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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15
그리스도인의 의식 / 박조준 목사
예수 믿는 일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전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행동인데, 예수 믿는다는 사실 때문 에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해서 부담을 느껴 본 적은 없습니까?
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우리의 행동과 삶이 비판의 대상이 될까요?
멀컴 리이치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유별나게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실상 단순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별난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대답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나를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방법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기독교 의식에 참여하고, 찬송 부를 줄 알고, 성경 몇 구절 알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입니까?
아니면 그보다는 다른 어떤 삶의 의식이 우리의 의식의 밑바탕에 흘러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바로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하신 일의 내용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드디어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방식의 삶이 요청되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특별히 두 가지 예식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의식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려 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예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할례식이 고,
다른 하나는 유월절 예식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예식의 중요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예식의 중요성은 구약 성경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약 성경에도 내용은 같으나 다른 옷을 입고, 같은 사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구약의 할례와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의식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최후의 만찬,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면서 유월절 식사를 주의 만찬, 성찬으로 승화시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4∼25절에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 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우리 신교에서 성례식을 말하면 이 두 가지 예식, 곧 세례와 성찬을 말합니다.
그런데 먼저 등장하는 예식이 할례식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에게 왜 할례식을 행하게 하셨습니까?
이 할례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정신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식을 볼 때, 그 예식 자체만을 보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예식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신, 다시 말해서 그 예식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진정한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식 그 자체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이사야서 1장 11절 이하를 보세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 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가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 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 1:11∼17).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식은 우리에게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교육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 다. 할례 의식은 두 가지 의식(意識)을 우리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우선 구별된 백성이라는 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래 할례가 맨 처음 명령되어진 창세기 17장 9절 이하를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 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9∼11).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언약에 대한 하나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이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구별되었고, 이 표시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란 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남자들은 난 지 8일만에 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표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그 표시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를 받는다고 하 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표시를 볼 때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계속 확인하고 또 확인함으로써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할례 의식을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너는 내 백성이다하는 표시를 어디다 했을 것 같습니까? 이마에다 해서 볼 수 있게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해학적인 방법을 고안해 내셨습니다.
남자들 육체의 모든 부분 가운데 이 부분은 하루에 몇 번씩 소변을 볼 때마다 반드시 확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표시를 볼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는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 기억시키면서 확인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적인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적 범죄의 욕구를 느낄 때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 여인과 성적인 관계를 갖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마다, 자기들의 몸의 한 부분을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내가 이러면 안되지. 하나님은 이처럼 기가 막힐 정도로 해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 할례가 신약 시대에 와서는 세례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 이하를 보세요.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 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이 말씀은 영적 할례, 다시 말하면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사실 에 관한 하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절 이하에 보면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 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 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서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3∼11).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내 가슴에 일깨우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의미의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신뢰 의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받았던 그때, 그곳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또 하나의 놀라운 교훈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재미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서 길갈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길갈 바로 앞에 있는 도시가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땅의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여리고를 점령해야 가나안을 차지하는 일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가나안 땅을 지키고 있는 여리고 성의 적군들은 그들을 향해서 나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지켜보는 현장인 여리고는 길갈이 내려다보이는 곳입니다. 그 길갈의 들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다 할례를 받으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외과 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7∼8절을 보세요.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전쟁터에 나아가 싸워야 할 사람들이 모두 수술을 받고 드러누워 있 습니다.
상대편에서 보면 얼마나 공격하기에 좋은 기회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의 공략을 앞두고 있는 자기 백성에게 할례를 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요?
모두가 할례를 받고 누워서 적군을 쳐다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지금 적군이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적군에게 죽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시점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합니다하는 교훈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자기 중심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는 내 잔꾀를 의지하고 내 생각을 따릅니다. 그래서 결국 엎어지고 넘어져서 좌절과 갈등, 혼란 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점령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눕혀 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다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 님의 의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나는 이제 나의 옛 사람을 향해서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나오는 다른 예식은 유월절입니다.
이미 유월절 사건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유월절을 하나의 의식으로 지킨 것은 여호수아서 5장이 처음입니다.
10절을 보세요.“이스라엘 자손들 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 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유월절이 시작되는 그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떡을 먹을 때마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은총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의 사슬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다 심판하시기 로 작정하신 밤이었습니다. 애굽 땅의 처음 난 것,모든 장자를 잡아가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 심판의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 6절 이하에 보면 “양을 잡고 그 피로 집 좌우 문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땅의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나 새로운 땅을 향해 새 삶의 여정을 시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까지 유월절을 지키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로 하여금 주의 은혜로 애굽을 떠났고, 광야 생활을 했고, 여기까지 도착해서 새 땅에 살게 된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뿐 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기까지 나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 야 합니다.
신자와 비신자의 삶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의 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고 나서는 감격한 나머지 영웅 의식에 들떠 있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런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것이 너희의 힘 때문이 아니라 내가 도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인도하심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이 있는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최선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12절 말씀을 보세요.
“유월절 이튿날 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유월절을 지킨 그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쳐 버렸습니다.
왜 만나가 그쳤을까요?
지금까지는 매일 옮겨가며 사는 생활을 했으니까 농사지을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땀을 흘리고 수고하면서 자기가 먹을 양식을 거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동안 만나를 주시는 기적을 끝내시고 네 손으로 일해라. 땀을 흘려라. 노력해라. 네가 벌어 라. 네가 나의 은혜를 의지하여 지금까지 만나를 통해서 나의 주권과 나의 전능함을 알았으니, 이제는 네 삶에 있어서 네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내가 보기 원하노라 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의 생활은 주님을 의지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학생이면 열심히 공부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성적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병이 났으면 간절히 기도하면서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주님께 기도만 하면 되지, 의사의 치료를 의지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칼을 가지고 일을 하다가 실수로 손을 베었습니다. 피가 철철 흐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손에서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고 하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지혈을 해야 합니다.
균이 침입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각오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이제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위한 출발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출발 직전에 또 하나의 사건이 생겼습니다.
13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막 여리고 성을 향해서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나타난 낯선 장 군은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위하여 험한 여로를 떠나는 위대한 과제를 앞둔 여호수아를 격려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군대 장관의 모습으로 그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육 방법을 봅니다.
주님께서 왜 나타나셨습니까?
너는 이제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앞서 간다. 네가 만일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의식을 가지고 인생을 살며, 나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사는 삶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리고 겸손히 주를 의지하고 최선을 다해 걸어간다면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앞서 간다 고 말씀하시기 위해 나타나신 것입니다.하나님은 지금도 인생의 숱한 사건과 삶의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당황해 하고 초조해 하고 있는 우리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전쟁보다도 주체 의식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 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바로 서기만 하면, 주님이 우리 편에 서시기만 하면, 문제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 주시면 이 싸움은 이겨 놓은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성령이 충만한 그 순간 우리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너무너무 신기해 보일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가정이 문제입니까?
사업이 문제입니까?
사실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근본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만 하면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 는 거룩한 자부심을 가지고 삽시다.
주님만을 온전히 의지합시다.
그분을 신뢰합시다.
여기까지 온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을 의지 하고 최선을 다 하겠다고 고백합시다.
그러면 여리고 성벽은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을 믿습니다.
승리를 볼 것을 믿습니다.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 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