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인사동 근처를 헤맨다는 것은, 그야말로 최백호 씨 노래같은 것이다.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 짙은 섹소폰 소리 들어볼만한 곳'은 서울에선 여기 밖에 없다.
종로3가 전철역에 내려서 탑골공원 옆탱이 돌아가면 포장마차들 줄지어 있다. 탕수육 2천원, 짜장면 2천원이라고 써놓아, 어디서 고량주 한 병 사오면, 만원 한 장에 만사형통이다 싶다.
그 근처 '싸립문 열고 들어가면'이란 집은 솔순주. 매화주. 죽통주. 문배주. 국화주 등 민속주 천지다. 그 옆 '깔아놓은 멍석집'도 흥미롭다. 대추차, 오미자차, 갈화차, 수정과차 같은 전통차에다, 지리산 머루주, 석류주, 대나무통술, 이강주, 진도 홍주에다, 해물파전 조개탕 메뉴도 있어 한 매력 더 한다.
이런 메뉴 눈도장 찍으며 인사동 입장하면, 흔한 것이 그림과 도자기 가게다. 우선 청화백자부터 구경해야한다. 백자가 우리 초가지붕 위에 피는 하얀 박꽃을 닮았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을지 모르겠다. 청화의 매력에 반하여 영국의 여류작가 에밀리부론테는 평생 깔끔한 청화백자만 수집했다.
고려청자가 비색이라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초추의 하늘빛이라는 둥 여러 설이 있지만, 나는 대만의 고궁박물관에서 본 연초록 비취빛이 정답이라 생각한다. 심미안 지닌 중국사람들이 옥 중에서 보물로 여기는 비취빛이라 고려자기에 반했을 것이다.
백자 청자에 눈 씻고, 찾아갈 곳은 화랑이다. 어느 낡은 집에 나는 자주 들리는데, 거기 벽엔 조각배에 몸 실은 한 어옹이 있다. 허공엔 조각달 하나만 달랑 그려져 있다. 낚싯대는 무심의 필선으로 그어졌다. 간결과 무심 외엔 아무 것도 없다. 도인 아니면 이런 고졸한 취미 가질 수 없다.
인사동은 비 오면 비 와서 운치 있고, 날 맑으면 우산 걱정 없어 더 좋다. 한바퀴 돌다가 운 좋은 날은, 청전, 이당, 의제의 동양화나, 고휘동, 이중섭, 나혜석의 서양화 하나 쯤 만날 수 있다.
노점 불상과 옥반지 구경하고 네거리서 우회전하면, 실버극장 나온다. 여기선 <워터루 부릿지>, <돌아오지 않는 강>,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 같은 흘러간 영화 상영되고, 우리가 왕년에 사랑한 비비안 리, 마리린 몬로, 잉그릿드 버그만 만날 수 있다. 입장료는 55세 이상이면 2천원이다.
인사동이 그림과 도자기가 특징이라면 낙원동은 먹거리와 음악이 특징이다. 이왕이면 나는 누가 여기 음악다방 하나 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동경 긴좌는 스시 하나 우동 하나로 두어평 좁은 가게에서 몇대 째 가업 잇는 사람들 있다. 우리도 여기다 음악다방 만들어 백년 이백년 이끌어갈 사람 없을까. 60년대 이 근처 종로에 <디세네>, <뉴월드> 같은 음악감상실 있었다. 청춘남녀들이 쪽지에 사연을 적어보내면, 디스크자키는 곡이 나가기 전에 감성어린 음성으로 그걸 감미롭게 읽어주곤 했다.
낙원동은 섹스폰, 전자키타, 바이올린 같은 중고악기 가게 많다. 가난한 악사들도 모인다. 여기서 악기 챙겨 밤무대 나간다. 거리엔 그들의 애잔한 삶이 스며있다.
여기가 파리의 몽마르뜨가 아닌들 어떠리. 밤 깊은 거리 포장마차나 노천카페 쪽의자에 앉아보라. 옆에 손풍금 키는 거리의 악사 있고, 초상화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 있다. 여행 중인 금발 서양 아가씨도 보인다. 갈수록 더 많은 외국인 찾아올 것이다. 일열횡대 수많은 포장마차 불빛 휘황한 이곳,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진 낡은 바라리코트 노신사가 찾아가볼만한 곳이다.
그 옆에 먹자골목 있다. 1, 3, 5호선 전철이 만나는 종로 3가역 근처는 재미있다. 역 바로 앞 건물 지하에 '마산아구찜집 ' 있고, 2층에 '부산초밥집' 있다. 아구찜과 보리굴비는 알만한 사람은 알지 않는가. 옆에 '광양한우집' 있어, 광양한우, 마산아구찜, 부산초밥, 대한민국의 세 명물 다 있다.
혹시 복어 좋아 하시는가. '싱글벙글집'이란 복어집 있다. 매운탕, 지리, 복죽, 공히 8천원, 복어튀김 2만원, 생복탕은 1만6천원 한다.
근처에 아주 작정한듯 싼 먹거리 파는 집도 있다. 모듬전, 해물파전, 녹두전 1만원, 김치, 부추, 두부전 6천원한다. 골목쟁이 안 '멍석집'에선 갈치조림 6천원, 고등어조림 5천원, 청국장 4천원 한다. 불고기 파는 고창집, 광주집, 마포집, 영동집도 있다. 막창구이, 갈매기살, 목살, 삽겹살 만천원, 차돌백이와 늑간살은 거기서 3천원 더 비싸다.
홍어애 파는 집도 있다. 홍어애란 홍어 간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잔치에 홍어가 나오지 않으면 쳐주지 않고, 홍어 한마리 다 먹어도 애를 못먹으면 허탕으로 친다고 한다. 보리싹 넣고 끓인 홍어애탕 2인분 가격 이만원인건 일단 알아둘만 하다.
인생의 강물에 무엇을 싣고 가야 하는가. 돈과 명예인가 시와 그림과 음악인가. 인사동 낙원동은 예술가들이 빈대떡 안주로 2천5백원 짜리 막걸리 시켜놓고, 거기가 마치 6.25동란 후 명동이나 되는 것처럼, 생된장에 풋고추 찍으며, 밤새도록 예술과 인생 매콤하게 논할만한 곳이다.
첫댓글 인사-낙원동 취재에 발품을 많이 파셨군요
거사의 왕성하고 깊은 생각을 보면 세월이 마안해서 숨죽이고 쳐답는것 같읍니다~!
!긴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없어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