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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7차 서산 아라메길 1구간 "천년미소길" | |
1. 산행일시 | 2025년 4월 12일 07시 정각 |
2. 산행지 | 서산 아라메길 1구간 "천년미소길" |
3. 출발장소 | 청주종합운동장 서쪽 |
4. 경유지 | 청주종합운동장(07:00)~복대사거리~(07:10)~지웰시티(07:15)~서청주IC |
5. 교통비 | 삼만원 입금계좌 : 농협 010 - 7378 - 0100 - 09 황명남 수선화축제장 입장료는 개인부담 입니다. |
6. 산행코스 | A-해미읍성~개심사~마애여래삼존상~용현계곡입구~보원사지~유기방가옥 B-해미읍성~개심사~보원사지~마애여래삼존상~용현계곡입구(차량으로이동)~유기방가옥 |
7. 산행시간 | A-6시간(20km, 후미기준), B-5시간(15km, 후미기준) |
8. 산행안내 | 산이조아 010-8842-3136 |
9. 운행버스 | 엘리트관광 충남72바8054 (이진희사장 010-6348-8129) |
10. 준비물 | 식수(충분히), 맛있는 반찬, 개인간식, 등산용품 |
★ 점심 찰밥 제공합니다. | |
<산행시 유의사항> 1. 산행 중 자신의 실수로 발생하는 산행사고는 자신이 책임져야합니다. 2. 돌발 사고에 대비한 상해보험은 각자 개인이 가입하셔야 합니다. 3. 차량 이동중에는 반드시 안전밸트를 하셔야 합니다. 4. 차내 음주, 가무 및 음주산행은 불허하고, 개인 행동을 금합니다. 5. 갑작스러운 일로 산행 취소시에는 매주 목요일 오전까지 취소하시기 바랍니다. 6. 산행대장/산행리더의 지시/안내에 따르지 않는 회원에 책임 지지 않습니다. | |
♠산행지설명 ♠ 서산 아라메길’이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를 합친 아라메길은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산속에 자리한 유기방가옥은 1900년대 초에 세워진 양반가옥이다. 낮은 구릉지대 속에 자리한 유기방가옥은 산을 병품삼아 고고한 기운을 드러낸다. 주위가 낮은 언덕이라 이 곳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마을이 훤히 보이는 고개길이 나온다. 사람 키만한 갈대밭이 낯선 여행자를 안내한다. 어머니 품처럼 따스한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코 앞이다. 빛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마애삼존불상 미소의 힘이 가슴 깊숙이 느껴진다. 한창 보원사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보원사지를 지나면 탁 트인 구릉지대가 펼쳐진다.소박한 풍경은 서산의 역사와 조화를 이루며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늘과 맞닿을 듯한 여린 풍광은 ‘아라메길’의 장관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걷는 여행은 한없이 다정하다. 용현계곡은 가야산 계곡의 하나로 물이 풍부하고 나무가 울창해 심산유곡(深山幽谷)의 경치를 자랑한다. 황락저수지를 넘어가면 아라메길 마지막 코스인 해미읍성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서투른 발걸음은 덩굴이 담장을 덮은 위엄있는 성벽과 마주할 때 비로소 멈추게 된다. ◆해미읍성 海微邑城 ◆ 건립 경위 및 변천 현재 해미읍성 성벽의 둘레는 약 1.8km 정도이고, 높이는 일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5~6m 정도로, 성 안에는 객사와 관아를 비롯한 건물이 있으나, 대부분 1963년 사적 지정 이후 복원한 것으로 원래 있던 시설물은 청일전쟁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파괴되고 훼손되었다.조선 태종 16년(1416)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 병영(兵營)을 이곳으로 옮기는 논의가 시작된 이후 세종 3년(1421) 이전이 완료되었고 그 기간에 성이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이곳 해미성은 다른 일반적인 읍성과 달리 처음에는 고을의 치소(治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병영성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문종 원년(1451) 충청 전라 경상도 체찰사(體察使)였던 정분(鄭苯)이 하삼도의 읍성을 조사하여 올린 보고에 의하면 해미의 병영성은 충청도의 홍주, 비인, 남포, 보령, 당진, 면천 읍성과 더불어 그대로 사용하도록 한 읍성의 하나였다. 당시 기록에 둘레 3,352척, 높이 12척, 여장(女墻) 높이 3척(688개소), 적대(敵臺) 18곳 중 16개소는 아직 쌓지 않았고, 성문 4곳에 옹성(甕城)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외에 성 안에 우물 3곳이 있고, 성 밖의 해자(海子) 둘레는 3,626척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기록은 현재 읍성의 규모와 형식이 충청 병영성으로 조성될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이후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縣)의 동쪽으로 돌로 쌓은 병마절도사의 병영(兵營)이 있는데, 성의 둘레는 3,172척에 높이 15척이라 하고 내부에 세 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다는 기록과 진남문(鎭南門) 아래 인방석에 쓰인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을 통하여 성의 일부를 고치고 성벽을 높이는 등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효종 3년(1652) 충청병영을 해미에서 청주로 옮기고, 비로소 해미읍성 안에 해미현 치소와 호서좌영(湖西左營)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해미는 병영성에서 읍성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영조 때의 기록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성의 둘레와 높이가 각각 6,630척, 13척이고, 북문은 없고 남문은 홍예문으로 3칸 규모의 2층 누각 형식이고, 동문과 서문도 각각 3칸이라 하였다. 그 외 초루(譙樓)와 포루(炮樓)는 없으나 옹성이 2곳에 있다 하였는데, 현재 옹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옹성은 현재 남아 있는 치(雉)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 후기 헌종 15년(1849)년 건립된 「좌영루첩중수비문(左營樓堞重修碑文)」에 의하면 당시 성첩이 붕괴되고 문루가 다 허물어졌기에 밀양 박민환(朴民煥)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자금을 끌어모아 대대적인 수리를 시작하여 1848년 동문, 서문, 남문을 차례로 준공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1916년 소실되었던 서문〔정분문(靜氛門)〕과 1926년 붕괴되었던 동문[규양문(葵陽門)], 그리고 현재의 남문[진남문(鎭南門)]은 이때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해미읍성이 그 기능과 모습을 잃게 되는 것은 갑오개혁 이후다. 지방 행정 체제가 23부제로 변경되면서 읍성의 기능이 폐지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읍성 내부에 있던 공해 시설이 훼철되고 멸실되었다. 다만, 이때에도 다른 지역 읍성의 경우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내거나 건물을 짓는 등 그 원형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하여 본 읍성의 성벽은 훼철되지 않고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였다. 형태와 특징 해미읍성은 전체적으로 남북 방향이 조금 긴 타원형으로, 북쪽으로는 구릉이 위치하고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도로와 이와 직각을 이루며 교차하는 남문으로의 도로가 ‘T’자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진남문으로부터 북쪽의 구릉으로 이어지는 중심축 종점에 동헌 영역이 위치하며, 객사와 기타 공해 시설은 동헌의 앞쪽으로 각각 동서로 나뉘어 분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동서가로는 일직선이 아닌 남쪽으로 굽은 형태가 되었다. 그렇지만 병영성에서 읍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비교적 늦은 시기인 영조 30년(1754) 무렵에 객사가 건축되어 객사의 축이 동헌과 일치하지 않는다. 발굴 조사 결과 기록에서와 같이 읍성 외곽으로 해자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축성 과정에 충청도 각 지역의 도민들이 동원되어 구간별로 책임을 지고 공사하였음을 성돌에 새겨진 각자석(刻字石)을 통해 알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해미읍성은 세종 초에 고을의 치소가 아닌 병영성으로 축성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효종 때 병영을 청주로 옮기고 현치를 이곳에 둠으로써 일반적인 읍성이 된 특이한 내력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호서좌영이 설치됨으로써 여전히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성 외곽으로는 해자를 설치하고 성 내부는 ‘T’자형 도로를 중심으로 배산(背山) 형식의 구릉 아래 동헌과 객사를 배치하고 나머지 공간에 민가를 배치하였다. 조선 초기 축성 연대가 정확하고, 비록 성내 시설 대부분 멸실되거나 훼철되었으나, 기록으로 전하는 당시 축성 규모와 형식이 일제강점기와 근대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거나 훼철되지 않고 유지됨으로써 지방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 위치한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상(마애불)으로 백제의 불상 조각 작품으로 추정한다. 세 불상이 모두 입가에 오묘한 미소를 머금어 흔히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불상으로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태안 마애여래삼존상보다는 조금 더 이후 시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본래 바깥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잊힌 불상이었다가 1959년에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삼존상이 있는 서산 가야산은 백제시대부터 개심사 등 여러 절이 창건된, 일대에서는 유명한 산이다. 현재는 절터만 남은 사적 제316호 보원사지(普願寺址)도 가야산에 있는 오래된 절 터이다. 보원사는 여러 기록과 현재 남아있는 유물들을 보면 백제 때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 기간 융성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쇠퇴한 모양이다. 학자들이 절 터를 발굴 조사하던 1959년 4월 어느 날, 국립부여박물관 관장 홍사준은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혹시 절에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지, 산에서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나 석탑 따위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다녔는데. 한 주민에게서 인(印)바위에 가면 웃는 산신령 조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그 주민은 삼존상이 산신령과 그의 두 부인들이고, 우측에 있는 부인이 앉아서 턱을 괴고 놀리자 좌측에 있는 부인이 화가 나서 돌을 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삼존상을 확인한 홍사준은 이 사실을 학계에 보고했고, 이렇게 해서 1500년간 산 속에 있던 삼존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높이 10m가 넘는 거대한 암벽을 깎아 만든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풍부한 입체감과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삼존상은 높이 2.8m 석가여래입상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높이 1.7m 협시보살을 두었는데 우측의 보살은 보통의 보살입상이지만 좌측의 보살은 특이하게도 반가사유상의 형식으로 조각되었다. 반가사유상은 6~7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불상으로 많이 제작되었지만 마애불 중에서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 서산 삼존상의 본존불은 어떤 부처인지 그 자체로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좌우 협시불의 형식을 보고 추정한다. 세 불상을 보면 먼저 우측의 보살입상은 보관을 쓰고 양손을 모아 보주를 든, 일명 봉보주(捧寶珠)보살상 형식인데 보통 관세음보살로 여긴다. 좌측 반가사유상은일반적으로 출가하기 전, 고뇌하는 석가모니 혹은 미륵보살로 본다. 이 해석을 적용한다면 우측의 봉보주보살상을 관음보살, 좌측의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좌우 협시불로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을 두는 형식은 오직 이 삼존상에서만 나타나고 다른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므로 서산마애삼존상은 매우 독특하다. 당시 백제인들의 독창적인 형식일 터이다. 서산 삼존상의 이러한 스타일 때문에 본존불이 누구인지 여러 해석이 있는데, 만약 좌측의 반가사유상을 일반적인 견해대로 미륵보살로 본다면, 본존불은 미륵보살과 가장 관련이 깊은 부처인 석가여래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봉보주보살상은 관세음보살이 아닌 제화갈라보살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미래를 상징하는 미륵보살, 현재를 상징하는 석가여래, 과거를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로 구성이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 이러한 추론은 삼존불이 미래-현재-과거를 상징한다는 법화경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는 이쪽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우측의 봉보주보살상이 7세기를 전후로 백제, 일본, 중국에서만 나타난 형식임을 근거로 관세음보살이라고 본다면, 본존불이 아미타불일 가능성도 있다. 서산 삼존상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만약 서방극락세계의 부처인 아미타불이 본존인 아미타삼존상이라면, 우측의 봉보주보살상은 정석대로 관세음보살이고 좌측의 반가사유상은 원래 대세지보살이어야 한다. 당시 백제인들이 대세지보살 대신 백제에서 인기가 많았던 미륵보살을 반가사유상 형식으로 조각했으리란 추정도 있다. 서산 삼존상은 반가사유상의 코, 팔 부분이 조금 훼손된 것을 빼면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이 불상이 이 자리에서 1500년 세월을 보냈음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 1965년에 삼존상을 보호하겠다고 보호각을 설치했는데 오히려 습기가 차고 백화현상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자 2005년부터 문과 벽을 부분적으로 철거했고 2006년에는 완전히 철거했다. 상술한 보원사지와는 물리적으로 거리가 가깝고 연대도 비슷하기 때문에 관련이 있으리라 추정하지만 어떠한 기록도 남지 않아 정확한 사정은 모른다. ◆ 개심사 ◆ `마음을 여는 절`인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4년) 해감 국사가 창건하고, 고려 충정왕 2년(1350년) 처능대사가 중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포양식의 정수로 손꼽히는 대웅전(보물 제143호)을 비롯해 영산회 괘불탱화(보물 제1264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19호) 등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 보원사지 ◆ 서산 보원사지에 있었던 사찰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 백제시대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보원사지 5층 석탑 통일신라~고려초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목조탑 파에스 석조 타파로 변환되는 과정의 형식이며 아래 총 기단에 사자상을, 위층 기단에 8부 중상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기단부에 우주, 탱주를 세웠고 탑신부 1 총 밑에 받침돌 한 장을 끼워 넣은 것과 옥개석의 물매가 평활하며 끝이 살짝 들어 올려진 것 등이 백제계 양식이다. 또한 옥개석 받침을 4층으로 한 것은 신라계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백제지역에 신라 이후 세워지는 석탑의 공통된 양식이다. | |
좌 석 배 치 도 | ||||||||
운전석 | 땀나쥐 의송 | 산이조아 | ||||||
4 | 하늘 | 3 | 회장님 | 2 | 릴리 | 1 | 비비안나 | |
8 | 김순옥 | 7 | 임근섭 | 6 | 크리스탈숙 | 5 | 김수아 | |
12 | 짝꿍 | 11 | 꾸러기 | 10 | 유석 | 9 | 소현 | |
16 | 강호길 | 15 | 연규호 | 14 | 장경 | 13 | 해인 | |
20 | 솔미 | 19 | 덕향 | 18 | 솔향기 | 17 | 솔향기 | |
24 | 무상초 | 23 | 무상초 | 22 | 마당쇠 | 21 | 피아노 | |
28 | 광동탕 | 27 | 큰산 | 26 | 산들이 | 25 | 한라산 | |
32 | 박승영 | 31 | 컨추리 | 30 | 컨추리 | 29 | 컨추리 | |
36 | 강돌이 | 35 | 소율 | 34 | 가로수 | 33 | 발산 | |
40 | 김만옥 | 39 | 김만옥 | 38 | 바우 | 37 | 임창순 | |
45 | 정경우 | 44 | 강천수 | 이병관 | 42 | 이철호 | 41 | 이동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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