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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69
2월12일 [설/연중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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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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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4pbDAPyHd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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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희망에 찬 또 다른 출발점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수천년간 내려온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 풍속도까지 뒤바뀌게 했습니다. 그 얼마나 정겨웠습니까? 평소 각자 삶의 자리에서 발버둥치다가 오랜만에 고향집에 모여 오손도손, 알콜달콩 밤늦도록 시간가는줄 모르고 쌓인 정담을 나누던 시절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선책을 찾는 것이 도리겠지요.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 함께 한 자리에 모이지는 못할지라도 영상통화나 SNS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설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더 간절한 마음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기도해드리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라는 성경 말씀이 오늘따라 어찌 그리 피부로 와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가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영원할 것 같았던 탄탄했던 가족 구조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앞 세대가 한명 한명 떠나고 허물어지자 신기하게도 다음 세대가 바통을 이어받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의 든든한 보루셨던 할머님께서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허무하게도 먼저 떠나가셨습니다. 제게는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든든했던, 마치 슈퍼맨 같았던 아버지께서도 자동차 시동 꺼지듯이 스르르 사라지셨습니다.
듬직하고 자랑스러웠던 형 조차 뭐가 그리도 급했던지 작별 인사조차 못하고 황급히 건너갔습니다. 따지고 보니 저는 어느덧 가계 구조 안에서 최상위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꿈을 꾸는데, 먼저 떠나신 할머님, 아버님, 형, 이모, 고모, 사촌 누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다들 큰 강 건너편에 계셨습니다.
깜짝 놀란 것은 이모, 고모, 사촌 누나들이 너무 고운 것이었습니다. 이팔청춘 때의 얼굴이었습니다. 까르르 웃으면서 저에게 빨리 건너오라는 듯이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저는 “오늘은 내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라는 말씀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수시로 하게 되는 수많은 착각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참 많은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듯 합니다.
예를 들면?
“이 음식은 칼로리가 그렇게 높지 않을거야. 마음껏 먹어도 괜찮을거야!”
“통장에 얼마나 잔고가 남아있을까? 아직 많이 남아있겠지?”
“나는 절대 착각하지 않을거야!”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거야.”
“하느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을거야!”
다양한 착각 중에서도 가장 큰 착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이라고 여기는 착각입니다. 적어도 죽음이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착각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난다긴다 해도 대자연의 순환주기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그 누구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하느님 측의 마지막 초대 앞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마음같아서는 가는 세월을 꼭 붙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웬걸, 잠깐 한눈팔다 보면 순식간에 70이요 80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 백번 생각해봐도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수명이 길다 하더라도 100세를 넘기기 힘듭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할지라도 백일 붉은 꽃이 없습니다. 오늘의 아름다움, 지금 이순간의 상승무드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이 꿈결 같은 행복, 이 순간의 축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도 잘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순환의 법칙은 때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순간, 꽃 같은 젊음도 가고, 인생의 절정기도 가고, 그 좋았던 시절도 가고, 결국 우리 앞에 남게 되는 것은 시들고 메마른 육체, 그리고 임박한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예외적으로 특별대우를 받게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바처럼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달리 죽음에 대한 시각이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 죽음으로 인해 끝입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순간, 그간 일궈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다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시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은 결코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을 일깨워줍니다. 죽음은 나약한 우리 인간과 사랑 지극한 하느님이 온전히 합일되는 감사의 순간입니다. 죽음은 부족한 우리 존재가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충만히 실현되고 완성되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신앙인들과는 달리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힘입어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절망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희망에 찬 또 다른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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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모의 은혜>
사람들은 제 이름을 듣고 개명할 생각을 안 해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제 이름이 창피한 줄 잘 몰랐는데, 대학교 들어가니 저를 모르던 학생들이 제 이름을 듣고 일제히 웃는 것을 보고는 조금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주신 부모님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고 이름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도 안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삼형제 중 막내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님은 제가 딸이기를 무척 바랐습니다. 그런데 또 아들이 나오자 어머니도 고생해서 아이를 낳고도 인정받지 못했고, 아버지도 화가 나셨는지 형 둘은 작명소에서 이름을 지었지만 저는 그냥 세 번째 태어났으니 뒤에 돌림자 ‘용’과 앞에 ‘석 삼’을 넣어 ‘삼용’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기가 죽어있는 상태라 말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셨습니다.
또한 저는 태어날 때 목 뒤에 커다란 혹이 달려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머니는 삼형제 중 저를 낳을 때가 가장 힘드셨다고 합니다. 얼굴도 얼마나 못생겼던지, 어머니는 이런 저를 안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시며 목에 붙은 혹을 제거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원에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가 태어난 이후로 집안에 우환이 가득하였습니다. 아버지도 여러 번 크게 다치셔서 뇌수술까지 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도 점점 더 가난해졌습니다.
우리나라 고전소설에 ‘김원전’이라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성은 ‘김’이고 이름은 ‘원’인데, 태어날 때부터 알처럼 생겨서 이름이 ‘둥글 원’입니다.
어머니가 어느 날 혼절하는 고통으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검은 알처럼 둥글게 생겼습니다. 어머니도 까무러칠 일이었지만, 남편이 이를 보고나서 부인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아기는 어디 있소?” 아마도 “도대체 ‘내가 기대했던’ 아기는 어디 있소?”라고 묻는 것일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지게 되자, 동네 사람들 중 어떤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알에서 이무기가 나와 못된 짓을 하고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군사를 풀어 그 이무기를 죽이고, 그것을 낳은 사람도 흉악한 죄인이라 하여 빛을 못 보는 곳에 가두었다가 굶겨 죽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덕망이 높은 집안에서 저런 알이... 아니 아이가...”
부부가 시름에 잠겨 밥을 먹고 있는데 알이 이불 속에 있다가 굴러서 밥상 옆으로 옵니다. 아버지가 입도 없는 녀석이 밥을 먹으려고 하니 신기해하면서 밥을 한 그릇 주어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알에서 입이 새 부리마냥 나와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신기해하며 아내에게 밥을 계속 주라고 합니다. 검은 알은 밥을 먹으며 몸집이 커져서 결국 다른 방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달빛을 타고 신선이 내려와 알을 깨뜨리니 알에서는 건장한 청년이 나옵니다. 이 건장한 청년은 머리가 아홉 달린 아귀라는 괴물이 공주들을 납치해가는 것을 목격하고 공주를 구하러갑니다. 지하세계에 들어가니 괴물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괴물을 죽이고 공주들을 구하고 그 중 한 명과 혼인하여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머리 아홉 달린 아귀는 자기 자아입니다. 자아가 그렇게 크고 대단해지면 부모님 또한 그런 모습을 하게 됩니다. 사춘기 때는 자아가 너무 커져 부모님이 내가 넘어서야 하는 큰 괴물같이 보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박해하는 존재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아를 죽이는 날 참으로 어른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평온해지고 부모님에 대한 시선도 다시 변하게 됩니다.
만약 김원의 부모님이 이웃의 말을 듣고 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면 아이가 성장하여 자기 자신을 벗고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부모는 아이가 밥을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부모가 아닌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그것이 우리 부모가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가장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아프게 한 것만 생각하며,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춘기부터 자신 안에 살고 있는 자아라는 괴물을 죽이지 못해서입니다. 저도 못난이로 태어났지만, 제 목에 난 혹에 어머니가 자주 당신 침을 발라 계속 문지르셨다고 합니다. 그 혹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어머니의 사랑은 저를 온전히 자라게 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도 저희를 사랑하셔서 고생스럽게 돈을 버셔야 했지만, 저를 보며 화를 내신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사랑해주셨습니다. 이런 부모님의 사랑이 저를 성장시키셨던 것입니다. 물론 저를 감싸고 있는 못난이 콤플렉스는 제 스스로의 싸움이었고, 제 신앙으로 인해 달을 타고 내려오신 그 분께서 깨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 안에서 나와 나 자신과 싸워나가고 그래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기까지 성장시켜주신 분은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괴물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음식을 차리고 차례도 지냅니다. 부모가 없으면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상님들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알 속에만 갇혀있지 않게 우리를 알 밖으로 나오게 해 주신 또 다른 부모님이 계십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셨기 때문에 부모님께 더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 부모님이신 하느님과, 또한 그 분께서 우리 부모님으로 세워주신 그 분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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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5-40: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 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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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새해의 첫날을 시작해 봅니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계획을 세웁니다. 금연, 금주, 다이어트 등.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희망을 품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작심삼일로 그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결심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함께 응원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복을 바라고, 또 복을 비는 행위는 우리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그들의 전통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우선 이스라엘에서 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복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복이 다른 사람에게 내릴 수 있도록 빌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설렘과 희망을 품고 축복 가득한 새해 벽두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복을 빌어 주고, 어떤 복을 바라고 있나요? 저마다 바라는 복의 모습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면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복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청해 보면 어떨까요? 새해 첫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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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깨어 있어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5-40)
1) “깨어 있어라.”라는 말씀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라.”, “한눈팔지 마라.”, “딴 생각에 빠져 있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깨어 있는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그들 곁에서 시중을 들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입니다. 종말과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니 그날의 심판을 잘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 준비는 곧 회개입니다.) 종말의 심판을 잘 준비하는 일은 종말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종말이 닥치면, 곧바로 심판이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준비할 시간이(회개할 시간이) 아예 없습니다.
2) 예수님 말씀은, 종말과 재림이 아닌 상황에서도, 즉 평소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늘 깨어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총)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한눈팔지 않고, 딴 생각에 빠져 있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총)을 받을 준비를 잘하고 있는 사람이 잘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청할 때에는 간절하게 청하면서도,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려고 할 때에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주시는 것을 못 받게 됩니다. 그 경우에 자기가 받지 않아서 못 받았으면서도 하느님께서 기도를 안 들어 주신다고 불평합니다. <미사참례를 예로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미사 시간 내내 졸다가, 또는 딴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성찬의 전례 시간은 이미 다 지나가버렸고, 영성체를 할 기회를 놓쳤다면, 그 상황에서 영성체를 하게 해 달라고 조를 수 있는가? 자기가 잘못해서 영성체를 못 한 것에 대해서 누구 탓을 할 수 있는가? 하느님의 복(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또는 받을 준비를 안 한 사람에게도 자동적으로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복(은총)을 받고 싶으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묵시록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묵시 3,19-21) ”예수님께서 ‘언제’ 문을 두드리실지, 그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냥 가버리실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문을 열어드리는 일은 우리가 합니다. 만일에 딴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듣고, 그래서 제때에 문을 열어드리지 못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시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모두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데, 무한정 기다리신다는 뜻은 아니고, 언제인지는 몰라도 ‘하느님께서 정하신 어떤 시점까지만’입니다. 어떻든 은총은, 늘 깨어 있으면서, 그것을 받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4)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말도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받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으십시오.”라는 격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우리는 ‘내가’ 받기를 바라는 ‘복’이 정말로 ‘복’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선을 주시는데 뱀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아닌지, 달걀을 주시는데 전갈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아닌지, 좋은 것을 주시는데 그것은 안 받으려고 하고 나쁜 것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아닌지, 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루카 11,11-13) 잠언에 나오는 다음 기도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이 기도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권고에 연결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8-10) 전에 한때 우리나라에서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새해 인사로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IMF 체제에서 모진 고통을 겪은 뒤라서 그런 인사말이 유행한 것인데, 그 사정은 이해가 가지만, 만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 되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악’이고, 그 ‘악’을 인사말로 삼는 것은 축복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은 선에서 비롯되어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고,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을 빌어주는 일도 선을 빌어주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복을 받은 줄 알았는데 악한 결과로 끝난다면, 그것은 복을 받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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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설날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배, 세뱃돈, 선물, 복 받으세요. 덕담, 떡국, 고향방문, 씨름대회”가 떠오릅니다. 신앙인들은 연도를 바치고, 설날 미사에 참례합니다. 설날을 기억하는 것은 조상들에게 감사드리고,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모여서 안부를 전하고, 정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세배를 받으시고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을 기원해 주셨고, 수도자와 성직자의 길을 가는 동생수녀와 제게는 늘 겸손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손자들에게는 직장생활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년에 어머니께서 아버님이 계신 하느님 나라로 가셨으니 이제 덕담을 들을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아버님과 함께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가슴이 찡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1월 17일에 나온 ‘미카엘의 순례일기’입니다. 13세기 중반의 프라하에는 베드로라는 신부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사제의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는데, 고민의 한가운데에는 미사 중 변화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에 대한 의심이 있었습니다. 작고 동그란 밀떡과 검붉은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축성을 통해 평범한 음식이 살아있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로마로 순례를 결심합니다. 베드로 성인의 유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시기를 간구했는데도 여전히 성체의 거룩한 신비에 대한 의심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순례에 큰 기대를 걸었던 베드로 신부님은 크게 상심한 채 발길을 돌렸습니다.
로마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볼세나에는 성녀 크리스티나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열 명 남짓 둘러앉아 전례를 행할 수 있는 작은 경당이 있는데, 베드로 신부님도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깊은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 누룩 없이 만들어진 흰색 제병을 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양성체를 하는 순간, 갑자기 성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붉은 피는 베드로 신부님의 손을 적시고 흘러내려 그 밑의 성체포까지 빨갛게 물들였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이 사건이 분명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한 기적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1290년 사람들은 이 놀라운 기적의 성체포를 보관하고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으며, 300년 후 그 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은경축을 맞이하면서 한국에서 신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온 사제가 있었습니다. 볼세나의 성체포 기적 성당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신자들과 함께 순례를 가는 길이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습니다. 성체포 성당에서 미사가 시작되었고 말씀이 선포된 후, 강론대에 오른 신부님은 고개를 떨구고 한참이나 서 있기만 하였습니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신부님은 말을 하였습니다. 매우 짧은 강론이었습니다. ‘저 역시 베드로 신부님과 같은 의심을 떨치지 못한 채 은경축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얼마나 의심하면서 살았는지 여러분은 모르십니다.’ 신부님의 눈물과 신자들의 흐느낌이, 수면 위에 떨어진 물방울의 파동처럼 작은 경당 안에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부족한 사제가 열심한 신자들 앞에 서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지순례를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5처를 묵상하면서, 6처를 묵상하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신자들은 기꺼이 시몬이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지극한 정성으로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저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가식과 위선으로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신자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고, 은총이 가득한 ‘십자가의 길’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설날을 맞으면서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면 좋겠습니다. 그 이유를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연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설날입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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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복이 되어주어요>
민수기 6,22-27 (사제의 축복)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야고보 4,13-15 (자만하지 마라)
사랑하는 여러분,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루카 12,35-40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복이 되어주어요>
새해 첫날
복을 빌어주지만 말고
복이 되어주어요
복이신 하느님께서
복이 되어주라고
세상에 보내셨으니
새해 새날마다
우리
넉넉하게
복이 되어주어요
어두운 벗에게
해맑은 얼굴 건네주고
외로운 벗에게
따뜻한 품 열어주고
배고픈 벗에게
맛난 밥 지어주고
지친 벗에게
부드러운 손 내밀어주고
비틀거리는 벗에게
든든한 발 되어주고
복이 되어준
우리 덕분에
복을 받은 벗들이
복으로 안길 테니
우리
기쁘게
복 듬뿍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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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다만, 그 과정을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
+찬미예수님
작년 구정, 즉 2020년 1월 25일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가족들이 모여 앉은 가운데, 저는 동생과 함께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다는 어느 바이러스에 관한 해외 토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적당한 긴장감이 흘렀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것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밖에도 함께 나눌 다른 소재들이 산적해 있었으니 체감이 되지 않는 막연한 이웃나라의 바이러스에 대화의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2월 26일, 재의 수요일을 앞두고 한국의 모든 성당은 문을 굳게 닫아야만 했습니다. 1월 25일부터 2월 26일까지. 정확히 한 달 사이에, 막연했던 다른 나라의 이야기는 어느덧 우리나라의 이야기가, 이웃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후의 상황은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감염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혹시나 내가 주인공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상상, 하루 종일 전해지던 다급하고 침울한 아나운서의 목소리. 이 모든 과정을 모든 분들이 생생히 기억하리라 믿습니다.
1년 전 구정, 그 누가 상상하긴 했겠습니까? 이러한 세상이 오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얼굴을 가리고 가족들이 모여 식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간이 현재의 모습이 될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자연의 순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연의 질서를 거슬러 온 인간,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이익과 개발만을 추구해 온 인간의 행위가 켜켜이 쌓이고 쌓여 이러한 세상을 만들어 낸 셈입니다. 다만, 그 과정을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
우리 고유의 최대 명절인 설날, 오늘의 복음 말씀은 이 지난한 과정을 보내온 우리 모두에 대한 묵직한 경고인 듯합니다.
먼저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분에 대해 이야기 하십니다. 우리의 신분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종입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주인을 반갑게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종은 참으로 축복받을 종입니다. 그러나 종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마치 주인이나 되는 양 행동한다면 주인으로부터 호된 꾸중과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 주인이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주인의 존재를 망각하고 자칫 제 마음대로 행동하기 쉽상입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당장 도와주지 않는 주인을 원망하게 되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그에 취해 교만에 빠져 나 자신만을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미소한 인간의 한계를 망각한 채, 세상의 주인을 하느님이라 여기지 않고 나 자신이라 여기며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고 마음껏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모두 주인에게 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1년, 몸서리 쳐온 두려움의 실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이러스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부활로써 극복하신 분은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 뿐이니 우리는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미천하고 죄 많은 인간으로써 여러 가지 사건들에 좌지우지되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우리들이 항상 깨어있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피곤해지면 쉽게 주저앉아 쉬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를 거두어주고 계시는 주인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의롭고 성실하신 분,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또한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로해주시는 분, 특별히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불행에 더 마음 아파하시고 위로의 손길을 건네시는 분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지난 1년을 상기해 봅시다. 그 와중에 천만 다행인 것은, 우리의 마음에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새겨주신 “사랑과 희생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철주야 확진자를 선별하고 치료한 의료진들, 하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서로 독려했던 많은 이들의 마음에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배려하며 국가의 지침을 따를 때 모두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존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어려운 이들을 치료하고 돕겠다는 희생정신이 있었으며 백신을 개발하고자 하는 전문가들의 지혜 또한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새로운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신하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더 나은 미래를 살게 할 것이며 그것은 곧 언제 돌아올지 모를 주인에 대한 올바른 준비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설날을 맞이하여 새로운 희망에 가득 차 있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말씀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이렇게 또다시 새로운 날이 밝았습니다. 이 하루는 새로운 시작이기에 다소 낯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더욱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한 해의 하루하루가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 가득한 나날이 되기를 빕니다. 또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려, 올 한 해는 소망하시는 모든 일들이 성취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나아가 1년 후 구정에는 더욱 더 안정된 세상을 바라보며 주님의 축복을 찬송하는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분명, 그렇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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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故배문환 도미니코 신부님]
먼저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내리어 새해엔 더욱 평화롭고 명랑한 가정을 이룩하시길 빕니다. 고서에서 설은 ‘신일’(愼日) 혹은 ‘담도’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월의 처음인 上子, 上辰, 上亥날에 모든 일은 忌愼(기신)하여 거동을 함부로 하지 않는 습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일년동안에 아무 탈 없이 무사태평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이날은 특히 근신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 이날은 조상 영전에 차례를 지내고 어른에게 세배를 드리며 세화를 문짝에 붙이고 삼재(三災)를 쫒아내기도 하였습니다. 또 자손들은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합니다.
그렇다면 조상들의 이 설날은 종교적인 요소를 굉장이 많이 가졌다고 보겠습니다. 좀 양식은 다르달까...... 발전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미사성제를 올리는 것은 조상 전래의 전통과 풍습의 근본정신에 부합된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일년을 하늘의 축복 속에 지내기 위하여 이렇게 근신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와 기도 속에 보내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돌아가신 부모 형제를 위해서 제물 중의 최고 제물인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께 봉헌하는 미사성제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세째로, 세상을 떠난 영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술이나 밥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기도를 바침으로써 연령을 위로하고 가장 기뻐하게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방의 예의도덕을 지키며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는 물론 살아 계신 보모에게도 효도할 것을 결심함이 이날을 의의 깊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 음식을 아무리 산더미처럼 쌓아놓는다 하더라도 살아 생전의 한 술만 못하다 했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 보모에게 얼마나 효도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늙을 때 얼마나 효성 있는 아들딸을 갖는가 하는 것이 달려있다는 것도 잊지 맙시다.
옛날 얘기에 늙은 아버지를 고려장을 하려고 산에 묻으러 갔었는데, 조그만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지게는 왜 안 가지고 와요” 하고 묻더랍니다. “지게는 뭣하게” 하니 “아버지 늙으면 또 써야지요”하더라는 얘기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풍성히 내릴 것을 빌면서, 구정에 살아 계신 어른이나 돌아가신 어른들에게 효성스런 자녀가 되어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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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정호 요아킴 신부님]
<참된 그리스도인>
어느 신부님이 밤길을 가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낭떠러지로 굴렀습니다. 다행히 떨어지는 중간에 나뭇가지를 붙들어 허공에 매달렸습니다. 어두움이 눈을 가려 바닥이 보이지도 않고 얼마나 높이 매달렸는지 알 길이 없던 신부님은
소리쳐 도움을 구했습니다.
“살려주세요.”
그러자 위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손을 놓아라.”
그 어처구니 없는 대답에 신부님은 놀라서 “뭐라고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이다”라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그 목소리는 “살고 싶다면 그 손을 놓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손을 놓으면 떨어져 죽을 것 같았던 신부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소리쳤습니다.
“하느님 말고 누구 다른 사람은 없어요?”
복음을 믿고 그 길을 따라 살고 싶다지만 그 길은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안전하게 보이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와 안정은 다른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대로 사는 데에 있습니다. 설날 함께 모인 가족들 안에서 지난날의 미움을 털어버리고 용서와 화해를 이룸으로써 참다운 사랑과 구원의 기쁨을 나누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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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승홍 이시도로 신부님]
<설>
설날입니다. 나의 한 해를 새롭게 세우는 날입니다. 나는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니기에, 나를 있게 한 부모 조상들을 생각하고 기리며, 또한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나는 감사해야 할 많은 도움과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의 도움과 배려가 없었다면, 누구도 지금 여기 이렇게 서 있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이에 어울리는 축복과 삶의 길을 제시합니다.
제1독서 민수기는 광야의 기록입니다. 하느님과 약속을 맺은백성이 이제 긴 여정의 출발에 서 있습니다. 비록 광야의 험난함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님으로 함께 계십니다.
그 분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길을 걷는다면, 참 행복,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기쁨과 평화가 넘칠 것입니다. 그 보증으로, 하느님께서는 아론의 후예인 사제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어라…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명령합니다.
이 세상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새 백성이 출발합니다. 세속의 부귀영화나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백성 모두, 특히 가장 약한 이도 예외 없이 행복한, 참 평화를 향한 우리들의 공동체입니다.
결과는? 천 년이 넘는 여정, 수 많은 다짐과 새 출발,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영리함 앞에 하느님마저 문자와 제례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백성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신 예수께서 ‘깨어 기다리라’고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새 출발한 백성, 바로 그리스도인의 여정의 근본자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깨어있음은 느슨하지 않음이고, 나에 머물지 않아 너에게 열려있을 때에만 가능한 팽팽함입니다. 굳센 마음과 신뢰가 없다면, 말씀처럼 그렇게 깨어 충실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고 살펴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과 겸허함, 곧 낮춤과 비움이 새로운 백성 그리스도 신앙인의 근본자세 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를 깨우쳐줍니다. 이슬람의 ‘인살라’ 가 떠오릅니다.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지혜로웠습니다. 말씀 없이도 밑바닥에서부터 ‘두레 공동체’를 이루었고, 설날, 다시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며 자신과 이웃을 새롭게 세웠습니다.
나를 서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우리 조상들을 기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친척 친지들의 영원한 안식도 기원하며, 오늘 이 명절 설날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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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 산악부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부가 되어서도 계속 등산을 좋아할까요? 사실 신부가 된 뒤에는 산에 간 기억이 몇 번 없습니다. 아마 10번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했던 등산에 대한 재미를 잃었을까요? 곰곰이 생각하니 ‘속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학생 때는 체력이 좋아서 거의 산을 뛰어다녔습니다. 심지어 산 정상까지 누가 빨리 다녀오는지를 산악반 동기와 내기했던 기억도 많습니다. 등산을 이렇게 속도전으로 하니 산의 또 다른 맛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얼마나 빨리 정상에 다녀오느냐만 관심사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 꾸준히 운동하지 않았고 또 등산도 자주 하지 않다 보니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이 상태에서 산을 뛰어 올라갈 수 있을까요? 제가 가졌던 등산의 목적인 ‘속도’를 채울 수 없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등산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속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그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면서 걷는 산책과 상쾌한 바람을 느끼는 자전거 하이킹은 계속하게 됩니다. 체력 문제보다 주변을 바라보려는 넓은 마음만 있으면 되니까요.
주님께 다가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빠른 응답만 요구하면 금세 주님한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곳 안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느끼려고 노력하면 오랫동안 커다란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오랫동안 함께 하는 것, 오랫동안 주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커다란 준비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간의 만족만을 원하고, 짧은 노력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빠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입니다. 올 한 해도 주님께서는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빠른 응답만을 요구하고, 크고 화려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요구해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복음에 나오듯이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는 사람만이 올 한 해의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언제나 깨어 준비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속도를 요구하는 종이 아닌, 긴 시간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을 갖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올 한 해를 멋지게 만들면 어떨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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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도전>
KFC 할아버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커넬 할랜드 샌더스로 40대에 닭튀김을 만들어 팔며 요식업에 뛰어들었지만, 화재로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65세 노인이 되었을 때, 이제 가진 돈은 105불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낡아빠진 트럭을 끌고 다니며 자신의 조리법을 팔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았습니다. 1008번이나 식당에서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결과, 드디어 1009번째 자신의 조리법을 받아들인 식당을 찾았습니다. 이 노력이 지금의 KFC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상황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이도 많고, 돈도 없고, 사람들의 외면까지…. 정말로 포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또 다시 맞이하는 새해입니다. 많은 좌절과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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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의 자녀답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주 예전 29년전 1992년 1월 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 미사때 한 강론 제목이 지금도 여전히 절박한 물음으로 와닿습니다.
새벽 일어나 집무실에 들어가기전 ‘삼위일체적 삶’이 되게 해주십사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원 세바퀴를 돈 후 맨손체조를 합니다. 신망애信望愛, 진선미眞善美,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적 삶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입니다. 우리 소망이 가득 담긴 아름다운 미사 본기도를 나눕니다.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 하느님, 오늘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오니,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베푸시어, 저희가 조상들을 기억하며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그대로 본기도가 오늘 강론 제목,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느님의 자녀답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이 기도 내용대로, 신망애의 사람, 진선미의 사람이 되어 즉 삼위일체적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한 구체적 지침을 줍니다.
첫째, 하느님께 축복 받은 삶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천복天福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참으로 귀한 하느님의 선물, 품위의 사람입니다. 요즘 태어난 신자 아기들을 대할 때 마다 저절로 나오는 탄성입니다. “아, 하느님의 선물이다!”, “아, 하느님의 작품이다!” 그러니 시종여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늘 깨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서로간 사랑의 일치도 이렇게 하늘 아버지의 자녀요, 서로간에는 형제라는 자각이 있어 가능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제의 강복으로 새삼 우리 하나하나가 축복 받은 존재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한 두 번의 축복이 아니라 끊임없이 선사되는 천복이요, 날마다 특별히 오늘 설날의 미사은총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사제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6,27)는 주님의 분명한 약속 말씀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 보편 사제직에 불림받고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이웃을 소중하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주님의 축복이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화답송 시편 후렴도 주님의 축복을 비는 내용입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둘째, 겸손한 삶입니다.
주님의 강복降福을 청하는 마음 자체가 겸손이요 축복입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회개의 은총과 더불어 선사되는 겸손의 덕입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겸손humilitas이요 사람homo입니다. 흙처럼 수수하고 소박하여 진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을수록 참으로 지혜로운 겸손과 온유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 롤모델입니다. 오늘 제2독서 야고보서는 부자들에 대해 자만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오로지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숨쉬며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을 믿기에 인생무상人生無常의 허무감에서 벗어나 겸손히 하느님께 하느님께 희망의 닻을 내리고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우리 인간의 근원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 절망과 무의미에 대한 답도 하느님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겸손입니다. 겸손이야 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셋째, 깨어있는 삶입니다.
주님앞에 겸손이듯 주님 앞에 깨어있음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막연한 깨어있음이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그리워할 때, 기다릴 때 깨어있음입니다. 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대상인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자 축복인지요!
외로워서 사람이라 합니다. 외로움에 대한 근원적이 처방도 깨어있음뿐입니다. 외로움을 주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바꿔 깨어 기다릴 때 외로움은 행복감으로 변합니다. 기다림의 깨어있음, 기다림의 행복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외로움은 없습니다. 저 역시 혼자 있어도 외롭다 느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님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주인’을 ‘주님’으로 바꿨습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은 모습은 그대로 준비된 깨어있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깨어 있을 때 죄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순결과 열정이 샘솟는 참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깨어있음의 영적훈련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의 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있는 삶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님이 올 것이다.”
누구를 기다립니까? 기다릴 대상, 주님이 계시기에 주님을 희망하여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를 기다리겠는지요! 늘 깨어 설레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얼마나 큰 행복이요 축복인지요!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깨어 있음뿐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음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깨어 기다리다 주님을 만나는 기도시간이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끊임없이 축복을 내리시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겸손한 삶, 깨어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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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행복하게 한 해를 살아갈 지혜를 일러줍니다. 복음의 "깨어 있음", 제1독서의 "축복의 소명", 그리고 제2독서의 "하느님 중심성"입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한 해를 시작하는 설에 우리 민족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 가신 조상들을 기립니다. 새로운 시간을 열면서 다가올 미래를 두근두근 기대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또 언젠가 맞게될 죽음을 상기하는 것은 지혜롭고 의미 깊은 전통입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
각자의 마지막 날과 세상의 마지막 날은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오직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만 아시는 그날 그 시간은, 그래서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교만하게 살아가는 이들까지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게 만들지요. 그렇기에 하느님 계획에 대한 무지는 오히려 인간에게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
예수님께서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이들이 행복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깨어 있음"은 물리적으로 잠에서 벗어난 상태라기보다, 영적인 각성 상태입니다. 깨어 있는 이들은 자신의 근원과 목적지를 인식합니다. 하느님의 숨이 아니면 흙의 먼지와 같이 보잘것없고 미소한 존재임을 아는 겸손에,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존엄함이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이들이지요.
깨어 있는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을 기억합니다. 기억은 그 은총과 환희와 감사를 현재화해서 살아가게 하지요. 하느님과 누린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면서, 지금 여기서 그 사랑을 살아가는 것이 곧 깨어 있음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깨어 있는 영혼을 본 주인의 기쁨이 이렇게 표현되다니 놀랍지요! 종과 주인의 세속적 주종 관계를 생각하면 마치 종과 주인 사이의 신분이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요. 강생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낡고 병든 계급 관념을 깨뜨리고 내려오신 신비입니다. 주인이 깨어 기다리던 종에게 해 주는 섬김의 모습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고 싶어 늘 준비하고 계신 사랑입니다. 그분은 언제라도 그렇게 해 주고 싶어 노심초사 기다리십니다. 이 기다림은 그래서 그분과 우리, 쌍방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제인 아론 집안에 내리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복을 지향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주님께서 사제들에게 축복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들이 백성을 향해, 주님께 복을 받고 그분 얼굴을 마주하며 은혜와 평화를 누리라고 빌어 줄 때,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서로를 축복해 주는 이 아름다운 소명은 직무사제직에 불리운 이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편 사제직으로 불리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 누구나 축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축복은 타인을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축복을 빌어 주는 이들에게도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축복하는 마음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니까요.
제2독서에서는 우리 삶이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들려 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5)
치열한 물질주의적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족의 미래와 직업, 재산과 관련해 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동동거리지요. 하지만 재산이나 건강, 커리어 등 기껏 쌓은 공든 탑이 계획과는 상관없이 일순간 무너져 버린 허무한 경험을 자신에게든 타인에게서든 목도한 적이 없지 않을 겁니다. 그 중심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제 능력이나 우연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모든 것 뒤로 당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의 겸손을 몰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얕은 꾀와 조급한 계획, 엉성한 실행력에도 불구하고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외면한 채, 제 능력인양 오만하고 교만하게 하느님과 세상을 낮추어 보기 일쑤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면"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이제부터 우리의 계획이나 지향 앞에 늘 이 말씀을 새겨넣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살라는 뜻이 아니지요. 모든 일이 그분께 달렸다는 듯이 겸손하게 의탁하고, 모든 일이 나에게 달렸다는 듯이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대림시기 첫 날, 1월 1일, 그리고 오늘까지 우리에게 벌써 새로움의 은총이 세 차례나 주어졌습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사랑을 향해 깨어 준비하며,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있어 올해의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이고, 주님도 뿌듯하고 기쁘실 겁니다.
아론의 측복으로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새해 주님 복 많이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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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이는 진정 복된 이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르크, 브라크하)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설”인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사실, 축복을 빌어주면 빌어주는 이에게 축복이 먼저 옵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비는 행위는 이미 ‘축복을 비는 축복’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상대를 축복해주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위하는 마음’(호의, 선의)을 북돋으십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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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맞이하여 축복을 빕니다.
용솟음치는 ‘축복’이 먼 하늘로부터
무수한 시간을 달려와
“설”이라는 고귀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베푸신 ‘축복’이
날마다 온몸에 사랑의 지문을 새겨 주고
가슴 속을 따뜻하게 지펴 줄 것입니다.
꺼지지도, 식지도 않는 변함없는 보살핌으로 감싸며
멈추지도, 지치지도 않는 줄기찬 사랑을 퍼부어 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한 삶의 반려자가 되어 주고
하는 일마다 전폭적인 사랑과 신뢰로 지지하고 성원해 줄 것입니다.
혹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들 때가 있더라도
늘 다정한 벗이 되어 주고 사랑을 강화시켜 주며
올 한해를 사는 힘과 용기의 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저희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인 “축복”을 건네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이 축복을 받은 이들이 한 해 내내 참된 행복 안에 머무르고
또한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저희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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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12,37)
오늘은 민족의 큰 고유명절인 '설 명절'입니다. 설 명절을 맞이하여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본질인 사랑이 더 충만하고, 그래서 영과 육이 더 건강해지는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작년 3월에 어머니를 하느님께 보내드리고, 부모님이 안 계신 가운데, 첫 설 명절을 맞이하게 되어서 특별한 마음이지만, 미사와 기도 안에서의 만남으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설 명절은 우리의 본질인 '사랑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조상님들을 통해 베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이 사랑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날'입니다.
이번 설 명절은 코로나로 인해 친교의 제한을 받고 있어 함께 모여 지낼 수 없는 특별한 설 명절이지만, 마음으로 더 뜨겁게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드리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그런 설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4,14)
이것이 지금 살아있는 우리네 인생이요,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니, 욕심과 탐욕을 좀 내려놓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나누고, 그래서 함께 행복한 사람들, 그렇게 깨어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설 명절인 오늘은 '아론의 축복'으로 강복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전능하신 천주(+)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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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 40)
우리가
놓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마음이다.
따뜻한 마음이
삶의 버팀목이
되고 관계의
아랫목이 된다.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이
되어간다.
설명절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따뜻한 마음의
축제이다.
살지 못한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삶의 기쁨이다.
삶을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따뜻한 사랑이
그립다.
모든 것은
처음과 똑같이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또한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준비하는
삶이란
복음 안에서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은총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땅에서
설명절을
맞이한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우리들이
세상을 더
건강하게
만드시는
하느님께
협력하는
자녀들이길
기도드린다.
삶 속에
설명절이
있다.
삶의 리듬에는
슬픔도 기쁨도
있다.
하느님의
손으로 만드신
이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길
기도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진실되게
복을 빌어주며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설명절의
생명력은
우리가
놓치고 사는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건강하고
건전한 삶을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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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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