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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5일(신년 주일)
요한복음 1:1~18
말씀으로, 빛으로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 적 주제 설교형식
김규태 목사
who?
할렐루야! 오늘은 2025년 새해 첫 번째 주일 아침입니다. 올 한 해,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목사님이 어느 날 젊은 부부를 상담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결혼 2년 만에 심각한 불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야기하던 도중에 아내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고 합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하잖아!” 그들은 서로를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더는 살아 봐야 희망이 없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 후에 그들과 정반대인 부부를 만났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어느 미국인 부부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는데, 그 부부는 얼마 전에 결혼 59주년을 기념하는 금혼식을 마쳤다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죽기 전에 그리스 여행을 꼭 가고 싶어요.” 그러자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래요? 그런 줄을 정말 몰랐어요!” 그 부부는 결혼한 지 59년 되었는데도 여전히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계에는 상대방을 새롭게 경험하는 신비가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류호준, 「생명의 복음」(새물결플러스, 2013); 「생명의 삶」(두란노, 2020년 1월호), 67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두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점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시는가요? 조금 전에 소개해 드린 젊은 부부의 경우처럼,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못하면서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아니면 결혼 59년 차 부부처럼, 여러분은 날마다 예수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계시는가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태초’는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창세 이전을 의미합니다. 또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말’ 또는 ‘이성’을 가리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말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자들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구절을 볼 때 이 구절은 “태초에 이성이 존재했다.”라는 식으로 해석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대한 전(前)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천지창조 기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유대인들은 그다음 이어지는 문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받아들이지만,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 그리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일까요?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말씀 즉 로고스’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던 도구였습니다. ‘말씀 즉 로고스’가 결코 인격화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주장하는 말씀은 천지창조의 도구,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은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과도 함께 계셨습니다. 심지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도구화된 말씀이 아니라 인격화된 말씀입니다. 저는 여기에 기독교 신앙과 유대교 신앙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말씀을 결코 수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은 인격화된 말씀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9절에 나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습니다. 과연 누가 이 빛을 증언합니까? 6~7절에 의하면, 세례 요한이 이 빛을 증언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과연 사도 요한과 세례 요한이 증언하고 있는 ‘말씀과 빛’은 무엇입니까?
‘말씀과 빛’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둘은 사람에게 생명을 줍니다. 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준다”라는 것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주된 목적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의 끝부분인 20장 31절에는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은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말씀과 생명이 깊이 연결된 것입니다.
또한, 빛도 사람에게 생명을 줍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빛”은 공통 적으로 “그”(영어로 he)를 받습니다.
1절에서,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2절과 3절에서는 “그”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물체가 아닌 인격으로 받는 것입니다. 9절도 이와 같습니다.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을 10절에서는 “그”(영어로 he)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과 빛”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말씀과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고, 참 빛이십니다. 결국, 말씀과 빛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what’s problem?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그들은 말씀이요, 빛이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반대합니다.
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어둠은 무엇을 말할까요? 사람들이 어둠이라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빛을 따를 수도 있고, 어둠을 따를 수도 있는 책임 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 사람들은 빛이 아니라 어둠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빛을 배척합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 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아울러 11절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서 “자기 땅”, “자기 백성”은 유대 땅, 유대 백성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그 땅의 왕이요, 그들의 왕이신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짧은 구절을 통해 앞으로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얼마나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게 될지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혈통’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육정’은 성욕을 말하고, ‘사람의 뜻’은 남자의 욕심을 나타냅니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의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어떤 원로 목사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자신이 평생 목회하면서 자신의 집을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고, 자기 땅을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지만, 자기 성질 뽑아 바친 교인은 한 사람도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웃으며 가볍게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가 참으로 새겨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바쳐야 할 것은 나의 자아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분명히 예수님이 계신데도 아무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생각과 고집, 내 성질에 예수님이 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주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모르고 무감각하게 사는 것입니다.
-출처: 유기성,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규장, 2008);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0년 1월호), 83쪽에서 재인용.
what?
그래서 우리는 겸손히 인간의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식을 따른다는 말은 말씀으로, 빛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겸손히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12절에서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였던 C. S. 루이스는 자신의 회심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무나 두려워했던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1929년 여름, 나는 드디어 항복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아마 그날 밤의 회심은 온 영국을 통틀어 가장 맥 빠진 회심이자 내키지 않는 회심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찬란하고 선명해 보이는 그 일이 당시 내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하신지 이런 조건의 회심자조차 받아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는 그래도 제 발로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끌려가는 와중에도 발길질하고 몸부림치고 화를 내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도망갈 기회를 찾는 저와 같은 탕자까지도 그분은 받아 주셨습니다. 저 같은 탕자에게도 하늘의 높은 문을 활짝 열어 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누가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처럼, 탕자를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이를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생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했기에 오늘날 우리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출처: 양승언, 「믿으라고? 뭘?」(넥서스CROSS, 2019): 「생명의 삶」(두란노, 2020년 1월호), 33쪽에서 재인용.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다시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없듯이, 우리는 인간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이 세상에 찾아오시고, 참 빛으로 각 사람에게 비추시는 예수님을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으로, 빛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변화는 ‘코이노니아의 회복’입니다.
1절부터 13절까지는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다루고 있습니다. 반면, 14절부터 16절까지는 ‘우리의 반응’을 다루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누구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회복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14~16절).”
예수님은 죄로 인해 깨어졌던 코이노니아의 회복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했을 때 사용된 헬라어 프로스(πρός)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가까이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태초에 계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친밀하게 교제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구절은 또 있습니다. 1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회복된 코이노니아 공동체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은혜로 회복된 코이노니아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코이노니아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경험한 코이노니아 공동체 속으로 세상 사람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매우 귀중한 사명입니다.
how?
끝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잭 프로스트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잭 프로스트의 아버지는 군인 출신의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머리를 반드시 짧게 깎아야 했고, 말 한마디 친근하게 한 적이 없는 전형적인 군인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잭 프로스트는 집을 나가 마약을 파는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고, 마침내 마약 중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아들과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아들이 일하는 가게를 1년 동안 400번이나 찾아올 정도로 끈질겼습니다. 그러나 잭 프로스트는 고집스럽게 아버지를 외면하며 단 한 번도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잭 프로스트는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이후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유명한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기에, 교인들과도 불화했고, 아내와 자식들과도 관계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로 인해 괴로운 시절을 보내다가, 그는 가까스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 친밀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서 관계의 어려움을 해결 받게 됩니다.
잭 프로스트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를 새롭게 해석합니다. 그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들’이 아닌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을 만나기 위해 자신이 일하던 가게 문이 닳도록 찾아온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 아버지가 나를 끝까지 기다리고 계셨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에 모인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은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을 만남으로 우리 삶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출처: 김병삼, 「액션 플랜」(두란노, 2015);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0년 1월호), 169쪽에서 재인용.
저는 이제 말씀을 맺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직 그분의 은혜 안에서, 저와 여러분은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경험하게 될 가장 큰 변화는 깨어졌던 코이노니아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회복된 코이노니아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 이웃과의 친밀한 만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올 한해, 우리가 좀 더 친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모합시다. 말씀으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저는 올 한해 우리교회가 따뜻하고 생동감 넘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로 성숙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경험한 코이노니아 공동체 안으로 세상 사람들을 초청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