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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배려하는 삶의 즐거움
찜통 같은 더위가 계속되는 여름입니다. 이런 날씨에는 불쾌지수도 높아 괜히 옆 사람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지요. 이렇게 곁에 있는 사람의 체온마저 싫은 더운 날에는 신영복 선생의 글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신영복 선생은 과거 통혁당 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20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분입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아 펴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여름의 감옥살이처럼 내 옆의 존재를 힘들어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히려 겨울처럼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고 고맙게 여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와 너의 관계를 바르게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立場)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며 남을 배려하지 않을 때, 흔히 “입장 바꿔서 한번 생각해 봐.”라고 말합니다.
“입장(立場)” - ‘내가 서 있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처지(處地)’라는 말로 바꿔 쓰곤 하지만 같은 뜻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의 나이게 하는 곳, 내 존재 자체가 현존하는 장소입니다. 입장을 바꾼다는 것은 내가 있는 자리를 떠나서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 가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장이 바뀜에 따라서 바라보는 관점(觀點)도 바뀌고 시각(視角)도 달라집니다. 당신의 자리에 서서, 당신의 입장에서 보고, 당신의 마음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지난달에 말씀드린 “서(恕)”를 기억하십니까? 인(仁)을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이었지요. 『논어』의 다른 곳에서 공자는 이런 말도 합니다.
“무릇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기가 달성하고자 하면 남도 달성하게 해 준다.”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있지요. ‘자리를 바꿔 생각해 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도 ‘자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결국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곳,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내가 있는 ‘자리’가 결국 나를 결정합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나의 입장이 정해지고, 관점이 서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타인과 참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나, 타인이 서 있는 곳으로 가 봐야 합니다. 거기 서서 그 사람의 입장이 어떤지, 그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사람의 마음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恕) 이러한 전형을 보여 주신 분이 계십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리를 떠나 우리 인간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강생의 신비는 사랑의 절정이요, 사랑의 완벽한 구현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나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서 보는 건 어떨까요? 박노해 시인의 <발바닥 사랑>이란 시는 우리의 사랑이 머리나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직접 찾아가야 하는 사랑임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발바닥이다. //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 //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 발바닥이 이어 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 그 영혼의 낙인이 바로 나이니 //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일단 불편합니다. 그래서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기 싫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게 편하지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것 자체가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도해 봄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게 됩니다. 입장을 바꾸지 않으려 하고 자기 자리만 고집하며 그 안에서 혼자 편안히 살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2) 낡은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는 자기가 사는 우물 안이 너무 좋습니다. 물도 깊지 않고 안전합니다. 그 안에서 개구리는 자신만의 왕국을 이루어 행복해하며 동해에서 온 거북이에게 자랑을 합니다. 하지만 그 좁은 우물에 거북이가 들어가다가 발이 걸려 꼼짝도 못했지요. 거북이는 ‘바다’라는 것에 대해 개구리에게 이야기해줍니다. 천 리 거리로도 그 크기를 말할 수 없고 천 길 길이로도 그 깊이를 말할 수 없는 바다. 홍수가 나도 넘치지 않고 가뭄이 들어도 줄어드는 법이 없는 엄청난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만 우물 안의 개구리는 알아듣지도 못하지요.
쓰러져 가는 우물 안에 갇혀 지내지만 말고 과감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나 타인의 자리로 옮겨 가 봅시다. 나보다 더 낮은 자리, 더 불편한 자리로 옮겨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 서 보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입장에, 부모는 자식의 입장에 서 봅시다.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장애인의 자리에도 가보고 혼자 외로이 사는 이웃의 노인, 사고로 자식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의 처지에 들어가 봅시다. 먼저 그들의 자리에 서 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일 것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고 배려하는 작은 행동에서 우리는 성덕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입장만 고집할 때는 느껴 보지 못한 참 행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1요한 4,8)
- 예수성심성월에 생각해 보는 사랑의 의미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느 방송 작가의 수필이었습니다. 책을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그 제목만으로도 생각할 바가 많았습니다.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 7-8)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사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잘 압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의 핵심이라는 것, 그러기에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언과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니 사랑하라는 말씀의 중요성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요?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누가 떠오르나요? 부모님, 아이들, 배우자나 연인, 친구…. 이들을 사랑한다는 건 알지만 과연 그 사랑을 늘 느끼며 살아가고 있나요?
지난 4월 15일(수) 저녁,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가족을 위한 1주기 추모미사가 성모당에서 대주교님의 주례로 거행되었습니다. 미사 끝에 그 참사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떠나보내고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어머니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쉽게 잊을 수 있을까요? 늘 곁에 있어서 익숙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뜻하지 않은 이별로 그 사람을 잃으면 그제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는 합니다. 이렇듯 사랑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本性)입니다.
어느 날 번지(樊遲)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인(仁)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1) 또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인(仁)은 사람이다.”2) 인이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닌 본성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누구에게나 있는 그 인이란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에 계산적인 생각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나 욕심에 오염되어 버린 상태일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조건 없는 사랑, 무차별적인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사랑은 차별적인 사랑입니다. “친친(親親)”, 즉 친한 사람을 친애하는 것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이를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 사랑을 확장시켜 다른 사람에게로 넓혀 나가는 것이지요. 다른 이보다 나의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내 부모님을 사랑하는 데 머물지 않고 나아가 다른 이의 부모님도 공경하는 것입니다.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아이를 챙겨 주는 마음보다 더 애틋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다른 이의 아이까지도 사랑으로 대해 주는 것이 사랑의 확장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관계의 근본 뿌리(本)입니다. 이 뿌리에서 다른 모든 감정이나 관계가 뻗어 나갑니다. 『대학(大學)』에 “물유본말(物有本末)”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근본 뿌리(本)가 있고 가지와 나뭇잎 같은 말단(末)이 있다는 말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와 잎, 꽃, 열매 같은 것들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것처럼, 근본이 바로 서야 말단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근본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제대로 갖춰질 때, 사랑으로 관계가 제대로 맺어져 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 4-5)
가지인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만 생명을 유지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장자(莊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는 들어 보지 못했느냐? 옛날에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려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중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3)
이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노나라 임금의 바보스러움에 조소를 금치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자주 이런 잘못을 저지르곤 합니다. 상대가 원하고 상대에게 맞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게 맞는 방식으로 사랑을 베풀고는 거기에 호응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실망합니다. 부모 욕심대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 모든 것이 결국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주지 않지요. 사람 관계가 다 그렇습니다. 내 기준으로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나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은 어떠할지 헤아려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공자도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가장 중시한 것이 바로 “서(恕)”입니다. 이 “서”자의 한자를 풀어 보면, 같을 여(如) 자에 마음 심(心) 자입니다. ‘마음을 같이한다.’는 뜻입니다. ‘너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내 마음을 너의 마음과 같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공이 공자께 여쭈었다. ‘한 마디 말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과연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서(恕), 그 한 마디일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4)
예수성심성월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리며 그 마음을 닮아 가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수성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 마음을 닮는다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까?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지금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면 모두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있는 게 아닐까요?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즐길 준비 되셨나요?”
- 생명을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 삶을 즐기는 경지로 나아가기
오랜 중국 생활을 하며 제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한국의 자연이었습니다. 푸르른 나무숲과 풀과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 있는 한국의 산이 그리웠죠.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는 거의 매주 산에 갔었습니다. 가까이 있을 때는 알지 못했는데 떠나 보니 그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지요. 산에 가면 평소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꽃과 나무의 변화가 확연히 눈에 들어옵니다. 겨우내 죽은 듯 마른 가지에서 새순이 돋고 잎이 무성해져 신록이 우거지고, 온갖 꽃이 철따라 피고 지기를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면 모든 살아 있는 것, 생명 자체가 참으로 경이롭고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동양철학에서도 우주의 기본 원리는 만물을 낳고 살리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주역(周易)』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만물을) 살리고 살리는 것을 일러 역(易)이라고 한다.”1) 아주 작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생명을 얻어 잘 자라도록 도와주고 살리는 것이 자연의 본성입니다. 그러니 자연을 바라보면 자연스레 삶에 대한 예찬이 터져 나옵니다. 산다는 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 아름다운 삶을 충분히 즐기고 계신가요? 공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2)
공자는 무언가에 대해서 알아가는 단계와 그것을 좋아하는 단계, 그리고 그 속에서 즐기는 단계를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일단 클래식 음악에 대해 배워 나갑니다. 관현악은 어떻고 작곡가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시대별로 어떤 사조가 유행하는지, 한 곡을 두고서도 지휘자와 연주자에 따라 어떻게 곡 해석이 달라지는지 등 많은 것을 알아 가지요. 하지만 단순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식을 쌓아 나가기만 하는 사람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 미치지 못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지식을 쌓아 나가는 것은 물론, 자주 음악을 듣고 연주회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특별히 좋아하는 지휘자나 악단의 음악을 골라듣기도 하면서 마니아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에 미치지 못합니다. 좋아서 찾아다니며 음악을 듣던 단계를 넘어서면 이젠 그 음악에 푹 빠져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이릅니다. 굳이 누구의 작품인지 언제 레코딩한 것인지 따지지 않고 그냥 일상 속에 클래식 음악이 녹아들지요. 우리말에는 ‘즐긴다’는 표현이 부정적인 의미로도 많이 사용되어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지만, 여기서 즐긴다는 것은 그 속에서 혼연히 하나 되어 즐거워하는 경지입니다.
우리네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알아 가고 신앙을 배워 나가는 경지에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앙생활을 좋아해서 기쁘게 봉사하며 사는 경지에 이릅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노닐며 나에게 주어진 삶을 기쁘게 즐기는 것은 얼마나 높은 경지인지 모릅니다. 성무일도 기도를 하다 보면 유독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지요.
“주께서 당신 백성의 귀양을 풀어 주실 그때, 야곱이 춤을 추리라 이스라엘이 봄놀으리라.”(시편 14,7)
이 구절은 돌아가신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인데요. 새 성경의 번역문보다 시인 신부님의 감성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봄놀다’라는 표현은 ‘뛰놀다’의 옛말이지요. 그런데 말이 참 재미있어요. 예전에 고된 시집살이를 하던 여인들이 일 년에 하루쯤 봄놀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봄놀다’ 라고 표현했답니다. 봄나들이를 나와 꽃구경도 하고 기뻐 뛰어노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우리는 지금 귀양살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운데, 삶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부족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때로 삶의 현실이 팍팍하고 고생스럽더라도, 병의 고통 중에 있다 하더라도, 이별의 슬픔에 아파하더라도 우리는 살아 있잖아요. 하느님께서 주신 이 생명을 누리고 있잖아요. 그러니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이 공기를 마시고, 이 자연 속에 살아감에 봄놀았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경지가 있으니까요. 하느님과 맞닿을 수 있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그런 마음으로 삶을 제대로 알고 삶을 좋아하는 단계를 지나 삶을 즐길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겠지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의 절대 경지를 노래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장자(莊子)입니다. 그는 주로 우화를 이용하여 자기 사상을 풀어갔는데, 책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혜자(惠子)가 양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장자가 그를 찾아 양나라에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혜자에게, ‘장자가 와서 당신 재상 자리를 노린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혜자는 두려워 사흘 동안 장자를 찾아 온 나라를 뒤졌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장자가 혜자를 찾아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남쪽에 새 한 마리가 있는데 이름이 원추라고 합니다. 당신은 그걸 아시오? 이 원추는 남해에서 출발하여 북해로 날아가지만,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와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감로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소. 그런데 여기 썩은 쥐를 얻은 올빼미가 있다가 원추가 지나가니까 혹 쥐를 빼앗길까 싶어 위를 올려다보며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거요. 지금 당신도 양나라 벼슬자리를 빼앗길까봐 두려워 내게 꽥 하고 소리를 지를 건가요?’”3)
‘원추’라는 이름의 새는 봉황의 일종입니다. 높은 이상을 지니고 절대 자유의 경지를 노니는 봉황이 썩은 쥐를 탐할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세상에서 아등바등하며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이들은 누구에게 그걸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데 바빠서, 눈앞의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해서 원래 지니고 있던 자유로움을 많이 잃어버린 건 아닐까요? 봉황처럼 하늘 높이 훨훨 날며 삶을 즐기던 방법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요?
5월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죠. 성모 성월이며 전례력으로는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는 가정의 달이기도 하고요. 봄도 무르익어 자연도 가장 아름다운 때입니다. 꽃들도 화려하게 피고 나무도 신록을 더해 갑니다.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여신 예수님과 더불어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 6)
주님은 생명을 주신 분이시며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영원을 내다보며, 지금의 삶을 기쁘게 즐겨야 하겠습니다.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나요?”
- 이익을 버리고 인의를 택한 성현들
“수난기약 다다르니, 주 예수 산에 가시어~.” 사순시기에는 미사 전 입당 성가만 들어도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가 많습니다. 사순 성가의 애절한 노랫말 때문인지 장엄한 멜로디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사순시기의 성가는 우리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나 봅니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죽음에 대해 더 깊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네 삶 자체가 하나의 ‘십자가의 길’이어서 사순시기가 더 깊이 와 닿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살이가 사순시기에 그대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의 삶도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퇴역 군인으로 64세에 무당의 딸인 17세 소녀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그 사이에서 공자가 태어났지요. 그리고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공자는 어머니와 단 둘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열일곱 살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어요. 가난하고 부모도 없는 열일곱 살의 청년 공자는 홀로 일어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배움에 뜻을 두고 열심히 노력했지요. 온갖 비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공자 스스로도 자신은 젊었을 때 미천했기 때문에 할 줄 아는 천한 일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런 공자가 노나라의 작은 관직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정치를 잘해 노나라의 힘도 강해졌고 이 시기에 제자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노나라의 군주와 실권자들이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에 공자는 미련없이 재상의 자리를 버리고 노나라를 떠납니다. 그의 나이 55세였습니다. 그때부터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14년 동안 7개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받아줄 군주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 유명한 “주유열국(周遊列國)”의 시기였지요.
사실 공자가 편한 길을 택했다면 재상의 자리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편하게 부를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이익(利)을 택하지 않고 평생 자신이 추구한 인의(仁義)를 선택했습니다. 68세가 되어서야 늙은 몸을 이끌고 공자는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이익을 추구하는 길과 인의를 따르는 길 가운데서 공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익을 추구하는 길을 버리고 인의를 따르는 길을 갔습니다. 공자 이후, 이익을 버리고 인의를 택하는 삶은 그의 뒤를 따르는 모든 유학자가 가야 할 길이 되었습니다. 맹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책 『맹자』의 첫 대목은 이와 같습니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니 왕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에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맹자가 대답했다. “왕은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1)
그 유명한 맹자라는 선생님이 자기 나라를 방문한다고 하니 왕이 기쁜 마음으로 나가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자기 나라를 찾아 주셨으니 얼마나 큰 이익이 있겠냐?’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맹자의 대답은 단호했지요. “왕께선 왜 하필이면 이익을 이야기하십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진 마음과 의로움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나라의 왕이 이익을 추구하면 그 밑의 대부도 이익만 좇으며, 그러면 그 밑의 하급 관리와 서민들도 모두 이익만 좇으며 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라 전체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2천 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있게 와 닿는 내용입니다. 국가는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 기업은 기업의 이익만 따지고, 국민은 각자와 자기 집안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무한 경쟁에 시달려야 하지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우리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경쟁에 내몰리며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익을 얻는 만큼 행복이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연(顔淵)이라는 제자입니다. 그는 정말 가난하게 살았지만 개의치 않고 학문을 배우고 덕을 실천하는 데 큰 기쁨을 느끼며 잠시도 소홀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스승인 공자보다 먼저 죽었죠. 『논어』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연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을 이겨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것이다.”2)
공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은 어진 마음, 즉 인(仁)입니다. 하지만 그 인에 대해서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제자 안연이 공자에게 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인이 무엇인지는 직접 가르쳐 주지 않고, ‘인을 행하는 것(爲仁)’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극기복례가 바로 인을 행하는 것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 - 자기를 이겨 예를 회복한다.’ 즉 공자는 자신의 욕심, 아집, 이기심 등을 이겨내어 자기 안에 있는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 양보하고 겸손하며 사랑의 마음을 드러내는 예(禮)를 다시 살리는 것이 바로 인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무조건 자기를 억누르고 억지로 예를 차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에 있는 본래의 선한 마음,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을 단단히 싸고 있는 껍질 같은 이기심을 극복하고 깨부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누누이 당부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안연은 스승의 가르침을 들으면 바로 그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머리로만 알고 넘어가지 않고 직접 몸으로 실천해야 진정으로 그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체득(體得)’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체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복된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를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지고 이 길을 걸어갑시다. 이익을 추구하는 삶의 길이 아니라, 그런 욕심을 버리고 올바른 가치를 찾아 나가는 길을 걸어갑시다. 하지만 이 길은 결코 외롭고 힘든 길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앞서 걸어가셨고, 주위의 많은 이가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너무 험하고 고달프고 외롭더라도 앞서 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같은 길을 가는 동료, 이웃들과 함께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물처럼 살라하네.” - 겸손, 비움의 미학
이른바 ‘갑질’ 논란이 최근 우리나라에 큰 화젯거리입니다. 부와 권력을 거머쥔 사회 상류층, 이른바 갑(甲)의 횡포에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상처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땅콩 회항 사건’, ‘백화점 모녀 주차장 갑질 사건’ 등 많은 사건이 국민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갑질’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말이지요. 인터넷 검색창에 ‘갑질’이라고 입력해 보니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갑을관계에서의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그보다 못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괴롭히는 모습에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사회 지도층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고 온유한 어른이 참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런 어른이 더 그리워지는 시절입니다.
『효경(孝經)』에서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지위가 높아도 위태롭지 않다. 절제하고 아껴 삼가 법도에 맞게 하면, 가득 차더라도 넘치지 않는다.”1)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최고의 미덕은 ‘겸손(謙遜)’입니다. 겸손이란 스스로 낮춘다는 뜻입니다. 특히 동양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일을 많이 하더라도 겸손하지 않으면 그 인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처럼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을수록 더 요구되는 덕이 바로 겸손과 절제입니다. 옛 성현들은 자연 속에서 이런 겸손을 배웠습니다.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싫어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행동하면 어디에 처(處)하든지 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지요. 도가(道家)의 노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덕을 물(水)에서 찾았는데요, 물에 관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바로 『노자(老子)』 8장에 나옵니다.
“가장 선한 사람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그들과 다투지 않으며, 주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2)
노자는 물을 겸손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물은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에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그 공을 다투지 않아 경지가 도(道)에 가깝습니다. 저는 옛날에 혼자 섬진강을 자주 찾곤 했습니다. 지리산을 감싸고 남해로 흘러 내려가는 강줄기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을 낮추어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물의 ‘자기 낮춤’의 미덕을 생각하게 됩니다. 물은 지구상의 생명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생명을 유지하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더럽고 오염된 것을 깨끗이 씻어주는 역할도 하지요. 노자 사상의 저변에 흐르는 중요한 덕은 이 물과 같은 겸손입니다. 물처럼 자신을 낮추어 다른 이들과 경쟁하지 않고 남보다 앞서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천하를 자기보다 앞세우는 겸손의 덕을 강조합니다. 남보다 낮추려는 노력, 하지만 그건 결국 남보다 높아지게 되는 비결이지요. 또 다른 곳에서 노자는 자신이 평생동안 간직한 중요한 보물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그것을 간직하고 보존하나니, 첫째는 자애요, 둘째는 검소(절제)요, 셋째는 감히 천하보다 앞서지 않는 것(겸손)이다.”3)
자애로운 마음(慈)은 어짊(仁)과 같고, 검소함은 절제, 의로움(義)과 통합니다. 그리고 천하보다 앞서지 않는 겸손은 바로 예의(禮)와 지혜(智)입니다. 그러고 보니 노자가 말한 세 가지 보물은 결국 인의예지(仁義禮智)와도 통하는군요. 이 네 가지 덕은 모두 우리 마음 안에 이미 갖춰져 있는 것이라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그럼 결국 그 보물이라는 것은 내 안에 갖춰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잘 간직하고 보존하기만 하면 되겠군요. 사실 예수님께서도 항상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 43-44)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 4-5)
이쯤되면 겸손, ‘자기 낮춤’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결코 자신이 못났다거나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존감,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겸손할 수 없습니다. 그건 겸손이 아니라 비굴하게 굴복하는 행위일 뿐이지요. 내가 정말 소중한 존재임을 안다면 내 마음은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타인을 받아들이고 먼저 배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범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예수님을 대지(大地)에 비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대지는 겸허합니다. /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내려 서 있습니다. / 사람들의 발아래 있고 짓밟힙니다. /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썩고 죽은 것까지 받아들입니다. / 그리하여 대지는 부패와 죽음을 극복하고 이를 오히려 밑거름으로 삼아 새로운 생명을 낳습니다. / 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도 좀 더 겸손해집시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약한 어린아이처럼, 발아래 처하는 대지(大地)처럼, 그리고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물(水)처럼 겸손해집시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내려 갈 때,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높이 들어 올려질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