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증막에 오래 앉아 있을 때처럼 홧홧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마스크 안쪽이 눅눅해진다. 오르막길이라도 걸어 오를라치면, 숨이 턱턱 막힌다. 특히나 요즈음처럼 무더울 때는 KF94에 비해 조금 얇다는 KF80도 털옷처럼 갑갑하다. 눈만 내놓고 나머지 얼굴 부위를 가리고 집밖으로 나선 지도 벌써 삼년 차가 되었지만, 마스크 안에 갇힌 뜨거운 내 입김으로 얼글이 후끈거린다. 그런데도 사회적 약속을 철썩 같이 지키는 국민성을 지닌 옆 나라 일본사람들은 마스크를 '얼굴 팬티'라 부르며, 공공장소에서는 절대 벗지 않는단다.
하기는 마스크 덕을 보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꽤 있다. 속된 말로 '마기꾼' 이라 불리는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할 때는 예쁘거나 멋있게 보이지만, 마스크를 벗으면 실망스럽다는 뜻에서 사기꾼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일까? 요즘 성형외과는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는 작금의 상황을 십분 이용하는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대체로 콧대를 높이거나 턱을 깎는데, 어차피 누구나 쓰고 다니는 마스크로 수술부위를 가릴 수 있기 때문에 완치가 될 때까지 수술 사실을 티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장점이 있단다. 모두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나 역시 지하철을 탈 때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쓰윽 살펴보는 습관이 있는데, 마스크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다고 해서 그만 두게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절반의 영역은 내 상상이되, 그 상상을 즐겁게 이끌어 주는 건 역시나 눈이다. 특히 커다란 눈망울에 새카만 눈동자를 지닌 젊은 여인이 봉황의 꼬리처럼 눈초리를 길게 위로 빼고 성냥개비 다섯 개는 거뜬히 올려 둘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속눈썹을 마스카라로 바싹 치켜 올린 눈 화장을 뽐내고 있을 때는 감상을 넘어 감탄을 하게 된다.
눈 화장에 공들이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라티프는 내게 한국어를 개인 교습을 받는 대학원생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머리에는 늘 히잡을 쓰고 있었기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길었는지 짧았는지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라티프를 떠올릴 때면, 제일 먼저 실제 눈의 윤곽보다 더 길고 크게 이어진 아이라인 위로 덧붙여진 속눈썹이 생각났다. 어지간히 늘지않는 그녀의 한국어 실력에 실망한 나는 멘토로서 가끔 주제 넘는 참견도 했었는데, 언젠가 한 번은 "네 자존심은 그 눈썹에 달렸니?" 라고 말하며 본심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먹였다. "언니가 히잡을 써보지 않아서 그래요. 나도 여자인데 머리카락을 드러낼 수 없으니까요." 나는 얼른 한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야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는건데, 내 앞에 있는 라티프란 거울에 비친 나의 참모습은 관용이란 미덕이 눈꼽만치도 없이 옹졸하고 편협하기만 했다.
언젠가 아가니스탄으로 해외 파병된 후배가 내게 자신의 핸드폰에 담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치대를 졸업한 덕에 위생병의 신분이었던 그 친구는 비록 자신은 남의 나라 전쟁터로 보내졌지만, 현지의 교실 풍경을 사진에 담아올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며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술 한 잔을 입안으로 털어놓고는 한숨을 쉬며, 저 애들은 여학생이라고 했다. 사실 모두 다 시커먼 자루 같은 걸 뒤집어쓰고 있어서 고작 중학교 여학생인지 알아챌 수도 없었다. 잠시 뒤 사진을 확대해 보니, 첫줄에 앉은 아이들의 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모두 모자이크처리를 한 것처럼 칙칙한 망사 뒤에 커다란 눈망울을 숨기고 있었다. "부르카예요, 누님. 저 나라에서는 생리할 나이만 되면 여자는 그림자 취급을 해요." 그러면서 후배는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이어, 후배는 부르카 안에 청바지와 쫄티를 입고 심지어는 배꼽 피어싱까지 한 애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걸 어떻게 봤을까 싶은 의심 섞인 불쾌감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문화 속에서 멀쩡히 살아서도 무덤 속에 갇혀버린 여자애들이 느꼈을 분노 같은 것이 내 안에서 끓어올랐기 때문이었다. 눈까지 가려버린 부르카에 비하자면, 라프티의 히잡은 여성도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당당히 할 말도 할 수 있게 배려한 머리쓰개처럼 생각되었다. 사실, 부르카를 쓰지 않았다고 명예살인을 당하는 이슬람 여성의 사진도, 이민자 여성들이 부르카를 뒤집어썼다고 불편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파리지앵의 표정도 내 마음을 바닥까지 흔들어 놓는다. 전신을 감싼 부르카 속에 총이라도 감췄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서방 세계가 지금껏 겪어온 테러의 위협에 대한 집단적 신경쇠약 반응이리라.
하지만 시커먼 부르카는 어쩐지 죽음을 연상시킨다. 움직이는 관 같다는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전쟁터에서도 여인들은 부르카 속에 청바지와 쫄티를 입고서 꿋꿋하게 자신만의 개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세계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고, 코로나19가 전세계를 점령했다. 그런 중에 마스크가 우리들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더라도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자기만의 방에서는 마이크를 잡는다. 물리적인 격절의 세월이지만,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있다고 개개인의 생존을 세상 밖을 향해 생중계하고 있다.
하얀 마스크 일색에서 파스텔 톤으로 색깔의 선택도 다양해지고, 꽃무늬며 기하학 패턴이며 마스크 모양까지 화려해졌다. 흑사병이 창궐했던 중세시대의 방역 의사들이 얼굴에 뒤집어쓰던 마스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새 부리형 마스크에서 인체공학적인 마스크에 이르기까지, 바야흐로 마스크도 또 하나의 개인의 개성을 담아내는 패션의 시대가 되었다.
야외 활동 시에는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방역당국의 친절한 문자 메세지를 받은 지도 두 어 달이 지났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렇게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스크가 마치 얼굴 방패라도 된 것인 양, 표정들을 숨기고 있다.
'부르카를 쓸까, 부르카를 벗을까' 사이에서 생존의 고민을 하는 이슬람 여성들의 유난히 크고 짙은 눈망울이 떠오른다. 쓰고 벗는 사이에 생사의 갈림길이 있는 그네들의 폐쇄적인 삶에 비하자면, '마스크를 쓰느냐, 마스크를 벗느냐' 는 어느덧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실존의 문제가 된 것 같다. 오늘도 나는 마스카라로 눈썹을 올리고 싶다. 라티프 스타일로 차양을 길게 쳐주면, 보기 좋게 시원한 그늘이 생겨 눈살을 찌푸린 일도 지나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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