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가소바다 Sargasso Sea는 바하마 제도의 동쪽에 위치하여 유럽과 서인도제도를 가르고 있다. 물 흐름이 느리고 바람이 거의 불지 않으며 ‘사르가숨’이라는 해초 뭉치들이 떠다니는 그 바다는 조난선의 표류물이나 온갖 것들이 모이는 곳으로 ‘죽은 바다’이다. 이것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재산 때문에 자신과 결혼한 남편에게 정체성까지 유린당하고 마치 유령과도 같이 빈껍데기만 남은 앙뜨와네뜨의 질식에 가까운 삶의 은유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근이 연명하던 앙뜨와네뜨는 어머니 아네뜨와 삶의 행로를 같이한다.
진 리이스 Gwen Rhys는 『제인에어』를 읽고 충격에 휩싸인다. “버사 Bertha에게 삶을 써주고 싶다”는 강렬한 동기로 영국신사 로체스터의 미치광이 전 부인 ‘버사 메이슨’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바로『제인에어』의 버사가 다락방에 갇혀 마치 포효하는 짐승처럼 위험한 존재로 그려지지만 왜 그녀가 정신줄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가에 대한 아무런 해명도 없었다는 데서 촉발된 진 리이스의 분노인 것이다. 또한 버사도 온전한 한 인간이며, 따라서 그녀의 삶에 있어서도 과거가 있었고 미래의 삶도 이어가게 해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사명감이기도 하다.
진 리이스는 삶과 사랑, 그 모두에 있어 성공을 거둔 제인을 빛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여인인 버사의 삶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영국인과 결혼한 뒤 미치광이가 되었던 수많은 크레올(흑인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 여성들의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진 리이스 자신의 어머니도 앙뜨와네뜨처럼 크레올계의 후손이었고 그녀는 도미니카의 수도인 로소에서 태어났다. 지배층 백인과 원주민 흑인 사이에 존재하는 서인도제도의 인종적,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두 세계에서 보낸 리이스 일생의 첫 16년 동안은 『광막한 바다, 사르가소 Wide Sargasso Sea』의 주된 배경을 이루게 된다.
『광막한 바다, 사르가소』는 총 3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는 앙뜨와네뜨가 혼돈의 기억 속에서 재현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들려준다. 2부는 『제인에어』의 로체스터가 화자로 등장하는데, 중간에 불쑥 앙뜨와네뜨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로체스터와 앙뜨와네뜨 각각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적대적인 감정으로 치달아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3부는 앙뜨와네뜨를 감시하기 위해 고용된 그레이스 푸울의 관점으로 시작되다가 다시 숀필드 저택 다락방에 갇힌 앙뜨와네뜨가 절망적이고도 체념어린 목소리로 현재 상황을 말하고 있다.
앙뜨와네뜨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은 나른하면서도 암울하다. 또 한편으로는 격정적이기도 하다. 토착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의붓아버지 메이슨은 농장 노동자들에게 불신을 사게 되고, 결국 적대적인 니그로들의 폭동에 의해 집이 불타게 된다. 머리카락이 불타면서까지 백치 아들을 구한 어머니 아네뜨는 불타고 있는 집에서 보석함도 아닌 앵무새 꼬꼬를 가지러가겠다고 우긴다. 앙뜨와네뜨는 단지 쿨리브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같은 음식을 먹고 자랐고 함께 나란히 누워 잠을 잔 적도 있으며 같은 강물에서 수영을 하며 놀았던 친구 티아를 향해 달려가지만 티아가 던진 돌멩이에 맞는다. “나의 얼굴에서는 피가 흐르고 티아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채 우리는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제1부 43쪽). 한 달 반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 보니 백치증을 가지고 태어난 동생 삐에르는 죽고 어머니는 자신을 만나러 온 딸을 난폭하게 밀어내 상처를 입힐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미(美) 자체를 상징하듯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죽고, 앙뜨와네뜨는 기상을 알리는 목탁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는 광명의 집이자, 죽음의 집인 수도원 기숙사에 들어가게 된다.
제2부는 로체스터의 의식이 주를 이룬다. 로체스터는 형이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부를 충족시키기 위해 앙뜨와네뜨와의 결혼을 감행하려한다. 유럽인들은 크레올이 유색인종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관능적이며 퇴폐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로체스터는 앙뜨와네뜨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성적인 광폭에 휩쓸렸던 것도 잠시일 뿐이고 부를 거머쥐고 나자 그녀의 야생성에 신물이 나게 된다. 앙뜨와네뜨의 배다른 오빠라고 자처하는 다니엘 카스웨이에게서 그녀의 어머니 아네뜨 얘기와 광기어린 집안내력, 앙뜨와네뜨의 위안이 되었던 산디와의 관계를 악의적으로 와전시킨 것을 전해 듣자 연민의 정마저 바닥나 버린다.
제2부에서 앙뜨와네뜨의 목소리로 갑자기 변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유모 크리스토핀을 찾아가는 시점이다. 앙뜨와네뜨는 주술의 힘을 빌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들어 달라고 간청한다.
“널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널 사랑하도록 만들어 놓을 순 없어.”
“남자가 널 사랑하지 않는 경우에는 니가 애를 쓰면 쓸수록 남자는 널 더 싫어하는 법이라구, 남자란 그렇다구. 니가 사랑을 해주면 널 혹독하게 대하다가도 사랑을 해주지 않으면 밤낮으로 진저리가 나도록 널 쫓아다닐걸.” (제2부 118쪽)
크리스토핀은 앙뜨와네뜨에게 남편을 떠나 마르티니크로 떠날 것을 권하지만, 로체스터를 갈망하게 된 그녀는 크리스토핀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된다.
앙뜨와네뜨라는 이름이 그녀의 어머니 이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게 된 로체스터는 더 이상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내 이름은 버사가 아녜요. 당신은 왜 날 버사라고 부르죠?”
“내가 특히 좋아하는 이름이니까. 난 당신은 버사라로 생각하고 있어.” (제2부 151쪽)
“버사는 내 이름이 아녜요. 당신은 다른 이름으로 날 부름으로써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난 알고 있어요. 그거 역시 오비아라구요.”
“나는 당신을 증오하는 만큼 이제 이곳을 증오해요.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 내가 얼만큼 당신을 증오하는지 꼭 보여주겠어요.” (제2부 167쪽)
로체스터에게 모든 것을 잠식당한 앙뜨와네뜨는 유리병을 손에 들고 로체스터를 위협할 때조차도 일종의 꼭두각시 같은 느낌을 주었고, 모든 것을 체념한 그녀의 목소리는 죽은듯한 기묘하게 냉담한 음성, 인형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로체스터는 인형에 대한 소유권을 과시라도 하듯 앙뜨와네뜨를 영국으로 데리고 들어가 숀필드의 다락방에 감금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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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는 짧지만 강렬하다. 앙뜨와네뜨는 자신의 어머니 아네뜨가 즐겨 입었던, 죽어서 포인씨아나 꽃나무 밑에 묻히면 꽃이 필 때 영혼도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던, 그 타오르는 듯한 포인씨아나꽃 색깔의 빨간 드레스에 집착한다. 흰 드레스를 입고 혼자 콧노래를 부르는 제인에어와 마주치기도 한다. 그리고 숀필드는 앙뜨와네뜨가 던진 양촛불에 의해 불타고 그 불길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 그녀가 걸어가는 길을 밝혀준다. ‘나는 촛불을 손에 들고 밖에 서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이 집으로 오게 된 이유를 깨달았으며 또한 내가 해야만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제3부 217쪽)
진 리이스는 아네뜨와 앙뜨와네뜨 모녀 이외에 크리스토핀이라는 강인하고 현명한 흑인여성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크리스토핀은 술병으로 남편이 죽자마자 노예들의 반란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난 아네뜨 곁을 지켰으며 그녀의 장례식에서는, 기도를 드렸지만 말들이 의미를 잃은 채 땅에 떨어지는, 앙뜨와네뜨의 몫까지 슬피 울었다. 또한 어머니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앙뜨와네뜨의 유모이자 불안한 정신의 소유자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정신적인 버팀목이 된다. 크리스토핀은 마르티니크 태생으로 오비아 마법이라 불리는 주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로체스터에게 있어 유일하다시피 한 정적이었으며, 앙뜨와네뜨를 온몸으로 막고 서 있는 방어벽이었다. 로체스터는 크리스토핀이 재판관 같은 어조로 자신을 심문하자 그녀가 하는 말들이 한마디 한마디씩 되풀이되어 자신의 머릿속에서 엄청난 소리로 울려 퍼지는 경험을 한다. 급기야 그는 앵무새처럼 크리스토핀의 말을 되뇌게 된다.
붉은 실로 끌어당기는 조종 인형 마리오네따 Marionetta, 마리오네따를 조작하는 인형극 마리오네트 marionette, 로체스터는 앙뜨와네뜨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인형으로 만들려한다. 앙뜨와네뜨의 돈은 원하지만 그녀는 원하지 않았던 로체스터는 앙뜨와네뜨가 태양 밑에서 다시는 웃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눈빛에서 증오의 빛이 스러지고 증오심과 함께 자신의 아름다움도 사라져버려 허깨비에 불과한 앙뜨와네뜨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죽으라고 말만 하세요, 그럼 내가 죽을 테니. 죽으라고 말하고, 그리고 내가 죽는 걸 지켜보세요.” (제2장 97쪽) 그리고 그녀의 이 말은 남은 것이라고는 절망뿐인 목소리가 되어 로체스터의 귀에 다시금 울린다.
앙뜨와네뜨는 열렬하게 사랑을 갈망할수록 더욱 열렬해졌으며, 그 사랑에 더욱 빠져있었다. 그러나 로체스터는 불현듯 욕망에 불타올라 덤벼들고, 기력을 소모하고 난 다음에는 한마디의 말이나 애무도 없이 몸을 돌려 잠이 들었다. 그러한 현실은 앙뜨와네뜨를 당혹시키고 아연하게 만들었으며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앙뜨와네뜨가 그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으로써 점점 미쳐갈 수밖에 없었노라고 항변하기 위해 진 리이스는 『제인에어』를 읽고 충격에 휩싸인 후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고 집필을 시작했다. 태양 밑에서 다시는 웃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로체스터의 저주에서 벗어난 인형이 다시 태양 밑에 서게 된 것은 진 리이스가 72세 되는 해였고, 이것은 그녀의 다섯 번째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