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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 말씀/ 디모데전서 4:1-16 요절/ 디모데전서 4:6 | 2025. 2. 9 | |
디모데전서 제 4 강 |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영적 지도자는 무엇에 힘써야 합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떤 리더십이 세워져야 하는지 배우고,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본체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예수님을 구원자요 주님으로 믿는 자들이 생겼고,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에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들어와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며, 미혹하는 영 사단과 그 수하인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복음을 말했고 다른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믿음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자기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사탄에게 양심까지 지배당한 자들이요, 말은 그럴듯하게 잘 하지만 실상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지 않아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까? 결혼을 하지 않아야 된다,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금욕주의를 가르친 것입니다. 결혼과 먹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고 행복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혼을 금했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영지주의를 주장한 그들은 영적 지식이 중요하지 육신이나 물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결혼은 배우자에게 매이고 자녀가 생기면 자녀에게 매이니 영적 생활의 걸림돌이 된다고 하면서 결혼을 금했습니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구약의 법 특히 음식법을 철저히 지켜야 구원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레위기 11장에 언급한 부정한 음식들 특히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과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이단들이 많습니다. 어떤 모임에서는 구약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특히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면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지만 그것으로 천국은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큰 믿음 다시 말해 행함이 있어야 천국 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전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모임도 있습니다. 성경공부와 일용할 양식과 소감쓰기를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평가하는데, 이것도 율법의 잣대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얽어매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진정한 자유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선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성경읽기와 기도와 전도와 예배와 봉사와 구제에 시간과 열정을 드리는 것입니다.
결혼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먹지 말라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에서 벗어난 가르침이요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제도요 신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결혼을 축복하시고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펼쳐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한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나누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한 음식만을 먹도록 하신 것은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음식법은 제사법과 함께 이제는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약의 제사법과 음식법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복음 진리를 아는 자들은 이제 어떤 음식이든지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창세기 1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음식이 거룩하여 지기 때문에 음식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매여서 어떤 음식에 대해서 꺼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감사 기도하시며 음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이든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귀한 양식으로 믿고 감사 기도하면 그 음식은 거룩하여지고 우리의 양분이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섬기고 있는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어떤 자인지 말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디모데는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해준 복음이요 복음에 기초한 바른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가리켜 믿음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복음에 기초한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습니다. 교회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오고 많은 사상과 가르침이 전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따르지 않는 교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멀리 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의 말씀과 복음적인 교훈으로 양육을 받을 때 영적 지도자는 건강한 사람이 되고 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세워갈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우리 모임에 다른 가르침이 들어와 교회를 혼란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가르침이 신선하게 느껴져서 한 리더가 매료되었고, 그의 영향 아래 있는 몇몇 사람들이 우리 모임을 떠났습니다.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기도하고 영적 싸움을 싸워야 했습니다. 다른 복음과 다른 가르침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 영적 무장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복음적인 가르침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계속해서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겸손히 배우지 않고 높은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자만 할 때 영적 성장이 멈추게 되고 영적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영적 지도자는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지키는 데 힘써야 합니다. 바울의 가르침, 신앙선배의 가르침을 잘 받고 따라야 합니다. 목자가 좋은 양식으로 양육을 받을 때, 양들에게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을 전해 줄 수 있고 양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또한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과 힘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먼저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합니다. 당시 신화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신화로 인기몰이를 하고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디모데도 신화를 연구하고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어서 전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신화는 복음이 아니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신화는 망령되고 허탄한 이야기입니다. 재미는 있지만 진짜가 아니고 가짜이고 허탄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들을 때는 재미 있지만 돌아서면 공허하고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신화나 전설에 빠져들면 안 되며,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다음으로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경건의 연단을 말할 때 육체의 연단과 대조하여 말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축구 선수들의 허벅지는 보통 사람들의 허벅지와 다릅니다. 달리기와 축구공 차기를 통해 허벅지를 단련했기에 축구 선수들의 허벅지는 굵고 단단합니다. 저는 해마다 3.1절 마라톤에 참여하여 10km를 달립니다. 어떤 사람은 20km를 달립니다. 제 나이에 이렇게 뛸 수 있는 것은 연습과 훈련 덕분입니다. 운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은 육체가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습니다. 경건 훈련, 다시 말해 영적 훈련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그만큼 유익이 크다는 겁니다. 현재의 삶에 놀라운 축복이 따르게 되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인정과 상급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경건에 이르도록 우리 자신을 연단하고 있습니까? 요즈음 경건의 연단을 하고 있는 목자들이 늘고 있어 2025년 하나님의 역사가 기대되고 다음 세대 역사도 희망적입니다. 경건의 훈련 중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성경 읽고 필사하는 데 자신을 훈련하고 있는지요? 문한나 목자님은 속초에서 교사직을 감당하고 있기에 성경공부와 교제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단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필사입니다. 그녀는 성경필사하면서 새 힘을 얻고 있고, 어찌하든지 한 양을 먹이는 목자로 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홍갈렙 진숙 목자님은 새로운 요회를 개척하면서 양 무리의 본이 되고자 기도생활에 마음을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에 전국학생수양회 참석하기 위해서 15명이 멤버들이 대절버스에 탔습니다. 그때 멤버들을 격려하고 기도해 주기 위해 저도 버스에 올라탔는데, 많은 목자들이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그 날 매우 추운 날씨였는데 목자들의 뜨거운 사랑이 멤버들의 가슴을 꽉 채워주었습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많이 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시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쓰실 때 우리는 존재의미가 있고 참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바울은 경건의 연단에 대해서 말하면서 크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경건에 대한 말씀은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한 가지 점에서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자로 자신을 연단하지 않으면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고 신실하게 드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이 주일예배를 목숨 걸고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형제 자매의 결혼식이 있습니다. 직장 당직이나 근무가 있습니다. 중요한 약속이 잡히기도 하고 가족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평일에는 멀쩡했는데 주일예배에 갈 시간이 되자 갑자기 몸이 아픕니다. 학생들의 경우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문에 공부시간이 부족하여 주일예배가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사탄이 나에게 예배에 가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니 가지 말라고 속삭입니다. 저는 주일성수하기 위해서 대학생 때 일사각오의 결단을 드렸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에 병들거나 큰 수입이 있거나 가족행사가 있을지라도 목숨 걸고 주일성수하겠습니다 라는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단 한 번도 주일을 빠지지 않았습니다. 남동생과 여동생의 결혼이 주일에 있었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동생과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주일예배를 절대적으로 드렸습니다. 일년 365일 새벽기도 하겠다는 결단을 드린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키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의 연약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단이 있고 경건의 연단이 있었기에 새벽 첫 시간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대화하는 데 드릴 수 있었습니다. 경건의 훈련으로 저의 몸은 새벽에 깨어납니다. 아무리 늦게 자더라고 또 몸이 피곤하더라도 주님과 약속한 그 시간에 몸이 반응하여 일어납니다. 야곱은 임종 시에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도 기도하고 예배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경건에 이르도록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에 소망을 두기 때문에 경건 훈련보다는 육체의 훈련과 세상 일에 더 많은 투자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좋은 것들은 잠시 잠깐이요 결국 사라져 버릴 것들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믿는 자들의 구주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시련과 많은 실패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여 주시고,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 무엇을 말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목자가 양들을 살리고 풍성한 삶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영적 권위가 세워져야 합니다. 디모데는 연소함으로 인해서 교회 장로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디모데의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나이 많고 신앙연륜이 많은 성도들은 디모데의 리더십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전임목자 바울과 비교해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목회 경험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자신의 연소함 때문에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양복을 입고 고급 넥타이를 맨다고 영적 권위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성경지식을 많이 쌓고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말만 잘 해서는 안 되고, 말과 행실이 일치되고,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성경을 읽으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 말은 권위를 잃게 됩니다. 기도하라고 권면하면서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누가 따르겠습니까?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이 사랑의 본을 보이지 않으면 리더십이 세워지지 않을 겁니다. 목자는 본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좋은 본이 되셨습니다. 바울도 디모데의 좋은 본이 되었습니다. 고이사무엘, 배사라 선교사님이 우리의 좋은 본이 되셨습니다. 요회 목자들이 요회원들의 좋은 본이 될 때 그 요회는 양들을 얻고 먹이고 풍성케 하는 요회로 세워질 겁니다.
디모데는 특히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해야 합니다. 목자의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낭독과 메시지 전하는 것과 성경을 가르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말씀의 종, 성경선생을 통한 말씀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말씀 연구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데 힘씀으로서 말씀이 양떼들에게 바르게 들려지고 적용되어 구원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흥왕한 말씀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주셨던 은혜를 늘 기억하고, 때마다 주시는 말씀과 은사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나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정체되거나 퇴보해서는 안 됩니다. 내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서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나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행함으로 내 자신과 나에게 듣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말씀을 통한 역사라는 것을 인식하고, 경건에 이르도록 내 자신을 연단하는 데 힘써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