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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의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인식 연구
(서명범 목사)
1. 칼빈의 설교자(목회자) 직분에 대한 인식
1) 하나님을 대표하는 설교자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인 목사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알아보고자 한다.
설교자에 대한 칼빈의 인식은
그의 설교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의 권위에 있어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유일한 권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 강요 4권3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를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눈에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은 그의 이 권위를 사람들의 봉사를 통해 이루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26:11), 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명백하게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직분은
최고의 영광스런 직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먼저는 우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심인데
사람들을 택하여 자기의 사자(고후 5:20)가 되게 하시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사람들의 겸손을 위한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
훍에서 나온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 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증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임명된 한 사람의 목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제자로 부름받은 많은 사람들이 한 입으로
공통된 교훈을 받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일을 통해 교회를 한 끈으로 묶으셔서 연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2) 사도의 계승자인 설교자
그리고 칼빈은
“현대의 교사들(오늘날의 주일학교 교사가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세운 직분 혹 신학교수들)은
고대의 선지자에(듣지 못한 새로운 복음을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목사(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제자 훈련과 성례를 집행하며 경고와 권면하는 일을 하며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직분)는
사도에 해당한다”고 했다(기독교 강요 4권 3장 5).
그는‘“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인데
교회의 사역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로서 파견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나 12사도와는 구별되는 직분(듣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전하는 사명에 있어서)이라고 했다.
목사가 사도와 같은 책임(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하고)을 맡았다는 것은,
주님이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 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오늘날의 목사들이 동일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4권 3장 5).
그리고 칼빈은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오늘날의 목사에게도 해당된다’고 하였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9:16-17).(기독교 강요 4권 3장 5).
사도는 전 세계를 위해 활동했지만
목사는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사도와 동일한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을
목사의 말씀 사역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사에 대한 고등(高等)한 관점이
그를 말씀 사역에 더욱 정진토록 했던 것이다.
2. 설교에 대한 칼빈의 인식(認識)
이러한 칼빈의 설교자에 대한 관점은
그의 설교에 대해서도 고등한 관점을 갖고 행하게 했다.
오늘날 설교를 마치 “도적적 훈화”나 교장 선생님의 “지당한 말씀” 정도로 생각하는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칼빈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
칼빈은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고 선언했다.
그는 Person(인격)과 Funtion(기능)을 구분하였다.
그는 기독교 강요 4권3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말은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입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행하시는가?
칼빈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먼저는 우리에 대한 자기의 관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택하여 자기의 사자(고후5:20)가 되게 하시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셔서
인간들에 대한 자기의 관심(사랑)을 보여주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사람들의 겸손을 위한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
훍에서 나온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 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증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목적에 의해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4권 3장 1)
그래서
그는 자기도 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됨을 이렇게 말했다.
“말은 내가 하지만 교육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도 내가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만일 저 높은 곳으로 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이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소리는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설교는)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라고 했던것이다.
2) 성례전(聖禮典)의 신비(神祕)와 동일(同一)한 신비로운 설교(說敎)
그러나 칼빈은
설교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칼빈은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동안
성령께서 계속 감동할 여지가 있어야 함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
칼빈은 (딤후 1장 9,10절)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거나
역사함이 없이는
또는 믿음으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다.
그러므로
청중의 가슴 속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조명과 믿음의 수반없이는
말씀의 성실한 설교일찌라도
청중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성령(聖靈)의 내적(內的)사역(事役)을 강조하는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설교는 성령의 권능으로써만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을 뿐이며,
외적인 말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효력도 청중에게 미칠수 없다” 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능력이 말씀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주이시고 구주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설교자는 설교에 앞서 기도로써 준비하여
말씀을 전달하는 그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가 그 자체로서는
듣는 이들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없음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성경은 회개의 은사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회심의 역사, 구속과 영생의 기쁨이
죄인들의 영혼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설교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인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칼빈은
성령의 감동을 설교의 효력에 결정적 요인으로 말했다.
그러나 칼빈은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은
기록된 성경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루터와는 달랐다.
또한 쯔빙글리나 재침례파와 같이
설교를 단순히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로 보지도 않았다.
칼빈은 성경을
성령의 독특한 영감을 통해 기록된 형태로 주어진
하나님의 객관적 말씀으로 믿었다.
그리고 설교(說敎)는
기록된 말씀을 풀어 해석(解釋)하는 것으로써만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미가서 강해(講解) 중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 교훈들이 성경에 일치하는 것인지를 조심하여 점검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강해(講解)하는 것이 아니라면 설교나 교리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을 첨가하면,
그것이 아무리 미세하고 의미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고 거짓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서들과 복음서들을 통해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에 속한 것을 하나도 더 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의 임무란,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 더 깊게 뿌리내리도록
충분한 말씀 강해(講解)를 제시(提示)하는 것입니다.
모든 강론(講論)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계시는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모든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꾸며 낸 것은 어느 것이든 더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설교자들은, 자기들이 고백하는 것이
자기 자신들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틀림없는 진리에서 나온 것인지를
확인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미3:5-8 (칼빈의 미가서 설교 중에서)
칼빈은 이렇게
객관적 계시로서의 기록된 성경(聖經)과
기록된 성경을 풀어 해석(解釋)하며 적용(適用)하는 설교(說敎)와는 구별(區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령께서 설교자와 청중들을 다 감동하실 때만이
설교가 구속적(救贖的)인 효과를 가진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객관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설교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록된 말씀과 같은 권위로 임하고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례전에 관한 그의 교리와도 통하는 견해인 것이다.
즉 성례전에서 주님의 은총이 임하듯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이다.
성례전의 떡과 포도즙은 객관적 실체이다.
그것은 떡과 포도즙 그대로 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무 효력이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님이 약속하신 실재(예수님의 피와 살)를 먹게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에게 효력이 나타난다.
이와같이
설교자의 설교를 청중이 믿음으로 받을 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약속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이 말씀이 믿는 자의 속에서 역사한다는 것이다.(살전2:13).
설교는 기계적으로 효력을 발(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 효력을 발(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어떤 설교도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신비로운 감동하심의 역사로 말씀을 사용하실 때
그 설교는 효과적이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성례에 참예하는 자들이
주님이 약속하신 살과 피를 먹음같이
믿음으로 설교자의 말씀 듣는 자가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례(聖禮)와 설교가 기록된 말씀에 의존해야 하나,
둘 다 성령의 은혜로운 임재로 채워질 때에만
실재적 은혜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 구원과 심판의 이중 음성의 설교
칼빈에 의하면
설교에는 두 가지 목소리 (이중음성)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溫柔)한 음성이
고,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怒聲)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사야 주석 55:11에서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 데에 효과적인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증거의 역할은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까지 반발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 향기가
이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다른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 역사함과 같은 의미(고전2:15-16)인 것이다.
실제로 칼빈은 자신에 대한 많은 비난과 반대자들을 극복해야 했다.
베자(Beza)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제네바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르는 개들을 “칼빈”(Calvin)이라고 부름으로써 개혁자에 대한 자신의 경멸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는가 하면,
혹자는 칼빈의 이름을 줄여 가인(Cai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 칼빈에 대한 증오심”을 핑계 삼아 성찬에의 참여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무익하게 된다...
만족할 만한 복음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라는 말만이 필요하다.
선하고 진실한 목자는 성경을 간신히 해설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주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청중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복음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미암아 설교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가 곧 내 말을 듣는 자라고 말하셨습니다.
모든 교직자가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야 된다는 것을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자신은 그 설교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또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섭리(燮理)를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복종하지 않으려 한 "여러 사람들의 반역"을 이야기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사역을 옹호하였다.
"아무것도 아닌 이 버릇없는 인간들은
자기네들이 잘못을 범하였을 때
그 사실을 자기들에게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 들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곧 '당신들이 우리에게 명령할 순 없어!'라고.
그렇다면 하나님도 않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밀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임하신 때문입니다...."
"누구든,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쪽으로 가야한다는 식으로 명령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념해 가르치기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한 분 주님이 계시고
그 분은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여기 서있는 것도 아니고
그 무엇도 나를 통해 전진시키기 원치 않으며,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올 생각도 없으며
오직 내가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반박하는 자들이 있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복종해야 하며,
모든 거만한 것들이 꺽여야만 하고
또 큰 자나 작은 자 할 것 없이 자신이 복종해야 할 이에게
주둥이를 내밀거나 눈울 치켜 뜨는 피조물이 있어서는 않됩니다."고하여
설교를 통해 다스리시고 명령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항해서는 않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복음의 제시는 꾸밈없이 용기있게 제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과 전쟁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할 내가 악을 허용하고자 한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같은 일이 정당하게 되거나 또는 우리가 이런 것을 구실로 이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무리 이것 저것 갖다 붙여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良心)은 우리를 매우 꾸짖게 됩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20장 18절 이하를 설교하면서
“...나는 이처럼 내가 내 양심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이 허락지 않든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내게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는 일을 하라고 사람들이 날 강요하든 간에
나는 내가 해야할 일 이외의 것을 넘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이 설교하고
또 여러분에게 봉사할 수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이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는
그의 욥기33:1-7 설교에서 말씀 사역자와 청중에 대해 이렇게 설교했다.
“...하나님을 따라 곧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에 시선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만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 일에 좌우된다면
우리에게 선한 원리가 하나도 없을 것이고,
결국 고통 밖에는 당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문제가 될 때에는 더
욱 더 그러합니다....
만일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보고서 두려워져
마땅히 말해야 할 바대로 자유롭게 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처사가 아닐까요?
어떤 세상 군왕이 한 사람을 파송하였는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비웃고
그 임무를 마땅히 행하지 못하게 해도 가만히 있으며,
자기가 위임 맡은 메시지를 감히 전하지 않고 있다면,
그 겁장이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먼지에 불과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도록 받아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영예로운 임무를 주시고,
모든 권위와 경외심을 옷입혀 그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무섭게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왜곡시켰다 합시다.
아니면
그 하나님의 진리가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위를
더 이상 갖지 못하게 그 진리를 전한다고 합시다.
그만큼 하나님의 질책을 받을만한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목회자로 가르침의 직무를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은 결연한 자세를 가지고 예레미야가 말하듯이
어느 것에도 관여치 말고 싸우는 날의 장수처럼 담대해야 합니다(참조,예레미야 15:20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왜냐하면 세상에는 말할 수 없이 강퍅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망각하여 자기들을 창조했고 조성하신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는 때,
도저히 남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관성을 지니고 우리의 의무를 감당할 때도, 적수를 만나거나 불쾌함을 맛보게 될 것임을 당연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적과 불쾌함을 만나더라도 결코 믿음을 굽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목회자로 장립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그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또한 여기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인 교훈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우리 죄를 책망하는 것을 듣고 오만한 자세를 취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노를 격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등을 가볍게 문질러 주는 것을 가지고
노를 격발할 정도로 분개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해야 마땅한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주제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 속에 어떤 선한 기질이 있는 체 하면서
우리를 아껴 달라고 요구해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된 것은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들을 내맡기게 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누구나 다 그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왕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마땅히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될 때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압시다.
왜 그렇습니까?
왕들이라 할지라도 그 점을 의식해야만 함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는 그 사람이 어떠한 주인, 어떠한 상전으로부터 보냄 받았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복종을 받아야 하고
온 인류를 지배하는 주권적인 통치권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까불댄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더러 본성을 바꾸시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낮추라고 덤벼드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마귀적인 무모함이 아닙니까?
그러니 모든 겸손과 겸비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의 순종이 이러한 방면에서 시험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응당 그래야 하듯이
어느 누구도 그러한 시금석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모든 허물이 곧바로 드러나고야 맙니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은 그 말씀을 변개할 수 없고
청중은 그 말씀을 거부해선 않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교인들의 취미(趣味)와 즐거움에 영합(迎合)하여
자기 인기(人氣)를 위해
온전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설교자들은
이런 칼빈의 음성을 들어 회개(悔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의 설교를 비판이나 하고 경청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거절하는 자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웨스트 민스터 신학회 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