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친이 어떤 대학생의 담벼락에 게시된 글을 소개했다. 근데 그 내용이 놀라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된다: "홍대 지하철역 인근, 모 대학생 두 명의 대화. (방송사 파업 지지 서명운동을 가리키며) "절대 서명하면 안돼. 기록이 평생 남고 기업에서도 서명한 사람은 안 뽑는대"...
참. 기막힌 현실이다, 근데 문득 든 생각이, 우리 사회안에 이런 숨은 '공포들'이 얼마나 많을지...가끔, 대놓고 하는 무수한 말의 선동보다도, 똑부러진 거시적 제도에 대한 요구보다도, 일상의 권력에 대한 공포를, 하나씩 핀셋을 솎아내듯, 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찰의 불법채증, 지나가는 거리에서의 검문, 프로파일링, 신원(호구)조사, 촘촘한 징계조치들등.
하지만 내 말을 오해말길 바란다. 이는 누군가가 말하는 '생활정치'도 아니고, '어젠다 정치'도 아니고, 또 '가치의 정치'도 아니다... 단지, 정치의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정치의 조건을 확보하는 행동이다. 민주주의라면서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정치, 즉 정치적으로 자기의사를 표현하고 생각을 표현하고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없는, 이 민주주의를 문제삼는 것이다. 정치권력을 누굴 뽑을까 라는 선거정치가 아니라 내가 정치할 수 있는 조건을 문제삼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도 아니고 생활도 아니고 어젠다도 아니고, 여기서의 '정치의 조건'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방법이 그 무엇이든, 즉 법을 둘러싼 싸움이건, 이 사회 지배적인 상식의 전복을 통해서건, 혹은 일상의 매일매일의 저항을 통해서건.
왜냐하면 클라우제비츠가 한 말을 비틀어 다시 말하자면, "정치는 전쟁의 또다른 수단"이기 때문에.. 그런데, 바로 그 전쟁을 하기도 전에, 정치적 인간이 되기도 전에, 정치의 가능성을 시도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일상으로 찍어누르는 공포가 있기 때문에. .. 이런 정치의 조건하에서라면, 정치는 결국 노예 만들기를 위한 형식의 정치, 노예됨에 대한 마지막 낙인찍기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내가 형식 민주주의의 문제를 끝없이 급진적으로 문제제기하고, 반민주주의적 문제의식, 반정치의 문제의식을 던지는 이유다.
근데, 일상의 공포중 가장 치밀하고 살인적인 일상의 공포는 '노동'에서, 그리고 노동을 둘러싸고 오는 공포다. 하루종일 공장과 사무실을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노동과정에서의 통제, 그리고 그 통제된 노동조차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정리해고와 해고와 비정규직의 공포... 이는 제조업, 사무직을 가리지 않고 그리고 심지어 관리직까지도 엄습한다. 그리하여 서서히 노동불안의 공포는 우리를 짓누르고, 노예가 되어간다. 임금노예는 결국 정치적 노예로 이어진다.
그 결과, 지금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지금 이 땅의 노동자 투쟁의 주역은 사실은 공장 안의 노동자들이 아니다, 정규직 상용노동자들이 아니다. 공장을 나온, 아니 쫒겨난 자들, 해고된 자들, 정리해고된 자들, 그리고 비정규직 해지된 노동자들이다. 오늘 '7.4 투쟁사업장 공동행동'을 구성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결국 정치가 불가능하면 정치는 노예만들기에 불과하고, 노동을 할 수 없으면 노동운동의 장소는 공장이 아니다. 또 일상의 공포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한다면 우리는 말을 멈춘다... 노동의 불안, 일상의 공포, 정치의 불가능성... 그러니, 이것들을 건드리지 않고 아무리 선거 민주주의를 말하고, 정치권력의 장악을 말하고, 인물 하마평을 말하든 그런 민주주의는, 그런 민주주의자들은 그다지 섹시하지 않아 보인다. 즉 후줄근하단 말이다. 세상을 바꿀 정치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엘리트의 꽃놀이패라는 말이다.
첫댓글 왜 말이 우리의 무기가 될 수밖에 없는가! "일상의 공포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한다면 우리는 말을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