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 브레이크 기간에 경기도 없고 심심한 마음으로
이 것,저 것 책을 뒤지다가 본인이 작성한 글
사실성 90을 근거로 본인이 10의 과장을 첨부하여 작성하였음을 알아두시길
1.허정무감독,고재욱감독의 징크스를 이용하다.
때는 90년대,
지금의 국가대표 감독 허정무감독은 당시 전남의 감독을
현 관동대학교 감독인 고재욱감독은 당시 울산의 감독을 하던 시절이었다.
고재욱감독에게는 경기 전 악수를 나누면 진다는 개인적인 징크스가 있었다.
매 경기 상대감독 및 선수들의 악수 제의를 거절하고 잘 버텨왔던 고 감독.....
그 날도 역시 악수를 거부하고 잘 버티고 있었다.
킥오프 전 선수들의 트레이닝 모습을 뒷짐 지고 관찰하던
고 감독 뒤에 허정무감독이 나타나서 힘으로 오른 손을 잡고선
일방적으로 악수를 하였다.
화가 난 고재욱 감독은 당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고 한다.
결국 그 경기는 전남이 울산을 꺾었고,
그 후 고재욱과 허정무는 만나더라도 인사조차 안 했다는 후문이....ㅋㅋㅋ
2.종이 한 장으로 한 마지막 중계
때는 역시 90년대,
KBS위성1,2방송이 있었던 시절이다.
그 방송국은 곧 잘 K리그를 중계해주었는데,
당시에 해설위원은 현재처럼 프리랜서 기자 혹은 전문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선수출신 행정가들이었음.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옛 축구선수는 은퇴 후 행정가로 활동하였는데,
당시 축구중계를 총 담당했던 PD의 제의로 중계를 맡게 되었다.
꽤 명문팀끼리의 대결이었고,
유명선수들도 줄비했기 때문에,
그 해설위원은 별 다른 준비없이 경기장으로 갔다.
유명선수나 감독들과 모두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말 하나엔 자신이 있었다.
허나 그 날 경기는 양팀 감독이 2진급 및 신인선수들을 내보냈고,
종이 한 장만 가지고 온 해설위원은 처음 보는 선수들에 당황하며,
말을 더듬기 일수였고,결국 별 말 하지 못 한채 경기가 끝났다.
경기가 끝난 후 방송국에 해설에 관한 항의전화가 쏟아졌고,
결국 그 해설위원은 한 경기만 하고 그만두었다는 후문이...
3.김호곤과 변병주의 관계
80년대 초 국가대표팀은 보통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을 하였다.
큰 대회를 앞두고 태릉선수촌에 모여서 훈련을 하고 있는데,
연세대와 고려대에서 국가대표팀에게 전화가 왔다.
정기 연고전이 있을 예정이니 그 소속 선수들을 다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트레이너였던 김호곤은 감독과 상의 후 선수들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단, 조건은 경기가 끝나는 날 자정까지 선수촌으로의 복귀였다.
경기가 끝난 날 김호곤은 12시까지 선수들을 기다렸지만 끝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당시 경기를 이긴 학교 선수들은 동문들이 마련한 술자리에 끌려갔고,
진 학교 선수들 역시 마음을 달랜다며 술을 먹으러 갔던 것이다.
다음 날 김호곤 트레이너는 눈을 뜨자마자 정문으로 향하였다.
오전 9시 술이 아직 덜 깬 선수들이 하나 둘씩 들어왔고,
김호곤은 감독에게 알려지기 전에 자신의 선에서 마무리 하려고,
선수들을 다그쳤다.
꿀밤 한대씩 때리고 숙소로 보내었는데,
마지막 남은 선수는 변병주선수였다.
김호곤 트레이너가 평소 아끼던 선수였고 말동무였던 사이였다.
김호곤은 변병주를 운동장으로 데리고 가서
일명 빠따질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김호곤은 숙소에 가서 혼자 눈물을 흘렸고,
변병주와 서로 눈물을 흘리며 포옹을 했다는 후문이....
아직도 김호곤은 변병주를 만나면 그 때 생각에 이 것,저 것 챙겨준다고 한다.
4.1983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4강의 비밀
2002월드컵에서 한국이 4위를 차지하기 전에,
한국 축구계의 가장 큰 자랑은 바로 1983 멕시코 청소년대회 4강의 신화였다.
하지만 그 대회의 한국 대표팀은 진정한 청소년들이 아니었다.
60년대 보통 선수들의 출생신고가 2,3년 실제 출생년도와 차이가 난 것을 이용하여,
협회가 대부분의 선수들을 20대 중반 선수들로 차출했던 것이다.
당시 유명해진 최순호,신연호,김종부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20대 중반의 한참 기량이 물 올랐을 때의 선수들이었다고 한다.
5.어떻게 해서든 한국을 이기고 싶었던 중국
아직도 한국과 중국이 만나면 공한증이라 불리는 중국의 징크스가 있다.
막 아시아에 축구가 알려지고 활성화 될 시기였던 1930년 대....
그 때 역시 조선팀들과 중국팀들이 만나면 조선팀들이 이기기 일수였다.
당시 중국은 조선팀을 상해로 초청하여 4개팀이 대회를 열었다.
중국 측은 조선선수들이 수세식 화장실을 잘 모른다는 것을 이용하여
좋은 호텔로 배정하여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하게 하였다.
변기를 처음 본 선수들은 몸에 적응되지 않는 수세식 변기를 사용하지 않고
푸세식 변기가 있는 민가,상가에 까지 가서 생리현상을 해결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회 도중 중국 측은 조선 선수들에게 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만취할 때까지 마셨던 선수들은 다시 숙소로 복귀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문제는 길에서 깡패들을 만났던 것이다.
당시 들리는 선수들에 말에 의해서는 그 깡패들도
중국에서 고용한 사람들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아무튼 사람 때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깡패들과
만취한 사람의 대결을 불 보듯 뻔하지만,
당시 조선선수였던 오봉환과 임용업의 활약(?)으로 깡패들을 물리쳤다는 후문이..
결국 조선대표팀은 중국팀과의 2경기 모두 이기고 돌아오게 되었다.
공한증의 시작은 그 때부터인가 보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4번 사실은 좀 정정할 필요가 있을거 같아요. 예전엔 출생신고 늦게 한 경우가 있으니..호적상으로는 문제가 없던 경우죠.
야사는 야사일뿐
4번의 경우에는 최근 아프리카 선수들에 대한 의혹과 약간은 겹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우리나라는 그나마 확인이라도 되지, 아프리카는 그런것도 안되니ㅋ
베이비붐 세대에게 갓난아기시절이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것이라..