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릉앞에는 삼문(흥무문)이 있으며 경주의 신라왕릉 가운데 문이 있는곳은 무열왕릉, 신문왕릉, 오릉, 미추왕릉 뿐이다.
왕릉으로 가는길은 울창한 소나무숲이 잘 조성된 길을따라 가야한다.
아름다운 송림에 쌓여있는 정비가 잘된 김유신 장군묘가 나오는데 묘역의 관리가 잘되어 있는건 예전에 성역화 사업으로 지속적인 관리를 해왔기 때문이다.
김유신장군의 묘 역시도 피장자가 확실한건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은후 금산원에 장사를 지냈다고 전하고, 삼국유사에는 모지사의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금산원이나 모지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이 되지않고 있다.
김유신묘는 지름이 30m에 달하는 원형의 큰 무덤이다. 봉분 둘레에는 둘레돌을 두르고 그 외곽에는 바닥에 깐돌을 깔았으며, 돌난간(石欄干)을 둘렀다. 둘레돌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둘레돌과 같은 양식으로서 으로 짜여 있다.
앞에 보이는 상석도 근래에 설치한 것이다.
좌측의 비석은 조선시대 후기에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워놓은 비석이다.
비석에는 신라태대각간 김유신의 묘 라고 쓰여져 있는데, 언뜻봐도
조선시대 비석임을 알수있다.
우측의 비석은 근래에 김해김씨 문중에서 세워놓은 비석이다.
비석의 하단에 끝글자 묘(墓) 자가 물을 부으면 릉(陵)으로 바뀌는데
이것은 누군가가 다른 석질의 돌가루로 모각해 놓아서 그런것이다.
십이지신상은 다른 왕릉이 갑주무장상
(甲胄武裝像)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평복에 무기를 들고 있다.
한편 이곳 묘역에서 오래전 납석제(蠟石製) 12 지신상인 묘상과
오상 2개가 발견되었다. 높이가 30㎝인 소상(小像)들이고 갑주무장
상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뒷편에서 바라본 김유신 장군묘.
아래의 사진들은 일제강점기때 찍은 흑백사진이 몃장 남아있다.
일제강점기때 김유신 장군묘. 100년전에는 묘역의 둘레석 기둥이
훼손되고 몇개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다.
둘레석의 기둥은 대부분 부러져 있었다.
뒷편에서 찍은 일제강점기때 김유신 장군묘 사진.
흥무왕릉앞의 신도비도 근래에 세워진 것이다.
스토리가 있는 경주여행.
신라출신도 아니고 가야출신의 김유신장군. 패망한 가야왕국의 왕손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사로잡은 김무력이다. 595년 (진평왕17년)충북 진천에서 태수이던 김서현의 아들로 태어나 가야 김수로왕의 13대손이고,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은 태대각간의 직위와 훗날 흥덕왕때 흥무대왕에 추증 되었으며 673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유신은 60이 넘은 나이에 조카인 지소부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5남4녀의 자식을 두었으니 대단한 정력가의 소유자 이기도 하다. 암튼 그시대는 근친혼이 가능했지만 40살 넘게 차이가
나는 여동생 (문명왕후)의 딸(지소부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9명의 자식을 생산하는게 가능이나 할까~?
김유신도 당시의 엄격한 골품제도가 행해지던 신라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쳤다고 봐야한다. 신라사회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용병으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처세술의 달인이 아닐까~?
김유신 장군묘 근처에도 접근성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찿아오는 곳이다.
특히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는 벚꽃터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
첫댓글 잘배우고갑니다
경주에는 자랑할게 많아요
경주에는 다른곳보다 비 잘안오는
이유는 왕 들의 무덤이 만키에 비는
잘오지 않은 경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