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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시작 1,1-10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에페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47-54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주의와 거짓과 위선>
앞부분에 이어,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고 말씀과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루카 11,47)
이는 율법 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이 죽은 예언자들은 기념하면서도 살아있는 예언자를 죽이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여전히 지금도 지혜이신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루카 11,52)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고 여는 열쇠로,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묵시 3,7)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요한 5,39)
“너희가 모세를 믿었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5,46)
그러나 그들은 예언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에 관한 지식을 숨겼습니다.
곧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숨기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선조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거역하고 죽였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도둑이나 살인이나 간음보다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주의와 거짓과 위선을 더 많이 질책하십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경고를 받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루카 11,53-54)
우리는 어떨까요?
혹 우리가 질책당할 때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광분하여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불행하여라, ~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루카 11,52)
주님!
말씀을 치워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고,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저의 주님!
제게는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에페소 1,3)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소 1,4)
저는 창조론자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진화가 이루어졌을지라도 그것은 창조 이후의 일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것이라고, 사랑 없이 무정하게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는 겁니다.
이 믿음은 우연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믿음이기도 하고, 다 하느님 사랑의 계획에 따라 생겨난 거라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만물이 그러하니 인간도 예외일 리 없고, 인간은 그리고 나는 더더욱 하느님 사랑의 계획 아래에서, 그것도 천지창조 훨씬 전에 세워진 하느님의 사랑 계획 아래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라는 믿음이 저의 믿음이고 여러분의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과 저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믿는 믿음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느님께는 버림받고 육신의 아비와 어미에게서 태어나 한세상 살다가 떠나는 것으로 삶을 마칠 것이고, 죽은 다음에는 우주의 고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믿지 않음으로써 버림받은 것이 되는 셈이고, 믿음을 버림으로써 버림받은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고아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 계획은 우리가 생겨나기까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태어나고 난 다음에는 당신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온 정성과 희생으로 양육하듯,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비와 어미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양육하고, 더 나아가 우리가 우주의 고아가 되지 않도록 영원히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참사랑입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입니다.
새끼를 내질러놓고 마는 것은 욕망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시작부터 끝까지 곧 영원히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역시 믿음입니다.
이 세상 구원과 영원한 구원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며 생명을 살고 행복을 사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믿음에 달린 겁니다.
계모라고 생각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을 때 그에게서 떠나고, 반대로 친엄마이고 나를 사랑한다고 믿을 때 엄마의 사랑에 머물듯, 우리도 천지창조 이전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느님을 믿을 때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며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천지창조 이전부터 영원까지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를 시작하며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런 하느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믿게 해 준 바오로 사도에게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트집을 잡는 사람>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을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고,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루카 11,47)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수용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
(욥기 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교훈 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비와 사랑을 놓쳤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 파괴로 인한 기상 이변, 생명 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집을 잡기에 앞서 예수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하며 권고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히브 12,6-7)
불행하리라는 경고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행복의 길이 시작됩니다.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내 삶의 뿌리를 살펴봅시다!>
혹시 지금까지 이 세상 살아오시면서 혹시라도 누군가로부터 공개석상에서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인 있는가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야! 빨리 그 가면을 벗어라!” 라든지 “인생을 그따위로 살지 마라!” 라는 식의 충격적인 말.
이 세상 그 누구라도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가슴이 부들부들 떨릴 것입니다.
복수심에 이를 갈 것입니다.
어떻게라도 반격하고 되갚아 주기 위해 골몰할 것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쌍날칼 같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루카 11,52)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눈에 제일 먼저 포착된 볼썽 사나운 광경이 있었으니,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거짓 목자들, 오직 자기 배, 자기 주머니 채우는 데 혈안이 된 지도자들의 타락과 횡포였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함께 가던 유다 문화 안에서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은 고스란히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으로 슬픔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종교의 권위를 등에 업은 지도자들의 횡포 앞에, 착취와 희생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 한 군데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가 있었으니, 자신들뿐만 아니라 아무 잘못 없는 백성들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죄입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 앞에 예수님께서는 큰 껄끄러움과 부담을 무릅쓰고 거짓 지도자들의 회심을 촉구하는 강력한 펀치를 날리고 계신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에게도 강력한 펀치가 날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신속한 회심을 촉구하는 주님 편의 신호라고 보면 거의 정답입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강력한 한방이 날아올 때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 삶의 뿌리를 한번 돌아볼 일입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성찰해볼 일입니다.
결국 그 강력한 한방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어서 빨리 당신께로 돌아서라는 자비의 마음이 바탕에 깔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날에도 예언자들이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1)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장식하면서 그 예언자들을 존경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지금’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있음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도 너희 조상들과 다를 것이 없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지혜’ 라는 말은 ‘지혜로우신 하느님’이라는 뜻이고, 사실상 ‘하느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이 받은 박해와 예언자들의 죽음을 예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받은 박해와 예언자들의 죽음을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고, 알고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살인자들에게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을 인용한 말씀이 아닙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언자들을 죽인 살인자들을 하느님께서 처벌하실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라는 말씀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동시에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고 죽인 일은 그들을 파견하신 하느님께 반역한 큰 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2)
박해받고 죽으라고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려고 예언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인데,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예언자들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자들은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왜 하느님께서는 곧바로 처벌하지 않으실까?” 라고 묻는다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2베드 3,9).
3)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옛날의 일’만은 아니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일입니다.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성지를 조성하고, 현양 사업을 하는 것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일,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양 사업으로만 그치고 오늘날의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위선자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정말로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을 현양하려면, ‘말씀’을 잘 새겨듣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삶이 따르지 않으면 성지 조성 사업이나 현양 사업들은 모두 바벨탑을 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대중 매체의 발달 덕분에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방식과 경로로 하느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회개하라는 말은 듣기 싫어하고, 복을 받는 방법에 대한 강의만 좋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박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직접 박해하지는 않더라도, 그 ‘말씀’ 자체를 박해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받게 될 박해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요한 16,2-3)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인 자들이, 또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자들이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일이 오늘날에도 흔히 있습니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회개시켜서 바로잡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 밖에서 볼 때에는 신앙인들끼리 서로 '내가 옳다'고 다투는 모습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진짜로 옳은 쪽이 어느 쪽인지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첫 번째 기준은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요한 13,34-35).
사랑 없이 미움과 증오심으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은 틀림없이 잘못된 신념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모두가 이쁘다 - “너도 이쁘고 나도 이쁘다”>
가을빛 완연해지기 시작한 10월 중순입니다.
예전 ‘늦가을(晩秋)’에 쓴 시가 생각났고 미소가 떠오르며 순간 행복했습니다.
<모두가 이쁘다>란 시입니다.
“가을엔
이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모두가 이쁘다
작은 풀잎, 나뭇잎들...
사랑으로 타오르는 단풍되니
모두가 이쁘다
너도 이쁘고 나도 이쁘다”
<2000.11.10.>
아마도 하느님 눈에는 다 그러할 것입니다.
색깔, 크기, 향기, 모양 등 제각각의 고유의 이쁜 꽃처럼 사람도 그러할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 눈에 성인은 더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가 됩니다.
성 뽈리카르포와 함께 사도 요한의 제자로 사도교부에 속하며,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자’라는 뜻의 ‘테오포로스’로 불리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보편교회의 의미인 가톨릭교회란 용어를 사용한 교부이기도 합니다.
당시 안티오키아는 로마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고, 이곳에서 주교로 일하다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순교하기까지의 여정을 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성인은 쇠사슬에 매인채 병사들의 감시하에 배를 타고 해로로 또 육로로 곳곳을 걸어 기나긴 여정 끝에 로마에 도착하여 맹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이런 와중에 일곱 개의 주옥같은 서신들이고, 마지막은 성 폴리카르보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참으로 순교가 너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이런 서간을 썼다는 자체가 주교의 놀라운 믿음의 깊이를, 내적 평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서간에 나오는 감동적인 성인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시작이요, 사랑은 완성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서간>
“이제 출산의 고통이 저에게 다가와 있습니다.
...제가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고, 또 제가 죽음의 상태에 있기를 원하지도 마십시오.”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듯이,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
문득 캘커타의 성녀 데레사와 성 아오스팅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계시다.”(Where there is love, there is God)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Love and do what you like)
오늘부터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 서간이 계속됩니다.
오늘 에페소서 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은총에 대한 찬가가 감동적입니다.
그리스 말 본문에서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 문장입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단숨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내리 노래합니다.
우리는 매주간 월요일 저녁 성무일도 때 이 찬미가를 노래합니다.
이 찬미에서는 하느님께서 거의 모든 동사의 주어로 등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찬미와 감사입니다.
1. 우리는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살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2. 우리는 사랑 안에서 그분앞에 설 수 있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3.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로서 양자로 불림 받았습니다.
4. 우리는 영광스러운 은총의 찬양이 되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5. 예수님께 불림 받음으로, 우리는 그분의 피로 구속 받았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불림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미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의 사랑이 바오로 사도는 물론 이냐시오 주교의 순교를 가능하게 했음을 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새삼 순교야말로 주님 사랑의 극치이자 사랑이신 성체와의 결합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님의 무지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 선언은 계속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로 상징되는 악순환의 부정적 현실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고 공경하면서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역설적 현실을 고발합니다.
그러니 과거를 똑바로 기억하게 하는 역사교육,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깨어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되는 악순환의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지금까지 흘린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세가 참으로 결연합니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는 못된 심뽀를 지닌 율법 교사들 역시 불행선언의 대상이 됩니다.
이후에도 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립니다.
회개는 커녕 참으로 완강한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병이, 무지의 악이, 무지의 죄가 얼마나 깊고 큰지 ‘주님의 전사들’인 신자들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무지의 역사입니다.
참으로 남북한은 물론 세상의 모든 광적(狂的) 호전(好戰) 세력들은 자숙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린 한반도의 역사인데, 이제 남북이 좀 간신히 살만하게 되었는데, 무지한 이들로 인해 참으로 어리석게도 일촉즉발의 전쟁상태라 우려합니다.
전쟁이 아니어도 힘든 세상에 해결해야 할 난제들 투성이인데, 정말 더 이상 피흘리는 악순환의 역사는 없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기도합니다.
참으로 세상의 빛이자 소금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역할이 큽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 '그리스도의 지혜'가 되어, ‘그리스도의 평화’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추(晩秋)의 계절, 날마다 저마다 사랑의 이쁜 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주님과 하나되어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계획과 선택>
인생(人生)은 무엇일까요?
고인이 되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강의 중에 ‘하숙생’을 불렀습니다.
하숙생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노래의 가사에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나그네는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그네는 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헤어짐에 슬퍼할 필요도 없고, 의견이 다르다고 화낼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피곤한 몸을 의탁할 쉼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그네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구로 가는 기차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삶은 계란 있어요."
인생은 계란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란은 둥글게 생겼습니다.
‘둥글게 둥글게’라는 동요가 있듯이 인생은 둥글게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욱하는 성질 때문에 큰일을 망치는 경우를 봅니다.
조금만 참고, 조금만 기다리고, 조금만 양보하면 오해는 이해로 바뀌고, 원망은 용서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계란은 깨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유인도, 노예도,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모두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계란은 노른자가 있습니다.
인생의 노른자는 성공, 명예, 권력이 아닙니다.
인생의 노른자는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는 것도,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맡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남도 따르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야단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말씀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비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행동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사람은 본인도 진리를 보지 못하지만, 남들도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위선과 교만>
주말에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서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평일에는 반드시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운동’입니다.
사실 운동을 하기 전에는 시간이 없다고, 너무 피곤하다 등의 이유를 붙이곤 했습니다.
이런 이유를 붙였을 때는 운동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매일 하다 보니 시간이 없다는 것도, 피곤하다는 것도, 또 힘들다는 것도 별 의미 없는 핑계였음을 깨닫습니다.
운동을 통해 건강해지기에 피곤함도 사라지고, 체력이 붙어서인지 운동할 때 힘들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잘 쓰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없어서, 피곤해서, 마음의 여력이 없어서 등의 이유가 똑같습니다.
이런 이유를 보면 신앙 생활하지 못함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당에서만 또 무릎 꿇고 오랜 시간 하느님을 떠올리는 것도 아닙니다.
삶 안에서 주님을 초대하고 그분께 함께하는 마음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가 매 순간 이루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됩니다.
못하는 이유는 늘 돋보이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바쁜 일상 안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춘다면, 못한다고 했던 이유가 얼마나 의미 없는 핑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바쁜 것도, 피곤함도 사라지고 마음의 진정한 여유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신앙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한 불행 선언입니다.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장 큰 죄를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그들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가까이하고 성경과 율법에 대해 잘 아는 그들이었지만, 정작 위선과 교만으로 실천하지 않기에 자신도 하느님 곁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는 우리의 모습이라면, 그것은 우리 안에 담긴 위선과 교만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선과 교만이 가득할수록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한 지금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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