 없애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초보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초보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교육시키시는가? 어떻게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가? 어떻게 당신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접근하시는가?
첫 번째는 그들이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통해서 다가 가신다. 두 번째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그들이 평소에 많이 들었던 낮 익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청각적으로 다가 가신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가셨다는 것은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기 9,8)라고 구약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았다면 호수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어야 할 텐데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른 공관 복음에서는 유령인줄 알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두려움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청각적인 표현도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모세가 하느님께 "당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출애3,13)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나다."라는 표현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 양식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단계적으로 제자들의 믿음을 이끌어 주시면서 그들의 신앙 여정을 동반해주신다.
우리들이 생활하면서 어두움을 만날 때가 있다. 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 듯이 많은 시련들이 우리들을 뒤흔들 때가 있다.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극복하는가?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의 신앙은 어느 수준에 머물고 있었는가?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주위 상황을 탓할 때도 있고, 또 주위 사람들에게 그 탓을 돌릴 때도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지 못한데 있다. 우리의 신앙이 아직까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이 되도록 질적으로 양성되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믿음으로 양성되도록 꾸준히 영성 생활을 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신앙은 맨 날 제 자리 걸음을 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20년 30십년 신앙생활을 하였어도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미성숙한 신앙생활이라면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큰 고통과 시련의 파도 앞에 금방 휩쓸려 갈 것이며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도 호수 위를 걸어 나에게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자. 그리고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분명히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당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또 청각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이다. 오늘 나에게 다가 오시는 주님은 어떤 모습인가? 또 오늘 나에게 당신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들려 주시는 주님의 소리는 어떤 소리인가?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주님의 기적에서 보는 천주성(신성) †
오늘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7가지 기적 중 다섯번째 기적인 '물위를 걸으시는 주님' 입니다. 4복음서 중에서 기적사화를 많이 언급한 성서는 마르코복음입니다. 마태오와 루가가 주님의 가르침을 더 강조하고 있다면 마르코는 기적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복음서 기자들이 이토록 주님의 기적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서 기자들이 그 기적들을 주님이 메시아(하느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것으로 증거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신앙학습을 위해 복음서에 기록된 기적들과 그 의미에 대해서 간단하게 공부하고 '물위를 걸으시는 주님'편인 오늘복음을 묵상하겠습니다. 우선 4복음서에 나타난 기적에 대한 설명입니다.
1. 4복음서에 나오는 기적 7가지(요약)
-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 -> 질적 변화(물질초월) - 고관 아들의 치유 -> 질적 변화(공간초월) - 베짜타 못가의 병자치유 :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 질적변화(시간초월) -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 5,000명을 먹이심 -> 양적변화(물량초월) - 물위를 걸으신 기적 -> 자연법칙 초월 - 태생 소경의 치유 -> 운명초월 - 죽은 라자로의 소생기적 -> 죽음초월...입니다. 이렇게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들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그 신성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학습자료] - 주님의 기적에 대한 신성적 분류
(1) 이사야적인 기적들
"이사야적인 기적"이란 이름은 (마태 11,2-6)과 (루가 7,18-23)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성구를 보면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께 사람을 보내서 이렇게 묻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그때에 주님은 "내가 메시아다" 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전하라(마태 11,5)." 이것은 바로 오래 전에 예언자 이사야가 했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미 오래 전에 예언했습니다.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이사 35,6, 42,7, 61,1)
유다인들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이사야가 언급했던 이러한 "기적과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주님께서 눈 먼 자와 귀머거리, 그리고 벙어리와 다리 저는 병자를 고쳐 주신 사실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적들은 "예수께서 누구인가?" 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기적을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2) 자연을 주관하는 기적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시고, 물위를 걸으시며, 몇개의 빵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적들은 예수께서 창조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큰 바다(호수)와 심연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해양 민족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통해서 화물을 실어왔습니다. (묵시 21,)에 보면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 대해 말한 후에 "바다가 없어졌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바다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바다의 폭풍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시편 65,7)은 하느님을 "설레는 바다, 술렁이는 물결...,을 가라앉히시는 분"이라고 찬미하였으며, (시편 89,9)은 "뒤끓는 바다를 다스리시며 파도치는 물결을 걷잡으십니다"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바다(호수)의 폭풍을 잠재우시고, 물위를 걸으셨을 때 마르코는 주님께서 창조주 하느님의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려고 했습니다. 시편 107,23-32는 마르코의 증거를 재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107,23-32에서 보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대양을 헤치며 장사하던 자들, 그들은 야훼께서 하신 일을 보았고, 깊은 바다에서 그 기적들을 보았다. 그가 한번 명하시자 돌풍이 일고 물결이 치솟았다. 하늘 높이 올랐다가, 바다 깊이 빠졌다가, 사람들은 혼이 나서 넋을 잃고 술취한 듯 비실비실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재주가 쓸모없이 되었다. 그들이 그 고통 중에서 울부짖자 야훼께서 사경에서 건져주셨다. 광풍을 잠재우시어 물결을 잠잠케 하셨다. 이윽고 사방이 고요해지자, 모두들 기뻐하며 하느님의 인도를 받아 바라던 항구에 다다랐다. 그 사랑, 야훼께 감사하여라. 인생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 모두 찬양하여라. 백성들 모임에서 그를 기리고 장로들 모임에서 그를 찬양하여라.
그리고 자연을 초월한 기적 중에 4복음서는 주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두 개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르 6,30-44)에 보면 5천명을 먹이신 일이 나오며, (마르 8,1-10)에는 4천명을 먹이신 기록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서 그의 백성을 먹이셨듯이(출애 16장, 시편 78,23-29) 주님도 광야에서 "새로운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구약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다시 행하셨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주님께서 바로 구약의 하느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3) 사탄(마귀)들을 제압하는 기적들
복음서에는 마귀들을 쫓아낸 기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은 구약에는 많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 유다인들은 마귀의 세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활동하시던 때에는 사람들이 악마와 마귀들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질병은 인간의 죄와 마귀로 인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주님께서 사탄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오셔서 사탄을 제압했다고 말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여러 곳에서 주님께서 사탄을 제압하고 마귀의 세력을 내쫓은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주님께서 사탄의 나라를 멸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신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기를 원했습니다(3,27).
(4) 죽음까지 주관하는 기적들
또한 복음서 기자들은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르 5,22-43). 요한은 주님께서 죽은 나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요한 11장). 그리고 루가는 주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신 일을 기록했습니다(루가 7,11-17). 우리는 구약에서 예언자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가 수넴 지방에서 죽었던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열상 17,17-24, 열하 4,21-37)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생명을 다시 살리는 역사가 주님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신 주님의 기적들은 예언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가 시작되면 하느님의 백성이 경험하게 될 기쁨을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주시리라.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이사 25,8)"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의 기적은 주님께서 생명을 창조하고 주관하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이셨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불러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고, 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러한 사실을 온 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장차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실 분이라는 것을 온 천하에 증거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상의 복음서 기적사화를 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메시아 시대에 대한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다. 2)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주께서 창조주라는 것을 증거한 사건이다. 3)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주께서 사탄의 나라를 멸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심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4)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주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며 마지막에 모든 사람을 다시 살려 주실 분임을 입증한 사건이다.....이상으로 복음서의 기적사화에 대한 학습을 마치기로 하고 다음은 오늘복음서를 간략하게 묵상하겠습니다.
II. 주님의 다섯번째 기적 : 물위를 걸으시는 주님
어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통해 당신의 신성(천주성)을 보여 주셨고, 오늘 복음에서는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천주성을 드러내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물위를 걷는 것은 예로부터 하느님이 구원의 길을 걸으시는 동작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 어두움은 멸망의 세력이고 첫 새벽은 구원의 시간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다는 죽음의 세력을 뜻하는 이 세상을 상징하고 그 위에 떠 있는 배는 구원의 교회를 상징하는 예언적인 뜻이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는 우리 신앙인들이 타고 가는 구원의 방주로서 세상 건너편(천국)으로 교회(배)에 몸을 싣고 건너가는 도중, 우리 신앙인들은 수많은 고통이라는 돌풍을 만날 때도 있고 어려움이라는 역풍을 만날 때도 있으며 여러 가지 파도와 회오리바람을 만나게 될 때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베드로처럼 문제와 상황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있고 극복하고 승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상황, 어떤 문제에서도 모든 것을 극복하는 신앙을 요구하시며 물위를 걷는 순간에도 주님께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는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람과 파도에 명령을 내리신다면 물이 그리스도를 바쳐드시고,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면 사람도 파도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분 앞에서 취할 수 있는 마땅한 태도는 오직 하나 신뢰뿐입니다.
폭풍우도 가라앉히시고 파도도 잠재우시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만 계시다면 어떤 문제, 어떤 난관도 해결할 수 있고 뚫고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문제와 상황만 바라보고 산다면 베드로처럼 물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문제와 상황에 빠지게 되더라도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신뢰심을 갖고 다가서면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주님께서 손을 잡아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두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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