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론시간이었는가, 아니면 국문학개론 시간이었던가, 고대소설의 결점 중 하나가 '해피엔딩'이라고 했다. 해피엔딩은 미숙하고 유치한 구성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의 삶에는 무수한 갈등과 분규가 있기 마련이고, 예상하지 않았던 역류는 물론 불가사의한 전환도 있게 된다는, 너무 단순화하고 공식화해 버리면 예술미가 떨어진다는 말일 것이다.
더구나 해피엔딩에 이르게 하려면 권선징악이란 주제가 자연스럽게 붙어 다니게 되는데 권선징악은 더더구나 우습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할머니가 옛날얘기를 해 주실 때면 으레 "그래서 나중에는 아주 잘 먹고 잘 살았단다."로 끝이 나곤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우리들도 편안한 마음이 되어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레퍼토리가 궁한 할머니에게서 그제도 듣고 어제도 들었던 그 얘기를 밤마다 해달라고 졸랐던 것은 바로 “그래서 나중에는 아주 잘 먹고 잘 살았단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잘 먹고 잘 살았단다"라는 해피엔딩' 그리고 착하고 불쌍한 주인공이 행복해 지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되는 권선징악. 왜 해피엔딩이 유치한가, 왜 권선징악이 우스운가?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않고 희부연 안개 속으로 주인공의 뒷모습이 사라지면서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입을 다물어버리는 영화. 아슴푸레한 혼돈 속에 미해결의 퀴즈를 던지고 더 이상은 쓸데없는 잔소리라는 듯이 막을 내리는 불란서 영화가 세련된 예술품이라고 한다. 거기에 이의를 달면 예술은 물론 영화를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나 또한 지루한 해설과 설교는 싫다. 전류 같은 암시, 잔잔한 여운, 매력적인 분위기를 취하고 싶다. 결말이 빤한 진행에 염증을 느끼고, 탄력 있는 비약을 갈망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다. 갈수록 해피엔딩이 좋아진다. 점점 겁쟁이가 되어 가고 있는가. 그래서 실험의 의지도 도전의 용기도 없어져 버렸는가. TV의 연속 드라마를 보더라도 선량한 주인공이 사악한 자의 농간에 붙들려 오래오래 불행해 허덕이는 장면은 보고 싶지가 않다. 옛날 우리 할머니처럼 그들을 제발 “그래서 나중에는 잘 먹고 잘 살”도록 놓아주었으면 좋겠다.
시종여일 한사코 서부활극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선한 주인공은 언행이 거친 악인과 처음부터 구별된다. 그들은 함께 죽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격전을 벌이지만, 악인이 아무리 천하의 비열한 방법으로 위기를 만들지라도 선인의 승리라는 상쾌한 결말은 반드시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학의 예술성을 운운하여도 표현의 기교가 문제일 뿐, 그 기저에는 반드시 권선징악이 깔려 있어야 한다. 문학은 지금 있는 세상을 그대로 복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반드시 있어야 할 이상적인 세상을 재현해야 하는 예술이 아닌가. 거기에 권선징악이라는 철학이 흔들린다면 독자들은 앞으로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 것인가? 그 어느 날이라는 목표를 잃어버리고 살아갈 이유도 희망도 없어질 것이다.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따뜻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세상에서는 갈수록 권선징악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어렸을 적부터 불운했던 사람이 끝끝내 고생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음이 유순하고 선량한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판단하고 여지없이 짓밟고 착취를 하기도 한다.
거액을 부당하게 착복한 사람들의 기사가 자주 신문에 오르내리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이내 풀려나고 만다.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몇 십억 혹은 몇 백억이라는 돈의 액수를 입에 올릴 때, 일당 몇 만원의 일용직 근로자들의 가슴에 그 소리는 얼마나 큰 못이 되어 박힐까.
만일 악한이 은행을 습격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훔친 돈다발을 깔고 앉아 껄껄껄 웃으며 "The End"를 고하는 영화가 있다면 우리는 함께 따라 웃을 수 있을까?
요 며칠 더위를 잊기 위하여 장편소설을 읽었다. 아름다운 주인공들이 불행에 빠질까봐 걱정하면서 상하권 6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사흘 동안 긴장하면서 독파하였다. 나는 그들이 재회하고 안정을 찾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가 나를 유치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나는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이 좋다.
(이향아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