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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시력 2.0
[열왕기하 6:15-23]
혹시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해본 적 있습니까?
저희 가족과 함께 오이도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두더지 게임을 했습니다.
첫판은 쉬웠어요.
그런데 다음 판부터는 속도가
엄청 빨라지는 겁니다.
아무리 순발력을 발휘해도 두더지는
기가 막히게 잘 빠져나갔죠.
별것도 아닌 두더지가 사람을
열받게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두더지처럼
아람 군대의 화를 돋구는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아람 군대가 야심 차게 준비해서
이스라엘에 쳐들어가면
방어 시스템이 너무 잘 되어 있었습니다.
군대가 한 번 움직이려면 물자와 시간 등
에너지 소모가 엄청 큽니다.
말도 먹여야 하고, 군인들도
움직어야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을 칠 때마다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니까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겁니다.
특히 아람 군대의 왕은
신하들을 불러서 물어보았어요.
“혹시 우리 중에 적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는 거 아니냐?
스파이가 있지 않고선 저들이 이렇게
잘 방어할 수 없단 말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람 왕이 쏘아붙이자,
한 신하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우리 주 왕이여,
저희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너무 신통하다 하옵니다.
그가 우리의 전략을 다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전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얼마 후 엘리사 있는
도단성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도단성은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부터 16km 떨어진 곳이었어요.
아침 일찍 엘리사의 사환이 일어나서
밖에 나가보니 깜짝 놀랄 일이 펼쳐졌습니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수많은 군대가
도단 성읍을 에워싸고 있는 게 아닙니까!
사환은 깜짝 놀라서
엘리사에게 뛰어가서 말했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엘리사는 사환이 어떤 일 때문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사환의 눈에는 엘리사가 미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현실은 거대한 벽과 같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막막해지는 현실 속에
사환은 현실 도피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당신이 이 사환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신약에도 등장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에 오르셔서
함께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말이 호수지 거의 바다와 다름 없다.
육지에서 한참을 떠나갔을 무렵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거센 바람과 집채만 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키듯이 불어 들었습니다.
점차 배에 물이 차기 시작했고
제자들은 겁에 질렸습니다.
서로 배에 있는 물을 퍼내며 소리쳤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무얼 하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깊이.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지금 이 상황은
잠잘 때가 아니었어요.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
이렇게 편하게 잘 수 있는가?’
아마 가장 성질 급했던 제자가
예수님을 흔들며 깨웠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겠습니다!”
예수님은 하품 한 번 하시더니만
기지개를 켜시고 파도를 향해 외치셨다.
“잠잠하라!”
그러자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해졌습니다.
사실 ‘잠잠하라’는 선포가 있기 전에
예수님께서 한마디 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다른 성경을 보면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꾸짖으셨어요.
폭풍우를 만난 것과
믿음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탄 배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와 바람을 보느라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거죠.
당장 눈앞에 문제만 보고 있으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말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가?”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우리 삶에 모시면서
그분의 능력을 잊고 있는 건 아닙니까?
내 힘으로 먼저 해결하려고 하다가
두려움에 더 둘러싸인 적은 없습니까?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바라기는 인생의 풍파 앞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다시 엘리사의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엘리사는 그의 사환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두려워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한 자들이 저들보다 더 많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건 엘리사가 본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열왕기하 6: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의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성읍을 가득 쌌던 아람왕의 군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하늘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날만'
엘리사와 함께 계셨던 걸까요?
그건 아니죠.
늘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불마와 불병거로
언제나 자신을 지키고 계심을 말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이걸 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거랍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은혜의 선물을 받기 위한
자세가 중요해요.
믿음은 겸손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기도하는 자가 바로 겸손한 자입니다.
엘리사는 사환의 눈이 열리길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이건 신령한 무당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한 자가 많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신다'는
약속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왜 두려워하는 걸까요?
왜 낙심하는 겁니까?
아람 군대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 말과 불 병거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눈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기도해야 합니다.
눈을 열어 달라고 간구해야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아람 군대가 우리를 둘러쌌을지라도,
그보다 훨씬 더 강한 불 말과 불 마차가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볼 것입니다.
성경 속 인물 중 야곱만큼
외로운 인생을 살았던 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는 형을 속인 대가로 삼촌 라반 집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길은 멀고 먼 광야 길이었습니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죠.
캄캄한 밤이 되어
돌로 베개 삼아 잠들려는데
곳곳에서 들리는 들짐승이 우는 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했습니다.
덮을 것도 하나 없고,
자신을 보호해줄 칸막이도 없는
허허벌판에 그는 홀로 누웠습니다.
하늘을 가득채운 별들을 보며
아마 이런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 내 인생 정말 꼬였다.
어쩌다 나는 이렇게 혼자 되었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는 두려웠습니다.
그날 밤,
그는 꿈속에서 신비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자고 있는 그에게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위를 오르내리는
천사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닥다리 가장 높은 곳에
서 계신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잠에서 깬 야곱은 다음과 같이 고백해요.
창세기 28장 16절입니다.
창세기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혼자인 줄 알았던 그 자리에
하나님은 함께하셨던 거였습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며칠 전 두 아들이 서로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나쁜 역할이었고,
둘째가 좋은 역할이었던 것 같아요.
둘째가 외쳤어요.
"하나님의 능력!"
당연히 쓰러질 줄 알았던 형이
'윽'하더니 조금 후에 일어나는 거예요.
둘째가 당황했나 봅니다.
형이 쓰러져야 하는데 계속 공격을 하니까요.
그러다 결국 울먹 거리며 외쳤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센 사람은 없어!"
그 소리가 제 귓가에 메아리쳤습니다.
'맞아, 하나님보다 더 센 사람은 없지.
난 왜 그걸 몰라서 두려웠던 걸까?'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대적들의 공격은 여전합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예요.
이스라엘도 끊임없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았어요.
미디안이 쳐들어왔어요.
심지어 나중엔 바벨론의 포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너머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누가 더 크고 강한지
보여주시려고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주소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구합니다.
"주님,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해주세요."
아람 군대가 눈이 어두어져서
엘리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람 군대를 이끌고
자신들의 진영 한 가운데로 데려 왔습니다.
사마리아였죠.
이스라엘 왕 입장에서는
원수들의 병력을 한 방에 없앨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말그대로 손 안대고 코를 풀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쉽게 말해 “죽일깝쑈?”입니다.
그러자 엘리사의 대답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22절을 읽습니다.
열왕기하 6:22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이 얼마나 어의 없는 대답입니까?
다 잡은 물고기를 건져 내기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풀어주자는 소리 아닙니까?
그런데 왕은 그의 말에 순종합니다.
23절을 봅시다.
열왕기하 6:23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이런 반전도 없습니다.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하자,
그들이 돌아가서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고
왕이 그 자리에서 아람 군대를 몰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람 왕이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 큰 분노와 살기를 안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은혜를 주셨다면,
그 은혜를 악을 갚은데 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세상은 지지 않기 위해
악은 악으로 갚겠다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싸웁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어요.
이와 관련하여
이솝 우화 중에
<바람과 햇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람과 햇님이
서로 누가 더 힘이 센지 겨뤄보고자 했어요.
그래서 지나가는 행인의 외투를
먼저 벗기는 쪽이 승리하는 거였죠.
바람이 먼저 세찬 바람을 불어
옷을 벗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행인은 바람에 옷이 날아갈까 봐
더 꽉 잡고 버텼어요.
힘이 빠진 바람을 뒤로하고 햇님이 나섰어요.
따뜻한 햇살을 그에게
계속 내리쬐어주었습니다.
그러자 행인은 꽁꽁 싸매고 있던 외투를
자연스레 벗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너무 ‘내 방법’만 추구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방법이 가장 최고의 방법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실 때도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셨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독기를 품고 같이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필라델피아에 히윗이라는 여인이 살았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신앙인이었어요.
특히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887년 겨울 어느 날 그녀가 가르치던 학생 중에
불량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불러 사랑으로 타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느닷없이
지붕 스레이트로 여사의 등을 때렸습니다.
아무런 대처가 없던 그녀는
그대로 척추를 다쳤고,
병상에 누워 꼼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상반신에 석고붕대를 했기에
대소변도 받아내야만 했죠.
이 사고로 1888년 봄까지 6개월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원수를 은혜로 갚아야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학생에 대한 증오가
싹트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아무런 빛이 보이질 않았죠.
그러던 어느 날
청소부 아주머니가 지나가는데
콧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뭐가 좋아서 저렇게
콧 노래 부르면서 살아갈까?’
그녀가 청소부에게 물었답니다.
“뭐가 그리 좋아 찬양합니까?”
그 청소부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제게 닥친 어려움을 찬송으로 바꾸도록
힘을 주시는 주님이 계시니 즐거울 수 밖에요!”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불평과 증오로 가득 찬 나날을 보낸
자신의 모습을 회개한 거죠.
‘나는 왜 낙심하고 포기하고 있지?
나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잖아?’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서
찬양시가 흘러나왔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여러분, 엘리사의 종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은 그의 눈을 열어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문제만 바라보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이 열리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청소부는 하나님을 보는 영적 시력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히윗도 하나님을 보는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이 포기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까?
가장들은 가족들을 책임지느라
세상에서 욕먹고,
몹쓸 짓 당하며 살아갑니다.
혼자만 사는 삶이라면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도 있지만
핸드폰 배경화면에 있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참아내죠.
엄마들은 어떤가요?
믿음 없는 남편을 보며 실망하고,
반항하는 아이들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늘 마음 한구석엔
‘내가 부족해서 그래’란 죄책감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스스로 자책하고 남몰래 눈물 짓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아람군대는
오늘도 우리 곁에 진을 치고 있어요.
바로 이 순간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시편 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빽이 아닌
하나님 빽이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세요.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출입을 영원까지 지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놓였나요?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간구하십시오.
“주여, 오늘도 저의 영적 시력을 회복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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