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근대인물 기행>,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의 저자입니다.
현재까지도 양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일 근대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양국의 인물들 활약을 통한 한일 근대사 이야기를 주 1회 정도(바쁘면 혹시 못 지킬 수도 있으니 사전 양해 구합니다) 올릴까 합니다.
인물로 보는 한일 근대사 이야기(1화)
(프롤로그 일본)
1853.7.8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의 함대가 에도만(현 동경만) 입구 우라가(현 요코스카) 앞바다에 나타났다. 노나 바람으로 움직이는 목선만 보아온 일본인들에게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구로후네(흑선)가 큰 바퀴로 파도를 가르며 내해에 정박하는 처음보는 광경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군함들이 함포를 일제히 쏘자 불꽃과 함께 천지가 진동했다.
에도(현 도쿄)는 깊숙한 만으로 이루어진 해안도시라서 당시 상당수 에도 사람들은 이 모습을 직접 보거나 포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간 소문으로만 듣던 구로후네의 도착은 인구 100만명 세계 최대의 도시 에도의 시민들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페리 제독의 개국 요구에 대한 에도막부(도쿠가와막부)의 대처를 두고 이후 일본은 개국파와 쇄국파의 투쟁이라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그 결과가 메이지유신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페리 함대의 출현은 일본사의 전환점이자 일본 근대화의 출발선이었다.
몇년 전 멕시코전쟁으로 캘리포니아를 영토로 편입한 미국은 앞바다가 된 태평양을 통해 중국 등 아시아에 오는 것이 지름길이었기에 연료와 식료품을 보급받는 중간 기착지가 절실했다.
그런 점에서 미국 입장에서는 대서양, 인도양을 통해 아시아에 접근하는 유럽국가들보다 일본의 지정학적 가치가 매우 높았다. 멕시코전쟁의 영웅 페리 제독은 1852년 동인도함대 사령관 및 일본 대사로 겸임발령이 난 지 1년 만에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러 온 것이다.
당황한 막부는 조속 철수를 요구했으나, 페리는 요청을 수락하지 않으면 대포의 위력을 보여주겠다는 엄포와 함께 에도만의 해안지형을 작은 배로 측량하는 등 상륙 준비를 하는 모양새를 취하자 막부는 국서를 접수할 수 밖에 없었다.
국서의 내용은
1. 난파와 폭풍 등으로 일본에 정박하는 미국 선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2.미국 선박의 연료와 음식 보급을 위해 항구를 개방하거나 무인도에 저탄장을 설치할 것,
3. 상품을 교환하기 위해 항구를 개항할 것 등이었다.
내항 9일 만에 임무를 완수한 페리 제독은 내년에 조약 체결을 위해 다시 방문하겠노라고 공언한 후 에도만에 모인 일본인들이 보라는 듯 에도 내해를 일부러 한 바퀴 당당히 돌고 나서 류큐왕국(현 오키나와)로 가 버렸다.
역사적인 국서 접수 과정에 몇 가지 흥미로운 장면이 담겨있다.
국서 전달식은 불과 30분도 안걸렸으나, 일본 관리들은 증기선에 올라 배 구조와 작동원리, 운행 등에 관해 물어보고 견학하는 데에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소통은 영어-네덜란드어-일본어의 2단계 통역으로 행해졌다.
막부는 1년 전 '미국 함대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러 올 것이며, 사령관은 페리 제독'이라는 정보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왜 동북아시아 3국(조선, 청, 일본) 중 유일하게 일본만 외국군의 침략을 받지 않고 선제적으로 개국 결정을 하는 행운을 안게 되었을까?"
"일본은 어떻게 수백 년간 지속된 동북아시아 3국의 유사했던 전근대적 봉건체제를 짧은 기간에 무너뜨리고, 서구 문명을 놀라운 속도로 습득하여 신흥패권국으로 부상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각 시기별 화두 또는 시대정신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을 이번 여행에서 만나다 보면 자연히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출처: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